다음 글은 프레시안 3월 15일에 실린 <심규호의 탈춤 4>에 이어지는 글이다.
<지기금지>(至氣今至)를 만난 것은 2017년 겨울 부산 민주공원 공연장이었다. 슬쩍 물어보았다. 지극한 기운이 뭡니까? 민족, 민중, 탈춤을 자랑삼아 패용하고 다니던 이가 차마 던질 수 없는 무지의 질문이었다. ‘지기’는 지극한 기운이니, 그것이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임은 알겠으나, 바로 그 ‘지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필자는 중국문학이론이 전공인지라 중국문학의 중요 개념에 대한 연구에 천착한 적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氣’였다. 밑에 ‘미米’자가 들어간 이 글자는 원래 손님에게 보내는 꼴이나 쌀의 뜻이다. 그보다 앞선 글자가 ‘기气’인데, 이는 운기雲氣, 즉 구름이 위아래로 좌우로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결국 ‘气’는 흐지부지 사라지고 ‘氣’가 남아 ‘气’를 대신하게 되었다.
氣는 흥미롭다. 중국 춘추시대에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전국시대로 넘어오면 갑자기 풍부해진다. 장자만 해도 기모氣母, 기식氣息, 천기天氣, 혈기血氣, 육기六氣, 지기志氣, 운기雲氣, 신기神氣, 지기地氣 등등 마치 종류별로 나열한 듯한 느낌이 든다. 대지가 내뿜는 바람의 기, 천지와 음양의 기, 생명과 관계되는 기, 그리고 사람의 심령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서의 기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기의 함의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새롭게 정의되고, 활용된다. 그냥 공기空氣가 때로 원기元氣가 되고, 심지어 문기文氣가 되었다가 뜬금없이 ‘이理’가 등장하여 ‘기’와 대치하다 올라타는 것 같더니 어느새 달라붙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기금지>의 '지기'는 영 다르다.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지기 – 혼돈 – 카오스모스 – 율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윗니와 아랫니가 어그러진 부정교합인 듯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본디 기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다.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 정형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는 또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여 저 꽃에도 있고, 길고양이에게도 있으며, 나에게도 있고 그대에게도 있다. 그러니 굳이 저 건너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여기서 기존의 ‘향벽설위向壁設位’가 아닌 ‘향아설위向我設位’가 가능해진다. 아니 필연적이다. 상제喪制의 핵심인 제사에서 벽에 있는 신위, 저 세계에 있는 신위에 대고 절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공간에서 내 마음에 모신, 내 마음에 있는 신령과 조상과 스승에게 절하자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향아설위’이다. 맞는 말 아닌가? 신이 어디에 계신가? 조상은 또 어디에 계신가? 하여 죽은 이가 어찌 현현하여 제사를 올린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면 알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눈에 기는 혼돈스럽다. 뒤섞여 있고, 제멋대로이며,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으되 도통 인지되지 않으니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카오스가 냉장고의 이름이 된 이 마당에 어찌 다짜고짜, 막무가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알지 못하는, 평범한 우리는 눈치 채지 못하는 그 카오스에 묘한 조화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혹자는 태극의 음과 양으로 구분했고, 또 누구는 무無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무에서 유가 나오고, 음과 양이 길항하면서 만물이 소생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율려인가? 율려는 소리와 음악의 가락을 의미한다.
율律은 12개 음률 가운데 양陽의 소리이고, 여呂는 음陰의 소리이다. 그 각각의 소리가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 노래가 되며, 그 음악과 노래에 따라 춤이 추어지고, 춤을 추니 절로 마당이 생겨나며, 마당이 생겨나니 사람이 모이게 된다. 그 마당에서 그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 어울리면서 서로의 ‘지기’를 주고받으니 이것이 곧 신명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율려와 풍류는 참으로 잘 어울린다. 율려는 지기이자 음양, 활동하는 무無이고, 풍류는 그것이 바람처럼 흐르는, 다시 말해 지기가 춤을 추듯, 한삼을 휘날리듯 좌우상하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를 도닥거리는 바람결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고리 또는 돌아옴
그렇다면 이러한 ‘지기’는 어떻게 활동하는가? 앞서 말했다시피 ‘기’는 근본이 움직임이다. 활동하지 않으면, 곧 기절氣絶이고 기가 막힘이며, 기가 죽음이다. 그러니 활동해야 하는데, 그 움직임이 곧 고리(환環)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춤은 곧 생명의 움직이자 활동이다.
대한민국 대학가에서 이른바 탈춤부흥운동의 시작은 1970년대 초기이며, 중심인물은 1971년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창립공연 <봉산탈춤>의 연출이자 탈꾼이었던 채희완, 이애주 등이었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우후죽순으로 탈춤반이 생겨났고, 수많은 대학 탈꾼들이 쏟아져 나왔다.
채희완은 첫 번째 발걸음을 뗄 때 가졌던 마음가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흔치 않는 사람이다. 어느 날 1980년대 연합탈춤반의 여러 벗들과 함께 경주 채 교수댁에서 노닐다 떠나는 아침 한 권의 책을 받아들었다. <탈춤의 민족미학>(김지하, 실천문학사, 2004)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읽었다. 너무 늦게 접했다는 아쉬움에 절로 나오는 한탄과 끝없이 펼쳐지는 시인의 시적인 상상력과 견고한 사상에 예전 대설大說 <남南>(창비, 1984)을 읽을 때의 감흥이 삐져나왔다. 또한 채 교수가 탈춤에서 마당극으로 다시 마당굿으로 변화했던 동인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한국의 민중극>(창비, 1983)에 마당굿 연희본 14편이 실려 있다) <소리굿 아구>에서 시작하여 <칼노래 칼춤>을 거쳐 <지기금지>에 이르기까지 마당의 전환, 신명의 어울림, 과거와 현재의 순환, 고리의 현재성 등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지지난 해 <지기금지> 굿판에 참가하고 돌아와 그 느낌을 적은 것이 있다.
유목민 또는 노마드nomade
우리 민족은 농촌을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해온 지 오래되어 농경문화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유목민족 또는 유목민이라고 하면 왠지 남의 나라 일인 것만 같다. 하지만 스키타이의 황금 문명과 거대한 무덤군이 우리 땅에도 그대로 남아 있고, 알타이 산맥 기슭의 언어가 지금의 우리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지라 우리의 혈맥 속에 유목민의 DNA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사서나 기록이 일실되었다고 하여 역사 이전의 역사를 믿지 못할 전설 나부랭이로 치부하였으니 이로 인해 역사가 축소되고 스스로 한반도 안에 자신을 우겨넣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전락하고, 발해는 인연이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광대한 한민족의 상고사를 믿지 못하겠다고 우겨대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발끈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국의 반고盤古와 삼황오제三皇五帝,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기억하고, 치우蚩尤는 알면서 마고를 모르는 것은 또 뭔가?
앞서 “율려가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적혀 있는 <부도지符都誌>는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로 알려진 <징심록澄心錄>의 15지誌 가운데 첫 번째 나오는 맨 처음에 실린 지誌의 제목이다. 지誌는 문체의 이름이자 사서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도지>는 ‘부도’, 즉 천도에 부합하는 도읍지의 역사란 뜻이다. 그 도읍지는 거인 마고麻姑가 사는 황궁으로 천산, 곤륜산, 히말라야 산맥이 몰려드는 파미르 고원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1만여 년 전 우리 한민족의 일파가 발원한 곳이다. 마고는 여성으로 모계 씨족사회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거인이었다는 그녀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제주의 설문대할망 또한 거인이며, 천지창조의 여신이다. 또한 그녀와 두 딸(궁희穹姬와 소희巢姬)이 곧 삼신할망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상징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다. 마고의 신시神市에 세웠다는 솟대이다. 제주의 거욱대(방사탑) 역시 탐라국의 솟대가 아니겠는가?
저 멀리 ‘부도’에서 출발한 이들은 천산 기슭을 따라 동진하여 몽골초원을 가로지르고 만주평원을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을 터이다. 그 와중에 환인, 환웅, 단군으로 넘어가는 부계사회가 실현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한민족의 북방 상고사이자 유목민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던 정착민들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정착 농경문화와 이동 유목문화를 동시에 지닌 민족이다. 게다가 현재 우리는 이미 정착문화에서 벗어나 유목이동문화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들뢰즈가 말한 ‘노마딕 소사이어티(nomadic society)’, 즉 유목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필자가 바라보고 손을 움직이고 있는 컴퓨터는 물론이고 핸드폰, 승용차, 공항 등등이 바로 우리가 새로운 유목사회로 진입했다는 표지이다. 이 점은 시인이 이미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탈춤을 이야기하다 뜬금없이 유목민의 삶, 유랑의 삶, 이동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탈춤에 바로 이러한 정착성과 유목성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탈춤은 농촌형과 도시형으로 대별한다. 경남의 오광대나 야류 등은 농민들이 주체가 되고 농촌 마을에서 연희되는 농촌형 탈춤이고, 봉산이나 강령 등 도회지의 시장에서 전문적인 연희패들이 연희하는 것이 도시형 탈춤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농촌형은 정착민들의 춤과 노래이고, 도시형은 유랑하는 연희패들의 노래와 춤이다. 이전까지 우리는 농촌형과 도시형만 알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것이 정착문화와 유목문화의 만남이라는 데까지 한 걸음 더 나간 셈이다.
흰 그늘, 그리고 한
우리 탈춤(북방은 탈춤, 중부는 산대놀이, 남방은 오광대, 야류. 편의상 탈춤으로 통칭함)의 탈을 보면 웃음과 울음의 감정이 번갈아 든다. 툭 튀어나온 이마며 삐뚤어진 입, 얽힌 얼굴에 얼룩덜룩한 피부, 왕방울 눈에 움푹 들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속눈, 겹겹으로 쌓인 주름과 엉클어진 머리카락. 영락없는 거지꼴이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춤추는 몸은 오히려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교묘한 정반正反의 결합은 탈춤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한때 혁명아로 취급받았던 말뚝이는 교활한 거간꾼이자 강간범이기도 하고, 취발이는 파계승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한이되 또한 자식을 낳고도 대책 없는 한량이다. 탈춤의 대사를 보면 온갖 욕지거리며 외설스러운 대사가 하나 가득인데,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에 나오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은 물론이고 당대 시인 장계張繼의 유일하게 남은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의 “월락오제상만천月落烏啼霜滿天”이 불림이 되어 불려진다.
이는 단순히 솔직함이라거나 이중성이라는 말로 풀이하기 힘들다. 또한 한때 그러했던 것처럼 뭉뚱그려 ‘민중’의 상징으로 삼기에도 문제가 있다. 이는 왜곡과 해탈, 즉 탈을 쓰는 것과 벗는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우선 왜곡을 살펴보자. 이른바 민중 또는 백성들의 삶이 이렇듯 왜곡된 것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자연 순환을 거스르는 죽임의 개입으로 말미암는다. 맞아죽고, 목매달아 죽으며, 전동차에 끼어 죽고, 물에 빠져 죽으며, 급기야 약을 먹고 죽으며, 한 명이 아니라 일가족이 몽땅 죽는다. 이는 생명의 순환으로서 죽음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살해, 죽임이다. 또한 설사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공포와 불안, 억압과 고통, 슬픔과 외로움은 그대로 축적되어 몸에 각인된다. 이를 일러 우리는 ‘한恨’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한’의 얼굴이 바로 탈로 형상화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고, 빛이 아니라 그늘이다.
하지만 ‘한’이 그대로 몸에 각인된 상태로 남아 끝내 ‘한풀이’하지 못하면 억울하여 어찌하겠는가? 하여 탈춤이 그 한풀이의 마당이 된다. 망자를 생자로 환원시켜주고, 생자를 망자에게 인도하며, 어둠의 그늘을 흰 빛으로 물들게 한다. 그리하여 망자가 생자와 더불어 춤추고, 산자는 죽은 자의 노래를 부른다. 비록 욕망이 분출하고, 처절한 죽음이 생생하게 재현되며, 대낮의 백장동티가 낯붉히게 하지만, 탈춤이기에 용인되고 허여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 한의 풀이, 그늘의 흰 빛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 시인은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실천문학사, 2005)에서 시문학과 관련하여 ‘흰 그늘’의 담론을 펼치고 있다. 이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우들에게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언젠가 채희완 교수가 김지하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 시인은 1998년 율려학회를 창립하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율려사상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채 교수는 여전히 탈춤의 바람결을 찾아가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필자에게 축복이다.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이름을 딴 신촌 주막에서 처음 김 시인을 뵈었을 때가 생각난다. 이제 망인이 된,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모심’으로 만날 수 있는 시인의 한 마디로 글을 끝내고자 한다. <탈춤의 민족미학> 책머리 마지막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Book世通'에 실린 '탈춤과 민족미학'의 내용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78학번 가면극연구회 출신. 전 제주국제대학교 교수,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shim42start@hanmail.net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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