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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은 '당장' 원하면서, 왜 '차별금지'는 항상 '다음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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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정'은 '당장' 원하면서, 왜 '차별금지'는 항상 '다음에'인가?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2] ③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박한희 변호사

지난여름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라는 이름으로 10편의 릴레이 인터뷰를 했다.(☞모아보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진행되고 있을 시점이었다. "누구도 차별당하면 안 된다." 이 당연한 명제를 실현하는 법안에 시민 대부분도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에 관한 이야기는 '성소수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연재는 15년째 반복되는 이 물음에서 더 나아가고자 한 시도였다. "성소수자는 어떤 차별을 당해요?"라는 질문을 넘어, 우리가 '사회문제'라고 부르는 것들을 '차별'로 설명하고자 했다. 디지털 성범죄, 죽음과 장례, 직장 내 괴롭힘, 높은 부동산 가격과 주거권. 우리가 겪는 일들, 혹은 너무나 평범해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일들. 그러나 각각 별개로 보이는 영역의 활동가, 당사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차별구조에 관해 사회가 고민할 것이고, 이 문제 해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지난해 6월, 차별금지법이 국회 법사위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오늘날까지, 우리는 '차별금지법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국회는 여전히 "성소수자를 차별금지 사유에 넣을 것이냐"에 묶여있다. 이걸 '사회적 합의'라고 했다. 선거를 앞둔 지금은 '민감한 이슈'라고 한다.

<프레시안>이 다시 차별의 평범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번엔 누군가의 삶, 우리 모두의 삶을 이야기한다. 매 순간의 긴장, 중요한 순간에 주어지는 선택권의 제약. "누가 어떤 차별을 당하는가" 이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2> 다시보기

①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 씨 "미투 이후의 삶,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바로가기)

② 강원도 왕진의사 양창모 호호방문진료센터장 "차별금지법, 노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가능해지는 세상" (☞바로가기)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박한희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능력을 쌓으면 차별은 극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때론 차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능력도 없고 이기적이다'라고 손가락질한다. 능력이란 건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 드러낼 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부모를 잘 만나 능력을 만들 기회를 더 얻는 건 불공정하다', 그리고 '차별구조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는 역차별을 만든다'는 두 목소리를 '공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공정이라면, 이 경쟁의 결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면 그는 분명 승자이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박한희 변호사.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로 많이 알려졌다. 좋은 학벌과 좋은 직업, 그렇지만 메울 수 없는 게 있었다. 매 순간 자신의 존재는 불안했고 이 불안함은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았다. 그의 선택지는 제한적이었고 어떤 경우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 경험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그의 삶을 만들었다.

프레시안 : 포항공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변호사입니다. '엘리트'라고도 하죠. 학벌, 직업은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계급이기도 합니다. 또 공정한 경쟁, 능력주의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가령 차별이 존재해도 "실력이 뛰어나면 차별을 극복한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당사자로서 어떤가요? 또 좋은 직업을 가지고도 '돈 안 되는' 인권운동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

박한희 : "우리 사회에서 학벌과 전문직이라는 건 하나의 계급처럼 여겨지기도 하죠. 좋은 학교를 나오고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게, 이런 인권운동 과정에서 저에게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한 건 맞아요.

그렇지만 한편으론 계속되는 불안정함이 있어요. 성소수자로서의 제 삶 자체가요. 저 스스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정함이 있죠. 저 스스로 살지 못하는 걸 느끼면서 살았어요. 20살 때부터,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20대 내내, 커밍아웃 전까지 10년 내내, 편했던 적이 없어요. 항상 되게 불안하고 답답했죠. 잘 때 되면 항상 우울했고요. 그렇게 지냈습니다.

왜냐면 그게 채워지지 않았어요. 학력이나 이런 것들이 기분 좋긴 하지만요. 그것만으로는 내가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과정들을 메꿀 수 없었어요. 그걸 전혀 충족하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했고요. 계속 저는 힘들다는 걸 느끼며 살았기 때문에 학벌이나 직업으로 제가 그런 계급의 위에 있다는 생각하지 않아요.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그것도 있었어요. 그걸 빼면 저에게 뭐가 남냐는 불안함. '만약 내가 공부도 못하면, 대학도 안 좋으면 성소수자로서 내가 살 수나 있겠나', '한국사회에서 사람으로 살 수나 있겠나'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렇게라도 저를 증명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늘 근본적으로 깔려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기를 쓰고 했죠. 불안함은 그런 문제였기 때문에 학교, 직업을 떠나 제가 차별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프레시안 : 차별문제를 생각하는 것과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뛰어드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인권운동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박한희 : "인권운동을 하게 된 건 2014년부터, 로스쿨 다닐 때부터 했어요. 저는 커밍아웃을 로스쿨 들어와서 했어요. 도저히 이렇게 못 살겠다, 한계에 몰려서 했죠. 커밍아웃하면서도 그런 고민은 있었어요. '학교에 다 알려지고 법조계에도 알려질 텐데 취업은 할 수 있을까?' 먹고 살 고민은 해야 하니까요. (웃음) 로스쿨은 또 직업학교잖아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한. 직업을 가지려고 다닌 학교인데 커밍아웃하고 법조계에서 '트랜스젠더는 안 받는다' 이런다면 저는 로스쿨을 다닐 이유가 없잖아요. 커밍아웃 후에 자퇴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희망법(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을 알게 됐어요. 희망법에서 2013년에 '외부 성기 없는 트랜스젠더의 법적성별 정정' 소송을 했거든요. 그걸 알게 되고 희망법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변호사들이 있다는 것도 기사를 통해 알게 됐어요. 그래서 상담 메일을 보냈죠. 다짜고짜. (웃음) 제가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커밍아웃하려 하는데, 이렇게 됐을 때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고요. 한가람 변호사님이 상담하러 오라고 했어요. 그때 얘기도 많이 나누고, 이런저런 단체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한가람 변호사님이 상담하면서 제안을 했어요.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라고, 법률가와 연구자가 모인 성소수자 인권 관련 연구회가 있는데 거기 활동을 같이하면 어떻겠냐고요. 거기에 나가면서 인권단체들과 인연을 맺게 됐죠. 그 연구회가 지금 무지개행동 단위이기도 해요."

▲박한희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 페이스북 갈무리.

프레시안 : 공대에서 로스쿨, 진로의 방향이 아예 바뀌었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박한희 : "공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했어요. 그런데 회사 자체를 계속 다니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회사를 2년 정도 다니고 나니까, 어쨌든 '회사'라는 곳은 전형적이잖아요. 대학보다도 더한 규범이 있죠. 성별에 따른 규범도요. 제가 다니던 회사는 남초 회사였어요. 한 팀에 180명인데 여자팀원이 10명이 안 됐습니다. 분위기 자체도 되게 남자집단 분위기였고요. 그런 점에서 우선 안 맞는 게 있었죠.

또 그때 저는 이미 제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걸 내면에 받아들인 상태였어요. 영원히 감출 수 없겠다는 각오도 하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드러날 거라고요. 제가 의도적으로 드러내거나 혹은 실수로 드러낼 수도 있죠. 당시에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술김에 커밍아웃하고 다음 날 퇴사한 친구들.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하며 살다가 회식 중에 술김에 커밍아웃한 거예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랬을 때 회사는 끝인 거예요. 관두거나 잘리고 그대로 끝인 거죠. 저를 보호해줄 방법이 전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자격증을 갖고 전문직에 있으면 그게 어떤 보호장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무실 차리면 자영업이니까. (웃음) 눈치 보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전문직을 알아봤어요. 그 당시 제 현실적인 여건을 따졌을 때 할 수 있는 게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의대 이런 쪽은 관심도 없고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법학전문대학원을 가게 됐습니다."

프레시안 : 정체성으로 인한 불안감을 안 느꼈다면 변호사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박한희 : "그런 불안함이 없었으면 회사도 안 갔을 거예요. 사실 포항공대를 선택할 때부터 박사 할 생각이었어요. 원래부터 공대가 제 꿈이었거든요. 수학이랑 과학을 좋아해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장래희망에 '과학자', '발명가' 이런 걸 썼어요. 고등학교 때도 지망하는 과가 공학과였고요. 특히 로봇 쪽에 관심 있었어요. 그래서 포항공대를 선택했고요. 로봇공학 쪽으로 박사학위 딸 생각으로 들어갔어요. 무조건 그거 하려고요. 그런데 대학교 때 정체성 고민을 많이 하면서 우울증 같은 것도 심하게 앓았어요. 생활이 많이 망가졌죠. 그때만 해도 대학 내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없었어요. 포항공대 같은 경우는 2012년에야 생겼고요. 제가 졸업한 뒤죠.

그런 상태로 고학년쯤 되니 그냥 다 지긋지긋했어요. 학교도 그렇고요. 자포자기한 상태였죠. 미래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요. '될 대로 돼라' 이런 심정으로 '일단 돈이나 벌자'하고 선택한 게 회사였어요. 그런데 그런 회사도 다니기 어려웠던 거죠. 만약에 제가 정체성 고민이 아예 없었다면 안 그랬을 거예요. 처음 생각한 대로 대학교 다니다 박사 따고, 지금쯤 연구하고 있지 않을까요?"

프레시안 : 정체성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었군요.

박한희 : "점점 더 불안해졌던 건 좋은 학교를 가고, 대기업을 가고 그럴수록 무너짐이 더 클 것 같은 거예요. 저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건데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무너질까 두려웠어요.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함이요.

단적으로, 주변 사람 중에 그런 분도 있어요. 돈을 모아서 성별 정정하고 기존의 과거를 다 지웠죠. 완전히 새출발 한 거예요. 저는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는 겁니다. 제가 해온 것들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조금만 찾아보면 다 알 수 있잖아요. 대학 동문들, 회사 동료들도 있고요. 이런 걸 완전히 허물 수 있을까요? 나이가 이만큼 먹었는데 공백이 긴 것도 이상한 거고요. 제가 뭔가를 할수록, 그게 쌓일수록 제가 성별 정정해서 신분 세탁할 여지가 없어진 거죠.

커밍아웃 전후로도 저는 연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연속성 속에서 커밍아웃 이후를 살 방법이 20대까지는 안 떠올랐어요. 저에게 '커밍아웃'의 이미지는 하면 그냥 끝장이었으니까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가질 수 없고, 가족과 친구를 모두 버리고 어느 구석에 완전히 밀려 나가는 거요. 그거 말고는 아무런 전망이 없었어요. 점점 더 불안함을 느꼈죠. 어느 순간, 이게 한순간에 다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박한희 변호사. 퀴어문화축제에서. 박한희 변호사 페이스북 갈무리.

프레시안 : 커밍아웃을 '못 참아서' 한다고 했어요. 반면 혐오자들, 또 트랜스젠더에 관해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고 네가 그냥 그렇게(여성이라 생각하고) 살면 되지"라고 하기도 합니다.

박한희 : "사실 저도 감추고 산 시간이 길어요. 한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요. 감정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한때는 그런 생각이었어요. '양복 입고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면서 나 스스로가 그냥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뭐가 문제냐'고요.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습을 하든 성별정체성이 이런 사람이고,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다니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다닌 적도 있어요. 다니려고 했던 적이 있었죠.

글쎄요, 그게 어쨌든 간에 우리가 성별에 따라서 대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도 다른 게 사실이잖아요. 그걸 그냥 제가 신경 안 쓰고 하겠다고 해봤자요. 제 내면이 어떻든 남성으로 보이고, 주변에서 남성으로 인식하고 저도 남성으로 살아가는 거죠. 외적인 모습을 포함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습, 행동거지 같은 것들이요. 화장실 가는 문제도 있죠. 호칭도 그래요. '형'으로 불리는지 '오빠'라 불리는지요.

그 모든 것들이 계속 '당신은 남성입니다'라고 확인해줘요. 그럼 과연 제가 아무리 혼자 '나는 여성이다' 생각한다 해도 살아갈 수 있는 건가. 전 못 하겠더라고요.

2년 정도 그랬어요. 헬스장 다니며 몸도 만들고, 옷차림도 전형적인 남자의 모습으로 다니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를테면 그런 거죠. 가령 옷만 하더라도 자기가 입기 싫은 옷을 계속 입고 다닐 수는 없어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맞지 않는, 입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옷이라면요. 그런 걸 계속 입으라면서 '옷이 무슨 문제야. 넌 너대로 살면 되는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프레시안 : 사회 규범으로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 할 수 있는 모습이 분명 정해져 있죠. 옷차림을 예시로 들었는데요. 한편으론 일부에선 "그렇게 입으라고 강요한 사람 있냐"라고도 합니다.

박한희 : "네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어쨌든,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점점 커가면서 알게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미래에 대한 주변의 압박, 결혼문제 같은 거요. 저도 회사 다닐 때 소개팅 끌려가고 그런 것들이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선배, 동료들이 계속 소개팅시켜주고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단체미팅을 한다든가요. 그냥 데리고 가죠. 저를 당연히 남자동료라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그게 싫었어요. 그런데 왜 싫은지 설명하지 못하죠. 무작정 계속 안 나가는 것도 이상하게 볼 거고요.

남자, 여자. 사회적 대우가 분명 다른데 그걸 무시하고 '나는 그냥 나 대로 살면 되지'라고 하기에는, 차라리 그럴 바에 나를 드러내는 게 편한 거죠. '나는 이런 사람이고 거기에 맞춰달라'고요."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박한희 변호사는 스스로를 어떻게 설명했나요?

박한희 :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죠. 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터프(TERF)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네가 화장을 좋아하고 머리를 기른다고 여자라고 말하는 게 결국 코르셋(여성 억압)이다. 여성혐오에 기반한 거다.' 그런데 저도 이걸 설명 못 하겠더라고요. 제 성별정체성 여성이라는 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싶어', '나는 어떤 옷차림, 어떤 대우를 받고 싶어' 그걸 빼고 얘기했을 때 사랍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안 떠올라요.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든 적도 있었어요. 예전에 페이스북에 이런 내용을 쓰기도 했었어요. 제가 가진 취향이나 생각, 이런 것들이 소위 말하는 '여성스러운' 것들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남성적'이라 불리는 것들도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저는 기계나 이런 것들을 만지거나 수리하고 조립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건, 실제로는 성별과 무관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흔히 남성의 특성으로 이야기되잖아요. 저는 되게 어렸을 때부터 그런 걸 좋아했어요. 대학교 때 전공도 기계공학이었고, 지금도 스스로 조립하고 고치는 걸 좋아해요. 잘 하고요.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어려워지는 거예요. '나는 트랜스젠더 여성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은 작업복 입고 기계 만지는 일이야'라고 한다면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요? '너 여자라면서. 남자 아니야?' 이런 반응에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죠. 여전히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정말 쉽지 않죠."

프레시안 : 활달하고 털털한 여성에게 '여자애가 왜 그러냐'라고 하는 분들도 있고요. 지금은 차별적이라는 문제의식이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기도 합니다.

박한희 : "외적으로 나를 증명할 방법은 결국 사회적 관념에 기대는 것밖에 없는 셈이죠. 트랜스젠더를 이야기할 때 옷이나 인형, 그런 걸 이야기하냐고 하는데 그거 아니면 사람들이 더 이해 못 해요. 안 그러면 '여자처럼 안 보이는데 네가 어떻게 여자냐?'라는 물음에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놔야 하니까요. 사회적 여성성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성별 규범을 잘 따르고 있는지, '여성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로 설명할 수밖에 없죠.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쉽지 않죠. 제가 부모님께 처음 커밍아웃할 때 가져온 증거자료는 의사의 진단서였어요. 진단서도 일부러 개인병원이 아니라 대학병원에서 받았어요. 진단서 보여드리면서 '의학 교수가 나를 이렇게 진단했다'라고 설명하니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어요. 외부의 권위나 관습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아마 트랜스젠더가 많이 느끼는 어려움일 거예요."

▲박한희 변호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프레시안 : 커밍아웃을 언제 했나요?

박한희 : "제가 커밍아웃한 게 30살 때였습니다. 로스쿨 다닐 때요. 회사 그만두고 로스쿨 들어간 게 29살 때였어요. 그때도 주변에 알리진 않았고요. 남학생으로 다녔죠. 그러다가 도저히 그러게 살 수가 없어서 커밍아웃했어요. 2학년 때, 학회에서였죠. 1학년 마치고 한 학기 휴학했었어요. 2학기에 복학했을 땐 트랜지션을 했고 머리도 길렀어요. 겉모습이 바뀌었죠. 그렇게 커밍아웃하고 그때부터 이렇게 다녔습니다."

프레시안 : 커밍아웃을 늦게 했어요. 아무래도 고민이 많았기에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정체성 확립하고 커밍아웃하기 전까지는 어땠나요?

박한희 : "정체성에 관한 건 중학교 무렵부터였던 것 같아요. 옷차림 같은 거, 남자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는 게 어색했어요. 그렇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어요. 그런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트랜스젠더'는 연예인 하리수 씨 나오기 전엔 알려지지 않았고요. 한국에서 찾아볼 자료도 없었죠. 뭔가 '왜 나는 여자 옷을 입고 싶은 거지?' 그런 건데 그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땐 PC통신 시절이었는데, 집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그런 걸 찾아봤어요. '여자 옷을 입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런 고민상담 같은 걸요. 그러다 우연히 외국 사이트를 알게 됐어요. 성소수자 개념을 설명해놓은 사이트였죠. 아마 중3 때였을 거예요. 그걸 보고 '아, 그런 사람이 있구나. 나도 저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 후로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어요. 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글로만 봤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죠. 그래서 확신이 생기지 않았어요."

프레시안 : '정체성이 무엇일 수 있겠다'라는 고민 자체가 쉽지 않았네요.

박한희 : "그렇게 지내다가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 남고였어요. 제가 고1 때였던 2001년에 하리수 씨가 TV에 나왔어요. 반응이 그렇게 막 호의적이지 않았죠. 그렇다고 엄청 악의적이지도 않고요. 그냥 신기한 걸 보는 듯했어요. 저는 '나도 저런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걸 보니 드러낼 수 없겠더라고요. 커밍아웃하는 게 좋을 리가 없으니까요. 감추는 게 맞는 것 같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지냈어요. 대학교 가서도 그랬고요. 대학교는 좀 더 심했던 거 같아요.

대학교 때는 고등학교 때보다 성소수자 정체성에 관한 정보를 더 찾을 수 있었어요. 인터넷이 좀 더 보편화됐고 '다음카페'가 활성화됐을 때였어요. 다음카페에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생기고 그랬어요. 또 트랜스젠더들이 자주 가는 가게 같은 게 있거든요. 커뮤니티 업소들. 여장술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울에 그런 술집이 몇 군데 있었어요. 지하에 있는 바 같은 술집인데 한켠에 의상실 같은 공간이 있었거든요. 옷 입어보고 할 수 있는. 서울에 몇 번 놀러가기도 했어요. 가게에서 정모 같은 것도 하면서 사람들도 만났고요. 확실히 제가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그렇지만 그때도 그런 걸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쭉 숨기고 살았죠."

프레시안 : 사회 분위기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이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비가시화'라는 말도 쓰곤 하는데요. '눈에 안 보인다' 이런 뜻이겠지만 좀 더 설명 부탁드려요.

박한희 : "성소수자가 비가시화된다는 건 첫째로, 주변에 분명 있음에도 성소수자라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성소수자 정체성의 특징이라면 겉으로 볼 때 잘 드러나지 않잖아요. 숨긴다면요. 물론 성소수자가 아닌 다른 소수자성이 다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요. 동성애자 같은 경우는, 트랜스젠더가 아닌 동성애자, 양성애자는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평생 살아온 가족도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존재가 내 주변에 실제로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않으니까요. 어쩌다 특정 사건이 터지다면 그제서야 '아, 성소수자가 있었지' 하고 느끼는 거죠. 그런 생각들이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는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어렵게 해요. 그런 상황들이 겹치니 결국 안 보이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성소수자 본인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그걸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게 있죠. 이런 거예요, 이를테면 동성애자인 친구가 이성애자 친구들에게 커밍아웃했어요. 당장 친구들은 '난 괜찮아' 이러지만 달라지죠 분명히.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거나요.

이성애자 친구들끼리는 또 누구 만나고 결혼하고 이런 얘기를 나누죠. 친구들끼리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동성애자 친구가 있으면 그 대화가 어색해지는 거예요. '동성애자인 건 알겠어. 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제 못 한다' 이런 식. 가령 동성애자의 연애, 성적인 문제, 핵심적인 인간관계 문제는 언급을 꺼려요. 그런 분위기가 일종의 '커버링'으로 이어지는 거죠."

프레시안 : '커버링'이 어떤 건가요?

박한희 : "성소수자가 성소수자임을 티내지 않으려는 것이요. 비성소수자로 여겨지게요. 켄지 요시노의 책 <커버링>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동성애자인 걸 알겠지만 네가 동성애자인 걸 티 내는 건 부담스럽다'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알겠어. 네가 동성애자인 거, 성소수자인 거 알겠어. 그런데 티 내지는 마. 무지개색 옷을 입고 다니거나 행동을 좀 튀게 한다거나, 소위 끼를 부리거나 이런 건 하지마. 그냥 이성애자처럼 살면 되잖아. 뭐하러 동성애자라고 드러내고 다녀?'

퀴어축제를 할 때도 항상 나오는 반응이죠. '성소수자 니네 알아서 잘 살면 되는 거지. 뭐하러 거리에 나와서 티 내고 다니냐' 이렇게요. 사실 그런 것들을 위해 퀴어축제하는 건데. (웃음) 퀴어축제라도 안 하면,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성소수자가 없는 게 '정상'이라고 하겠죠. 동성애자가 정체성을 숨기고 이성애자처럼 행동하는 게 당연한 게 되는 거고요.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건 과도한 것이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라고요.

근데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그저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라는 거죠. 이 사회가 성소수자를 숨기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존재를 어색해한다는 걸 상상하지 못해요. 그런 인식, 분위기, 구조가 다 촘촘하게 짜여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성소수자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요.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는 것이죠."

프레시안 : 퀴어문화축제가 코로나 때문에 계속 못 열리고 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동안 누적된 혐오와 차별의 문제가 터졌다고도 하는데요,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면서 실제로도 그렇게 느끼는 지점이 있나요?

박한희 : "코로나 초기에 이태원 클럽 사건이 있었죠. 또 집회가 계속 금지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가 설 공간이 더 사라진 것 같아 걱정이에요. 집회는 가령 해고노동자들이 모여 연대하고 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코로나를 이유로 집회를 금지한다 했을 때 그건 공간 자체가 사라지는 거죠. 결과적으로 목소리가 절실한 이들이 보이지 않게 될 테고요. 코로나 상황에 모임을 금지했죠. 그럼 뭐는 모일 수 있고 뭐는 안 되는 건가요? 가령 영업 제한을 하면서도 소위 '필수영업'이라는 건 하잖아요. 기업은 돌려야 하고, 그건 경제를 위해서고. 반면 소외된 약자들, 코로나 상황에 더 취약하고 내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은 방역을 이유로 없애요. 말을 할 수 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권력의 차이가 생기죠.

그랬을 때, 방역이라는 건 중요한 가치지만 과연 이 방역의 방식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 걸까요? 바이러스 자체는 차별이 아니지만, 누군가는 더 내몰리면서도 말을 하지 못함으로써 더 많은 건강권, 노동권, 생명권의 위협을 받고 있어도 알려지지 않죠. 그런 게 코로나가 만들어낸 불평등 아닐까요?"

프레시안 : 커밍아웃 이후엔 어떤가요? 커밍아웃 전의 두려움, 위태롭다는 느낌이나 불안함은 사라졌나요? 또는 커밍아웃 후에 새로이 생긴 불안함이나 걱정이 있나요?

박한희 : "저는 어쨌든 직장이 그런 건 아니다 보니까, 직장 내에서 불안감 이런 건 덜 느껴요. 성소수자로서 느끼는 것들은 있어요. 정체성을 다 드러내고 활동하다 보니 어떤 측면에서 일종의 대표성을 띠게 된 거죠. 전에 숙명여대에 합격했던 분이 언론 인터뷰에서 저를 롤모델이라고 했던 때처럼요. 그런 관심에 따른 부담이 있죠. (웃음)

제가 뭔가를 잘못하면 저 하나의 잘못이나 실수나 과오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전체의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트랜스젠더는 저런 사람들인 거야', '트랜스젠더는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인식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더 조심스러워지죠. 다른 성소수자 친구들끼리 그런 얘기도 해요. '집 앞에 쓰레기 버릴 때도 조심해야 한다'고요. 분리수거 제대로 안 하면 '저거 봐라. 성소수자들 분리수거도 안 한다'이러면 어떡하냐고요. (웃음)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그런 게 일상생활에서 긴장하게 되는 부분이에요.

본업을 할 때도요. 직장 내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어서 그런 건 없지만, 다른 변호사들과 같이 공동으로 일을 한다거나 그럴 때요. 제가 언론에도 나오고 했으니까 '유명세 좋아하고 실력은 없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해서 더 열심히 하려고 해요. 가능한 일도 많이 하려고 하고요. 책 잡히지 않으려 한다고 해야 할까요? 안 좋게 보려고 하면 다 안 좋게 보일 거니까요."

ⓒ연합뉴스

프레시안 : 그동안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여러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있다면요?

박한희 : "인터뷰 질문이라기보다는 언론에서는 그런 요청이 많아요. 차별받는 성소수자 사례를 달라거나, 당사자를 소개해 달라고요. 어떤 언론은 활동가나 전문직, 그런 눈에 드러나는 성소수자가 아니라 '평범한', '보통' 성소수자를 만나고 싶다고 해요. 보통 성소수자가 어떤 이미지인지 모르겠지만. (웃음) 그런데 성소수자는 보통 자기 얘기조차 못 해요. 차별을 받고 있다고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성소수자는 거의 없죠. 찾는 이유 자체는 알지만요. 그런데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차별받는다면서 왜 자기 얘기를 못 해? 차별 안 받는 거 아니야?' 이렇게 빠지기도 쉽고요."

프레시안 : 찔리네요. 아무래도 사례를 보여주는 게 전달이 잘 될 것 같으니까요. 사실 "성소수자는 어떤 차별을 당해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할 줄 알았어요.

박한희 : "사실 답답한 일이기도 해요. 당사자 사례 하나 찾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 성소수자뿐 아니라 차별의 문제는 한 명의 극단적인 사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성소수자로 살아오면서 누적된 경험이죠. 중요한 순간에 저를 드러내지 못하고, 제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살아오면서 계속 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해요. 제가 갖고 있던 꿈을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사람들을 만날 때 가면을 써야 하는, 그런 누적된 경험이요.

그런 경험들을 그냥 하나의 극단적인 사건, 정말 누가 자살했다거나 린치를 당했다거나 이런 사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차별을 말하기가 더 어려운 점도 있어요. '왜 당신이 차별받느냐'고 하면 이야기하기 쉽지 않죠. 그런 사건이 있다면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그런 극단적인 사건이 없었다면요? 그럼 차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죠. 그 경험이 쌓이면 인생이 되는 거고요."

프레시안 : 인생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거네요.

박한희 : "한 번은 동성커플이 겪는 차별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그게 나이에 따라 달라지더라고요. 가령 결혼에 관한 건, 20대 때는 이성애자도 결혼 안 한 사람이 많잖아요. 그럼 동성애자라고 해서 특별히 눈에 띄는 차별의 경험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계속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죠. 이게 누적되면 40~50대가 됐을 때 이미 삶의 궤적이 달라져 있어요. 이성애자 친구들은 대체로 결혼해서 '정상가족'을 꾸리죠. 신혼부부 혜택을 받으면 주택마련이나 자산형성에도 지원을 받고요. 소위 말하는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요. 그런데 동성애자는 이미 거기에 멀어져 있죠. 궤적이 달라졌으니까요. 쌓이고 쌓인 차별들이 삶을 그들과 완전히 다르게, 어떤 격차를 만든 거예요. 이 격차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메꿀 수 있는 차이도 아니고요. 차별은 한가지 사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점점 누적되는 거죠. 그게 누군가의 인생이 되고요."

프레시안 : 박한희의 언어로 '차별'을 설명한다면요?

박한희 : "차별하는 사람들은 그래요. 차별에 별별 이유를 대면서 자기가 차별한 게 아니라고요. 차별의 피해자는 이게 차별이라고 증명하기도 어려워요. 차별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 언어도 잘 없고요. 자신의 경험이 차별이라고 인식 자체를 못 하기도 해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차별받는 위치는 이런 능력의 차이를 만들기도 하죠. 그게 차별의 해악이고요."

프레시안 :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른다는 말이네요.

박한희 : "2020년에 서울시 서울문화연구원에서 문화다양성에 관해 여론조사를 했어요. '다양성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문항에 서울시민 70% 정도가 '그렇다'고 답했어요. 그런데 '성소수자를 직장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은 30% 정도였어요. 바꿔말하면 다양성에는 동의하지만 성소수자가 내 이웃이나 친구, 가족이라면 못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이 많다는 거고요.

이게 성소수자 차별의 핵심을 보여주는 듯해요. 보수개신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지금 성소수자라고 길가다 린치당하냐, 체포당하냐, 직장에서 대놓고 해고하냐'라고 해요. 사실 그런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성소수자인 게 직장에서 알려지면 은근히 그만두게 하지 대놓고 해고하는 건 잘 없어요. '은근하다'는 건 결국 그런 거예요. '나와 당신은 다른 사람이고 같이 있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식으로 동등한 시민, 이웃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거죠.

시민 대부분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해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성소수자는 어디까지나 저 멀리 있는, TV나 뉴스에 나오는 그런 존재인 거예요. 내 주변에 있는 성소수자는 상상하지 못하죠. 누가 커밍아웃한다면 눈살 찌푸리는 거고요. 이런 게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요."

프레시안 : 최근 들어 미디어, 대중문화에서 성소수자를 다룬 콘텐츠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성소수자의 존재가 좀 더 드러나고 또 익숙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박한희 : "옛날보다 성소수자를 다루는 것 자체가 그렇게까지 꺼려진다거나, 아예 언급도 못 할 일이거나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다만 이게 과연 성소수자를 동등한 시민으로 그리고 있는지는 글쎄요. 우선 모든 콘텐츠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하나의 캐릭터, 유행거리로 다루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 설에 SBS에서 영화 <보헤미안랩소디>를 방영하면서 동성키스 장면을 삭제했어요. 비판이 일자 추석에는 삭제하지 않고 방영했는데 대신 19금, 청소년 관람 불가로 편성했어요. 또 문제 제기 들어오니까 15세 관람가로 변경했죠. 그런 SBS의 태도가 미디어가 성소수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성소수자를 중요한 이슈로 다루겠다. 하지만 성소수자의 서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건 이르다', '동성키스 장면은 성정체성이 발달 안 된 청소년이 보기엔 위험하다' 이런 인식이 깔린 거죠."

프레시안 : 대학시절을 거쳐 회사를 다니다 변호사가 되고, 지금은 인권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다사다난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권운동을 한 후로 '인간 박한희'에게 달라진 점이 있나요?

박한희 : "처음에 제가 인권운동을 시작할 때는, 저는 어쨌든 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였어요. 제가 겪었던 차별의 경험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좀 더 알리고 싶었고 또 '나 같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줘야겠다' 이런 거였던 거 같아요. 그때는 관심사가 딱 한정돼있었어요. 제가 겪고 있는 성별정체성 문제, 거기에 관해 다른 성별정체성 문제. 그땐 그런 개념을 잘 알지도 못했고 관련 법이나 제도를 제가 잘 아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인권운동을 계속하고, 공부하고 배우고 일도 하면서 지금은 또 차별금지법 관련된 일도 하고 있죠. 그렇게 갈수록 제가 겪은 경험이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 연결된 문제라는 걸 느껴요. 차별이나 인권침해의 문제가 트랜스젠더 문제는 트랜스젠더만, 여성 문제는 여성만 겪는 게 아니라는 걸요. 복합차별 문제를 포함해서 구조적인 차별의 문제, 이런 건 다 연결된 문제예요. 나 하나 괜찮아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인권운동은 이런 것들을 느낀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다른 활동가 동료들을 만나고 얘기하면서 배워나간 거죠."

프레시안 : 다른 영역의 단위와 연대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것도 같아요.

박한희 : "운동이나 당사자들 간에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각자의 경험이나 입장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더 소통과 연대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저럴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는 게 아니라요. 저 사람은 왜 저런 입장일까, 왜 나와 생각이 다를까, 그런 걸 얘기해야 해요. 자신의 경험이 절대적인 건 아니죠.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틀린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죠. 그런 걸 내려놓고 '다른 운동이나 당사자 입장은 다를 수 있겠구나'라는 인식이 소통과 연대의 출발인 것 같아요. 자신의 이야기를 절대화하지 않는 것."

프레시안 : 한 영역에서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영역의 차별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기도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한다', '뭐는 나중에 하자'라는 주장도 늘 있는 것 같아요.

박한희 : "'뭐는 나중에'라는 게 많이 나오긴 해요. 구분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함께 일을 할 때 우선순위가 있을 수 있죠. 내 능력이나 단체의 역량을 봤을 때 당장 어떤 거에 집중하는 건 있을 수 있죠. 모든 이슈를 늘 같이 다루는 건 사실 불가능해요. 그걸 '왜 이건 안 챙기냐'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반면에 '아직 이걸 얘기할 때가 아니다'라는 건 다른 문제죠. 가령 권력형 성폭력 문제에서 '지금은 대의가 더 중요하니 성폭력 얘기할 때가 아니다' 이런 거요. 성폭력 자체를 중요한 이슈로 인식하지 않는 거죠. 성소수자 문제에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걸 다 해결하고 그다음에 다룰 문제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회가 변하면 이야기해보자' 이런 건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면서 '성소수자는 나중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라는 건 후자에 가깝죠. '성평등 얘기는 다 하는데 대신 성소수자는 빼자' 이런 식이죠."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에 관한 논의가 말씀한 '나중에'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 사유에 성소수자를 포함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를 15년째 얘기하고 있어요. 법률전문가로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을 꼽으면 어떤 게 있나요?

박한희 :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은, 차별금지법에서 총칙을 보면 차별금지 사유가 있고 영역, 차별의 개념 이렇게 있어요. 차별의 개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직접차별, 간접차별, 성희롱, 괴롭힘, 차별표시·조장 광고. 복합차별 이런 식으로 차별을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어요. 이런 차별이 있고 이런 것도 차별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기 위해서 차별금지법의 매우 중요한 파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게 '간접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차별을 대놓고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대놓고 '여성은 채용하지 않는다', '전라도 사람은 들어오지 말아라' 이런 식의 차별은, 물론 지금도 하는 사람이 있지만요. 이게 차별이라는 것도 알죠. 많은 경우에 차별은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라고 하죠. '난 누구에게나 똑같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차별이 됐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게 뭐가 문제야?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회피합니다. 그런 걸 규율할 수 있는 게 간접차별이죠.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차별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 구조적인 불평등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이걸 얘기할 수 있는 게 간접차별이고요. 가해자의 의도보다 결과로 발생한 차별에 주목하는 거죠. 이런 부분이 좀 더 얘기돼야 해요. 우리가 가진 차별에 관한 인식, 차별의 개념을 확장하는 법, 이런 것들이 좀 더 얘기돼야 해요."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어떤 게 달라질까요?

박한희 : "'차별금지법 생긴다고 차별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라고 많이들 얘기해요. 그럼에도 성소수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2007년부터 계속 쌓인 게 있죠.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두고 계속 논란이 반복되니까요. 2007년에는 법무부가 사회적 합의가 안 됐다고 이 부분을 삭제했어요. 그 뒤로도 국회에서 계속 성소수자가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라 했고요. 종교계, 그중에서도 일부 보수개신교 세력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지 못했어요. 그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데에 의미가 있죠.

차별금지사유에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포함한다는 건, 이것을 더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성소수자를 두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죠. 우리 사회는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싸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차별하면 안 된다'는 원칙에 모두 동의하지만 '그중 누구는 차별해도 정당하다'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게 성소수자이기도 하고 학력이기도 하고 국적이 되기도 하죠. 거기서부터예요. 차별금지법 제정의 역사는 '차별하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 '제도를 어떻게 만들고 정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거예요. 근본적인 전환이라고 생각해요. 출발선을 다시 만드는,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인간 박한희의 삶은 어떻게 변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또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하고 싶은 게 있나요?

박한희 : "일단 제정되면. 제정 이후에도 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웃음) 제정된다면 우선 동료들과 축하할 거예요. 그리고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다 같이 모여서 '모든 사람을 차별받아선 안 된다. 우리가 여기 있다' 이렇게요. 성소수자들이 그동안 외쳤던 걸 함께 선언할 것 같아요. 이게 당연한 거고, 당연했는데 지금까지 잘못하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변호사로서의 업무에서 많은 변화가 있을 거 같아요.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생긴 뒤로 장애인 인권운동하는 변호사들이 관련 소송부터 여러 할 일이 늘어났거든요. 장애인 차별금지법으로 인해 소송에서 주장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졌고요. 저도 성소수자 차별사건을 하다 보면 느껴요.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더 많은 이야기, 더 많은 주장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거요. 그런 실질적인 업무의 변화가 있겠죠. 변호사로서 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변화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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