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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울의 최고 전망대! 한양도성 ‘순성놀이’(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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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울의 최고 전망대! 한양도성 ‘순성놀이’(下)    

[2022년 7월 서울학교는 <혜화문→말바위→숙정문→백악→창의문→윤동주 시인의 언덕→인왕산→국사당→돈의문터→숭례문 구간>]

전하는 이야기로, 한양도성이 축조되자 도성 안 사람들은 ‘순성(巡城)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고 설명하였듯이,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 전문가)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서 지난 6월(혜화문-낙산-흥인지문-목멱산-숭례문)에 이어 7월, 나머지 한양도성을 걸어 ‘순성놀이’를 완성하려 합니다.

서울학교는 7월, 서울의 최고 전망대 코스로, 짙은 녹음 속 답사길인 한양도성의 혜화문에서 숙정문, 창의문, 숭례문까지를 순성하면서 한양의 주산 백악과 우백호 인왕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도성과 역사유적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원한 녹음 속에 숨어 있는 한양도성 북대문인 숙정문Ⓒ서울시

서울학교 제81강(제5기 제3강)은 2022년 7월 10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 혜화동 혜화문(서울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왼쪽으로 대로변 190m. 종로구 혜화동 28-5) 앞에서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혜화문-흥덕동천발원지-응봉-말바위-숙정문-곡성-청운대-백악-창의문-(점심식사)-윤동주시인의언덕-인왕산-곡성-선바위-국사당-인왕사-서전문터-돈의문터-소의문터-태평관터-숭례문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7월의 서울학교 <한양도성 순성놀이(下)> 답사도. 혜화문에서 숙정문, 백악, 창의문, 인왕산을 거쳐 숭례문까지 순성한다. 답사도는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의 <한양도성 전도>에 답사지를 추가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도성 순성놀이(下)>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백두산 정기를 백악까지 이어라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추가령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한북정맥이라고 부릅니다. 정맥의 본줄기는 도봉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노고산과 고봉산을 지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들고, 다른 한 줄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삼각산의 세 봉우리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을 일군 다음, 보현봉에서 한줄기는 문수봉으로 이어져 북한산성을 이루고 다른 한줄기는 형제봉, 구준봉을 지나 마침내 한양의 주산인 백악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산줄기의 흐름을 풍수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어우러져 형성된 기운이 산줄기의 뻗침을 따라 전해져 온다고 믿었던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헌걸찬 정기가 산줄기를 타고 한양의 주산인 백악으로 이어져 그 기운을 한양 도읍에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봉에서 백악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들머리에 해당되는 곳이 크게 내려앉아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까닭에 비보책(裨補策)이 필요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세검정에 있던 총융청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들을 동원해 내려앉은 안부에 흙을 퍼 날라 돋워줌으로써 산의 기운이 원활히 이어지도록 하였습니다. 이곳이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처럼 흙을 보충한 고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래로 북악터널이 뚫려 있습니다.

▲한양의 우백호 인왕산에 펼쳐진 한양도성Ⓒ서울학교

한양의 주산 백악

백악(白岳)은 한양 도읍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에서 북쪽에 위치합니다. 달리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으로도 불리는데, 흔히들 북악(北岳)이라고도 부릅니다. 백악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백악산신을 모시고 진국백(鎭國伯)에 봉하였기에 신사의 이름을 따라 그리 불렀습니다. 면악은 고려시대에 불리던 이름입니다. 남경을 설치하려고 궁궐터를 찾던 중 “삼각산의 면악 남쪽이 좋은 터”라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면악 남쪽에 남경의 궁궐인 연흥전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이 지금의 청와대 자리이고, 면악은 바로 지금의 백악을 일컫습니다. 공극산은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백악을 “북쪽 끝을 끼고 있다”는 뜻으로 공극이라 이름 지어준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북악은 이름에 대한 역사적인 연원은 없고, 단지 일제강점기에 서울의 내사산 중에 북쪽에 있다고 북악이라 하였습니다.

백악은 세 개의 수려한 골짜기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백악의 서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대은암동천(大隱巖洞天), 또 다른 하나는 백악의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휘감아 흐르는 삼청동천(三淸洞天), 마지막으로 도성 밖인 백악의 북서쪽 사면을 흐르는 백석동천(白石洞天)입니다. 대은암동천과 삼청동천은 도성 안의 청계천으로 흘러들고, 백석동천은 도성 밖 홍제천으로 흘러듭니다.

삼청동천에는 옥호정(玉壺亭)이라는 김유근의 별서가 있었는데, 순조의 장인으로 외척 세도정치를 편 안동김씨 김조순이 자신의 별서로 사용하다가 아들 김유근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옥호정은 삼청동 길의 서쪽 언덕 위, 현재의 칠보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청동의 동쪽 골짜기와 서쪽 골짜기 사이에는 서촌의 다섯 사정(射亭)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운룡정이라는 활터가 있었습니다. 온전한 활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바위에 새겨진 ‘운룡정(雲龍亭)’이라는 세 글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서촌 5사정은 삼청동의 운룡정, 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과 등과정(登科亭) 그리고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을 일컫는 말입니다.

백석동천은 달리 백사실(白沙室) 계곡이라고도 하며, 별칭 때문에 계곡에 남아 있는 별서 터가 백사 이항복의 유적지로 잘못 알져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항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백사실의 원래 이름은 백석실(白石室)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허진인(許眞人)이 개척하였고, 한때는 추사 김정희의 별서였다가 1830년대에 중건되었습니다.

박규수의 <환재집>에는 백석정이 허진인이 독서하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고, 김정희의 <완당전집>에는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백악의 능선이 내려서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그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세검정과 조지서 터 그리고 탕춘대 터가 있습니다.

세검정(洗劍亭)이라는 명칭은 인조반정 때 반정의 주역들이 칼을 씻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보다는 총융청이 이곳에 있었기에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쉬면서 칼을 씻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검이란 단순한 칼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칼을 씻어 칼집에 넣어둠으로써 더 이상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의 평화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곳에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는데 계곡물이 너무 맑아 한 번 사용한 한지의 먹물을 씻어내고 넓은 바위에서 말려서 다시 종이로 만들던 곳입니다.

대은암동천은 유란동, 도화동 계류로서 경기상고, 경복고 일대에 있었습니다. 대은암(大隱巖), 만리뢰(萬里瀨)는 남곤의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와 폭포인데 계관시인 박은과 청학도인 이행이 찾아와 교유를 맺었던 곳입니다. 청송당은 성수침의 별서로 스승 조광조의 처형으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바위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조원의 집인 운강대(雲江臺), 겸재 정선의 집인 인곡유거(仁谷幽居),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부터 어머니를 살려내고 두 아들이 함께 죽어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쌍홍문(雙紅門)이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효자동이란 동명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사묘(私廟)인 칠궁(七宮)이 있습니다. 왕실의 사묘란 조선시대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그의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 추존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이씨의 연우궁,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경우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선희궁,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의 대빈궁, 추존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김씨의 저경궁 등 6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의 덕안궁도 옮겨와 칠궁이라 하였습니다.

▲백악을 내려서면 바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서울시

한양의 우백호 인왕산

인왕산(仁王山)은 한양의 내사산 가운데 우백호에 해당하며, 달리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합니다. 인왕산이 임금이 머무는 궁궐의 오른쪽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右弼雲龍)”는 의미로 필운산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항복의 집이 있던 필운대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인왕산이 품고 있는 계곡을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고 합니다. 인왕산은 사림(士林)의 문화가 터를 잡기 이전부터 한양의 불교 성지였습니다.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인왕사를 비롯해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 세조 때 지은 복세암, 궁중의 내불당 등 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사찰이 가장 많았습니다. 특히 인왕은 금강역사(金剛力士)로 사찰 입구에 있는 수호신임을 미루어 볼 때, 인왕산이 한양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높이 솟은 인왕산 주봉의 암반은 당당한 위풍을 뽐내고, 그 주변과 계곡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바위 형상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합니다. 모양새에 따라 선바위, 말바위, 매바위, 기차바위, 부처바위, 맷돌바위, 치마바위, 감투바위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습니다. 암석 숭배 혹은 바위정령을 믿는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제사 지내는 터’라는 뜻을 지닌 선바위[墠岩]는 이곳에서 무학대사가 기도를 올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이은 조선의 건국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두 개의 큰 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 또는 이성계 부부의 선암(禪岩)으로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인왕산이 동쪽으로 부려놓은 터전은 넓고 수려하여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사직단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맑은 계곡에 기암괴석과 송림이 어우러져 조선 사대부들의 살림터와 정자가 많았습니다. 세종과 송강 정철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 안평대군이 살았던 수성동의 비해당,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 서인(庶人)과 중인들의 시회를 열어 위항문학을 부흥시킨 천수경의 정원인 송석원(松石園)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인왕산이 북쪽으로 부려놓은 터전은 수려하고 그윽하기는 하나 넓지 못하여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대원군의 석파정 등 왕족의 별장이 몇 채 있었을 뿐입니다.

인왕산 남쪽 끝자락에 기대고 있는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에게 제사 지내던 곳입니다. 고대국가에서는 임금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믿어 대대로 세습되었으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씨가 마르지 않게 대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했으므로, 비옥한 토지와 튼실한 씨앗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궁궐을 중심으로 임금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곳[宗廟]을 왼쪽에 두고 조상의 음덕으로 대를 잘 이을 수 있도록 기원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社稷壇]을 두어 임금이 친히 납시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천수경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중인계층이 인왕산 아래 옥류동의 송석원에서 1786년(정조 10)에 결성하여 1818년(순조 18)에 해산한 문학모임입니다. 달리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부르며, 송석원은 천수경의 별장 이름입니다.

사대부문학이 중심을 이루던 조선사회에 서인과 중인을 중심으로 하는 위항문학이 등장하게 된 것은 숙종 때입니다. 신분이나 경제력에서 사대부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던 위항인(委巷人)들이 자기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문학모임인 시사였고, 대표적 그룹이 송석원시사였습니다. 이들은 김정희가 쓴 송석원이라는 편액을 걸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시인들과 어울려 시와 술로 소요자적 하였는데, 후일 흥선대원군도 여기에 나와 큰 뜻을 길렀다고 합니다.

▲수성동계곡의 기린교. 멀리 인왕산 정상이 보인다.Ⓒ서울학교

음양오행과 오상(五常)의 뜻으로 지은 도성의 사대문

한양도성 사대문의 이름에는 음양오행사상과 유교의 인간의 도리를 뜻하는 오상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춘하추동(春夏秋冬), 동서남북(東西南北), 목금화수(木金火水)를 서로가 서로에게 대응하도록 작명을 했습니다. 인(仁)의 경우 어질다는 의미에 걸맞게 사계절 중 온화한 봄[春]에 대응하며, 이는 오행사상에 따라 목(木)에 해당하는 동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의(義)는 엄정해야 하기에 계절로서는 가을[秋]에 대응하며, 오행 중 금(金)에 해당하는 서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예(禮)는 화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여름[夏]에 대응했으며, 오행 중에서는 화(火)에 해당하는 남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智)는 공자의 지자요수(知者樂水)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행 중 수(水)에 대응하며, 계절로는 겨울[冬]이 됩니다.

그래서 숙정문엔 원래 지(智)가 이름에 들어가야 했지만 여기만 규칙을 따르지 않았는데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숙청문(肅淸門)의 '청(淸)'에 이미 물[水]이 있어 지(智)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원래 이름을 소지문(昭智門)으로 하려 했다는 설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으며 대신 숙종 때 한양도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탕춘대성의 홍지문(弘智門)에 지(智)가 쓰이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과 소문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北大門]으로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세운 문으로 원래는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의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으나 1523년(중종 18) 청(淸)을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靖)자로 바꾸어 '숙정문'이 되었습니다.

숙정문은 건립된 후 곧 폐쇄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북 쪽 문을 숙정문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門樓]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풍수지리적으로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여서 길을 다니지 않도록 하여 보존한다 해서 소나무를 심어 폐쇄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숙정문의 위치가 산속 깊이 음방(陰方)에 있어 이를 열어둔다면 도성의 부녀자들이 음란해지기 때문에 닫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와는 다른 근본적 이유는 도성으로의 출입문으로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성에서 의정부, 포천, 원산 등으로 갈 때 숙정문을 통과하려면 성북동 골짜기로 한참 돌아가야 하지만 혜화문을 이용하면 빠르고 편하기 때문에 주로 혜화문을 이용하였고, 숙정문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폐쇄의 명분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숙정문도 특별한 경우에는 그 문을 열었는데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숙정문은 북쪽 음에 해당하여 가뭄이 들면 문을 열어 음을 기운을 살리고 남쪽 숭례문을 닫아 양의 기운을 조절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때에는 숙정문을 닫아 음의 기운을 끊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504년(연산군 10)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세우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숙정문은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문루가 있었음을 고증해 복원하였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도성의 북쪽 소문[北小門]으로 속칭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하는데 조선 초기 사료에서는 창의문 대신에 장의문(莊義門, 藏義門, 壯義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하문은 '자하골의 문'이란 뜻으로 한양 천도 이후에 창의문 일대의 풍광이 마치 개성의 명승 자하동(紫霞洞)과 비슷하여 '자하골'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1396년(태조 5) 성곽을 쌓을 때 축조된 이후 1416년(태종 16) 당시 풍수지리학자들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민간의 출입이 폐쇄되었고 국가적인 공역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습니다. 1506년(중종 1) 재개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문루가 소실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들이 이 문을 통과하여 반정에 성공하였습니다. 1740년(영조 16)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문루가 복원되었으며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습니다.

산 속에 있었던 영향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수난을 면했고 1958년 보수공사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 온전하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가 나왔는데 “1741년 6월 16일에 상량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선바위는 무학대사가 기도를 올려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서울시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과 소문

돈의문(敦義門)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西大門]이며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으로,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태조 5)에 건립되었으며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돈의문이라 하였습니다.

축성 당시에는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되었는데 지금의 위치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413년(태종 13) 풍수학생 최양선의 상소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습니다. 서전문을 열면서 왕래를 편하게 하려면 권신이었던 이숙번의 집 앞길이 적당하였으나, 이숙번이 권세를 이용하여 보다 남쪽에 있는 상왕의 거처 앞길로 결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세종이 즉위하여 그런 사실을 알고 인덕궁 대문 때문에 굽은 길로 되었던 것을 인덕궁 문을 옮겨 곧은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덕궁은 상왕으로서의 정종 거처로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사직터널 위 안부(鞍部)의 우묵한 곳이 바로 서전문의 터로 추정됩니다. 1422년(세종 4)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711년(숙종 37)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지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5년, 일제는 경성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하면서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그냥 두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습니다. 철거 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의문(昭義門)은 한양도성의 서쪽 소문[西小門]으로, 강화와 인천으로 향하는 관문이며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에 내어갈 수 있는 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소덕문(昭德門)으로 불렸는데 1744년 영조 때 문을 개수하면서 '소의문'으로 고쳤습니다. 1472년(성종 3) 예종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 한 까닭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으나 1738년(영조 14) 문루의 개축공사를 시작되면서 영조가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하였고 1744년(영조 20) 문루가 완성되자 소의문으로 고쳤다는 것이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개칭된 것은 1472년이 아니라 영조 때였음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처형장 중 한 곳이었는데 특히 1800년대 중반 이후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새남터 성지, 절두산 성지 등과 더불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습니다. 1908년 9월에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이 헐렸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가 소의문 지역에 도로와 경의선 철도를 낸다는 명분으로 소의문을 헐어버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7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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