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스포츠를 하기 전에는 제가 그렇게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승부욕을 드러내는 게 창피했죠. 그런데 지금 전 '반칙왕'이에요."
지난달 21일 저녁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상록근린공원 농구장에 3명의 여성이 모였다. 16명의 회원을 둔 이 지역 여성 팀스포츠 모임인 의정부금오지구생활체육모임 회원인 이들은 이날 저녁 4명이 모여 농구를 할 예정이었다. 낮에 많은 눈이 내린 궂은 날이라는 것도, 야외 운동을 하기엔 춥고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도, 한 명의 회원이 늦는다는 것도 이들이 농구를 하겠다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농구장에 골대가 안 보였다. 최근 다른 여성 풋살팀과 친선 경기를 치르며 풋살에 집중하느라 농구를 잠시 접어 둔 사이 늘 모이던 공원 농구장의 골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황은 잠시였다. 지난해 8월 이 모임을 처음 만든 우희(가명·30·회사원) 씨와 초기부터 참여한 영린(가명·27·공무원) 씨는 노련하게 주차장으로 이동해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배드민턴 채를 꺼냈다. "오늘은 배드민턴 칩시다."
지난해 8월이다. 퇴근 후 동네에서 함께 배드민턴을 같이 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에 더해, 혹시 사람이 많이 모이면 "동네 공원 농구장을 차지하고 싶다"는 소박한 야심을 마음에 품고 우희 씨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함께 운동할 여성들을 모집했다. 글을 올리고 2주 만에 당장 5명가량의 여성이 가입을 신청했다. 활동을 이어가니 지인 소개로 온 이, 농구 수업을 같이 들었던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20~30대 여성으로 구성된 회원 수가 16명에 이른다.
운동 종목도 배드민턴으로 시작해 농구, 탁구, 풋살에 이르는 다양한 팀스포츠로 넓혀 갔다. 정해진 요일이나 종목 없이 단체 채팅방에서 향후 일주일간 참석 가능한 날짜에 회원들이 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모임 날짜와 종목을 정한다. 이렇게 가능한 사람만 참여하는 방식으로도 주 3회 정도는 모임이 열린다. 내부에 독서 소모임, 농구 소모임까지 꾸려질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농구장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모임을 꾸린 우희 씨를 포함해 회원들 대부분은 팀스포츠 경험이 없었다. 운동 경험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헬스, 수영, 요가 등 주로 혼자 하는 운동을 해 왔다. 익숙하지 않은 팀스포츠를 주제로 모임을 만든 이유로 우희 씨는 늘 지나다니는 공원 안에 있지만 "언제나 내 자리가 아니었던 농구장"을 꼽았다.
물론 "처음엔 어색했다." 기존 농구장 점유자인 남자 중학생들보다 실력도 떨어졌고 농구장에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생경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어서" 어색함을 금세 극복할 수 있었다. 모두 비슷한 실력의 초보자여서 마음도 편했다. 처음에는 유튜브 영상 등을 보고 농구를 익히다가 여성 전용 스포츠 강좌를 접하면서 실력이 늘고 자신감도 붙었다. 영린 씨는 "7~8명가량의 내부 소모임을 꾸려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농구 수업을 듣고 있다"고 전했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팀스포츠를 즐기지만 지역 여성 풋살팀과 경기를 하게 되면서 최근에는 풋살에 가장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싸우고 갈등하면서 깊어지는, 처음 경험하는 관계맺기
이들은 팀스포츠를 하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지도 몰랐던 승부욕과 경쟁심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비교적 최근에 모임에 합류한 수아(가명·26·대학생) 씨는 "처음 본 사람끼리 인사만 주고 받고 대뜸 경기에 들어가서는 바로 격정적으로 몸을 부딪히고 반칙이네, 무효네, 말도 안 되네, 하며 거의 싸우듯이 격렬하게 의견을 주고 받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고 '이렇게까지 해서 이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아씨는 팀스포츠 경험을 통해 여성들이 자라면서 "갈등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적었음을 실감한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여자친구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서로 다투지 않고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여성들은 자라면서 스포츠 경기에서처럼 갈등을 겪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훈련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서로 논쟁을 하고 감정도 쏟지만 결국 결론을 도출해 끈끈한 동맹이 되는 경험을 해 보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딪치고 소리지른다…승부욕 표출할 자유
영린 씨도 "농구 수업 때 숨이 차서 거의 토할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지칠 때까지 달리고 부딪치고 소리를 질렀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억눌려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 표출됐다. 무엇보다, 너무 재밌었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는 등 건강 관리 필요성을 느낀 그는 이왕이면 집 주변에서 함께 운동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지역 모임을 찾아 가입했다. 영린 씨 또한 승부욕을 표출하는 것이 낯설었다고 한다. "저는 10대 때부터 땀 흘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승부욕이나 경쟁심을 내보이는 게 싫었고, 오히려 '(여성에게 기대되는) 얌전하고 조용한데 자기 할 일 잘 하는 애'가 되고 싶었죠."
경쟁이 권장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 그것도 이미 경쟁을 내면화했다는 평판을 듣는 세대의 여성들이 어째서 "승부욕과 경쟁심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는 것일까? 영린 씨는 "어릴 때부터 여자가 승부욕을 표출하면 '기가 세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건 결코 좋은 평판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수아 씨는 "학교 다닐 때 여자애가 조금이라도 과격한 감정을 드러내면 '조폭마누라' 같은 식으로 놀림감이 되고 주변에서 '튄다'는 신호를 준다. 여자에게 허용되는 진취성의 정도가 남자와 다르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경쟁적이고 도전적인 여자들을 '튄다'고 여기는 것을 알고 있다 보니 실패에 대한 부담감도 커져서 더 도전을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도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팀스포츠를 경험한 뒤 업무 등 일상생활에서 경쟁심을 드러내는 데서도 주저함이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경기에서 승부욕이 넘쳐 "반칙왕"이 됐다고 자평하는 우희 씨는 "전에는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을 사람을 구하면 일단 한 발 물러섰다. 요즘은 내가 하겠다고 나선다. 내가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팀스포츠를 하며 목표지향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승부욕을 감추지 않는 이들을 곁에 두니 서로 닮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땀에 젖은 여성의 신체를 보는 시선의 압박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얌전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여성적인) 성품'으로 자라기를 기대받은 것이 이들이 10대 시절 정신적 측면에서 스포츠를 꺼리게 된 계기가 됐다면,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촘촘한 시선의 압박은 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계기다. 이들은 대체로 10대 시절부터 운동을 기피해 왔는데 이에 대한 공통적인 이유로 "땀이 나는 것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했다. 모임 회원인 정민(가명·28·이직 준비중) 씨는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운동을 좋아했다. 학교 대표로 피구 대회도 나갈 정도였다. 그런데 중학생 때 2차 성징이 오면서 내 몸에 대한 비하나 성희롱을 겪으며 몸에 대한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운동을 하면서 땀이 나는 것, 달리면서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것, 가슴이 흔들려서 남들이 보게 되는 것이 정말 싫었다"고 말했다.
수아 씨는 "여자애들은 운동해서 땀 나고 냄새 나고 더러워지는 것들이 다 놀림감이 된다. 더구나 땀 때문에 등이 젖는 것, 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 등 여자애들의 신체에 관해 남자애들이 거의 나노 단위로 단체 채팅방에서 평가하고 있는 걸 아니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영린 씨는 이런 분위기에서 여자들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며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긴 머리에 외모 관리에 힘쓰는 친구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식"이라고 덧붙였다.
경쟁심을 드러내는 데 대한 부담, 외모에 대한 강박 등으로 일상적인 스포츠 활동에서 멀어졌지만 이 여성들이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권장되고 허용되고 상상되는 거의 유일한 운동인 "다이어트 목적의 운동" 때문이었다. 모임에서 인터뷰에 응한 네 명의 여성은 모두 다이어트 목적으로 운동을 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수아 씨는 "중학교 때까지 수영 선수로 활동할만큼 운동을 좋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학생들 서로 간의 외모 평가가 심해지면서 수영으로 단련된 내 어깨 근육이 싫어졌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근육이 발달될까봐 근력 운동은 피했다"고 한다. "사춘기 때 체중 증가에 대한 스트레스가 생겼다"는 지민 씨 역시 다이어트 목적으로 헬스장 등록을 하고 달리기도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너무 하기 싫고 재미가 없었다. 그 뒤 나는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성분들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깍두기 취급은 그만
체력 증진 목적으로 운동을 시작해도 여성이 운동을 하면 다이어트나 몸의 모양을 바꿀 목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지민 씨는 "회사 사내 헬스장에서 점심 시간을 이용해 근력 운동을 시작했는데 다들 다이어트 하느냐고 묻더라"고 회상했다. 그는 "근력 운동을 시작하니 한 달 만에 출근길에 건널목의 파란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때부터 운동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격투기 도장에 다녔던 수아 씨는 도장에서도 여성과 남성 회원들을 달리 취급한다고 했다. 그는 "복싱, 주짓수 도장 등에 다녔는데 같은 초보여도 여성들에겐 좀 더 완화된 버전의 기술을 알려준다. 스파링도 남성 회원들은 척척 시켜주지만 여성은 물러나게 한다. 늘 '여성분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이 정도만 해도 잘 하는 거예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머리를 짧게 깎고 다른 남성들과 비슷한 외양을 한 채 도장에 나가자 '운동에 미친 애'라는 이미지가 부여됐고 그제야 남자들과 비슷한 훈련을 하게 됐다. 그 전에는 운동을 많이 하면 '팔뚝 두꺼워진다, 목 두꺼워진다' 하며 경고하던 이들이 '더 해, 더 해'라며 독려하고 경기 출전도 제안했다. 물론 그 때도 '여자 시합은 기술 싸움 아니고 독기랑 패기만 있으면 이긴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비로소 운동을 통해 "땀 흘리고 더러워지고 냄새 나도 괜찮을 자유"를 찾았다고 한다.
"강해지고 싶다…진짜 권력은 근육"
팀스포츠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더 많은 여성들이 이 즐거움을 알았으면 한다. 영린 씨는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여는 여성 전용 체육 수업 강좌에 필라테스나 배드민턴 말고 농구·축구 등 여성에게 낯선 팀스포츠 종목들이 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희 씨는 더 근본적 해법을 주문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자애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공을 차고 있으면 나는 멀리서 구경만 했다. 물론 남자 아이들 사이에 섞여 축구를 하는 '유별난' 여자애들도 있었지만 난 그리 유별난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애들이 자연스럽게 운동장을 누빌 수 있도록 공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성별 고정관념에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승부의 세계인 팀스포츠에서 이들은 오늘도 이기기 위해 근육을 키운다. "(사회에서 기대되는 여성상에 부합하는) 착하고 배려심이 깊고 날씬한 몸을 가진 여성들이 좋은 평판을 얻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전까지는 여리여리한 몸이 권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권력은 근육이었던 거죠. 강해지고 싶어요. 힘 세지고 싶어요. 너무 본능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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