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산업의 급성장과 세계로의 확산에 따라 이에 대한 세계 언론의 주목도 높아지고 있다. 언론의 주목뿐만 아니라 한류 현상에 대한 해외의 연구도 꾸준히 늘고 있다. 반가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잘못된 정보와 소통이 한류와 한국에 대한 오보를 양산하고, 또 그 오보를 인용하는 오류가 반복되고 있다. 국가의 문화관련 기관이나 공공외교 채널이 그러한 오류의 사슬에서 주역을 맡기도 한다. 바른 정보가 오류를 스스로 정화하겠지 하고 방관하기에는 오류의 되먹임 사슬이 점점 강고해 지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다. 과연 우리는 한류에 대해 어떤 이해를 공유하고 있으며 어떤 오해를 범하고 있는가?
한류의 출발과 성장
한류는 한국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국에서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한류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좋아하여 이를 광범위하게 소비하고 열광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한류는 ‘한국의 것’일 듯 하지만 사실 한류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만든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한류 소비자들이다. 1990년대에 처음으로 중국에 수출된 한국 드라마들 (<질투>, <목욕탕집 남자들> 등)이 한류 폭발의 전야를 이루었다면, 2002년에 제작되고 2003년에 NHK를 통해 방영된 <겨울연가>나 그 뒤를 이은 <대장금>은 한류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드라마의 예상치 못한 인기를 보며 중국이나 대만의 언론이 ‘한류’라는 말을 빚어낼 당시만 하더라도 그 표현이 불과 이십 년이 되지 않아 전 세계를 휩쓰는 열풍으로 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류연구자 홍석경 교수는 이러한 성격을 가리켜 한류를 ‘수용현상’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초기 한류는 분명히 수용현상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발신자 의도와 무관하게 수용자 집단 스스로 일으킨 열광 현상이었다. 그러나 한류가 이미 3차, 4차 단계를 지나 해외시장을 직격하는 발신자, 즉 생산자의 기획이 전제되는 상황에서 이것을 수용현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수용현상에서 비롯하였으나 이제는 생산-배급-소비의 전과정을 어우르는 글로벌 문화유통현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한류는 어디서 어떻게 비롯된 것일까? 한류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함에 따라 선진국의 언론들도 취재를 하기 시작하고 이른바 전문가들을 찾아 인터뷰 등을 하면서 한류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관심을 기울이며 논문과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류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이다. 연구가 얕다보니 답변도 빈약하다. 지금까지 자주 등장한 한류의 성공 원인들로는 ‘문화적 근접성’이라든지, ‘문화혼종성’, ‘정부의 계획과 지원’, ‘팬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등등이 자주 지목되었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은 매우 부분적일 뿐이며 한국에만 있는 것들도 아니다. 한류 자체는 90년대에 갑자기 아무런 기획이나 의도가 없이 탄생했지만, 그 이면에는 최소한 이삼십년간에 걸친 한국 대중문화의 성장이 있었다.
단순히 한국산 문화콘텐츠의 수출을 한류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1990년대가 아니라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한류연구자 진달용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조용필, 계은숙 등의 일본 진출과 김완선의 홍콩 진출을 예로 든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적 수출이 한류라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당연히 그 규모와 영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에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류’라는 언급이 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유행의 강도와 규모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류를 일으킨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미디어 산업의 성장을 한류의 기원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한류를 가능케 한 배경 조건들과 한류 자체를 혼동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미디어 산업은 1990년대 초반에 갑자기 융성하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상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을 거치는 동안 한국의 방송산업은 국가보호 독점체제를 누리면서 그 과정에서 급속한 축적과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아울러 그 바탕에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한 광고 시장의 폭발적 성장이 놓여 있다. 광고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는 1998년 신규 민영방송인 SBS를 허가하였다. 이것은 언론장악을 위해 전두환 정권이 1980년 도입한 공영방송체제에 스스로 예외를 만드는 조치였지만, 시장의 요구와 정권의 이해가 맞아 별 저항 없이 진행되었다. 뒤이어 김영삼 정부는 종합유선방송의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 걸 정도로 방송시장의 규모가 팽창하였다. 80년대 이후 한국 방송은 독과점적 지위를 남용하며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무소불위의 공룡화된 권력 집단인 공영방송을 배태하게 된 것이다.
방송산업의 성장이 한류의 등장에 유리한 배경을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한류의 등장과 성장에 관련된 거시적, 혹은 미시적 원인 요소들은 실로 여러 가지 방면에 산재해 있다. 이들 요인들을 미시적 요인, 혹은 국내적 요인과 거시적 요인, 혹은 국제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국내적 요인으로는 방송 콘텐츠 제작 수준의 괄목할 발전이다. 주요 방송사 간의 경쟁은 비록 공영방송체제였다고 할지라도 매우 치열했는데 특히 각 사의 대표 드라마는 황금시간대에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핵심적인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방송사들이 힘을 다 해 집중한 장르이다. 국내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드라마 제작 능력을 키우는 메커니즘을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제작은 영화와 유사하게 종합예술이자 기술이다. 튼튼한 대본과 각색, 연출, 음악, 촬영, 연기 등등 무수한 요소들이 동반 성장하지 않으면 드라마의 질이 올라갈 수가 없다. 한국 방송의 드라마 제작 기술은 미국과 일본의 방송을 곁눈질로 따라 배우며 내적 역량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다만 그것이 외국에서도 팔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상상력의 제약은 국제적 요인과 직결된다.
1990년대에 이르기 이전에 동아시아는 아직 냉전적 국제질서에 묻혀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얼마 전에 일본은 도서지역의 난시청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NHK 방송 위성을 발사한다. 그러자 한국과 중국 등은 일본 위성이 문화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등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방송이 연결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문제가 전세계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져 국제 회의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90년대는 아직도 신세계정보질서 운동의 여파와 문화제국주의론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이다. 당연히 방송은 국내 전용 콘텐츠이고 국가의 검열과 허가 없이 국경을 넘을 수는 없는 이데올로기적 콘텐츠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적성국에 둘러 쌓인 한국이 방송 프로그램을 내다 판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냉전 체제가 깨지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79년에 등소평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시장경제 도입을 시작했으며 89년에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졌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점진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 정착시켜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방송국의 설립 완화이다. 90년대 무렵에 중국에는 그야말로 수백 개의 방송국이 중앙과 지방에 난립하고 있었으나 프로그램 공급 능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국산 드라마에 눈을 돌린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마침 한국과 수교를 하게 되자 한국을 방문한 중국 방송 관계자들은 한국 프로그램을 거의 거저 가져다가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상륙한 한국산 드라마가 한류에 불을 지피는 씨앗이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냉전 체제의 완화와 붕괴, 그리고 뒤를 이은 세계화의 물결, 디지털 기술의 확산 등은 방송 프로그램의 초국적 유통에 급물살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한류는 그 물살을 탄다. 지난 이십여년 동안 한류의 국제적 확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한류의 확장이 대중문화만의 확산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한국은 디지털 기술의 보급에서 세계 최첨단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이 역시 연원을 추적해 보면 80년대 국가 기간산업의 일환으로 전자산업을 집중 육성한 결과이다. 정보통신 인프라의 완비는 온라인게임이나 웹툰 등과 같은 디지털문화의 도약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한류가 승승장구하는 이천년대는 이미 삼성, 엘지 등 한국 기업과 상품의 글로벌 브랜드가 한국에 대한 지명도를 고조시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거시적, 미시적 요인에 더하여, 보다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원인을 논한다면 한국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해 온 문화자본 요인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문화자본은 그 축적 방식에 따라 체화된 양식, 객체화된 양식, 그리고 제도화된 양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질적 도약을 선도한 세대로서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1960년대 경제성장 프로젝트의 초기 성공과 함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통교육의 수혜를 최초로 받은 세대가 이들이며, 이들 세대의 성장은 한국의 경제성장, 사회발전, 정치 민주화와 일치한다. 한국의 성장은 이들 세대의 성장이었던 셈이다. 문화창조산업의 행위자 분석에서 이들 세대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하여
한류의 성장 요인을 다루는 거의 모든 글이나 보도에 한국 정부의 정책과 지원이 중요했다는 점이 등장한다. 나는 이 점이 완전한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체로 과장된 오보라고 생각한다. 한류가 등장하고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한 일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90년대 후반 정부의 관계자들에게 한류라는 말이 도달했을 때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신이나 외국의 학자들이 한국 정부의 놀라운 기획과 지원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정부가 정책을 세우고 지원을 베풀었다는 여러 가지 잘못된 리포트들이 국외의 연구자들이나 기자들을 통해 쉽게 생산되고 상호인용을 거치며 증폭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한 원인은 정부 관련 창구를 통해서 그런 인식이 발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산한 담론은 그러나 대부분 현실과 크게 달랐다. 영문으로 입수 가능한 자료가 극히 부족하고 정부의 웹사이트나 정부홍보용 책자 등에 의존하여 거의 소설을 쓰다시피 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인용에 재인용을 거치는 동안 정론으로 둔갑을 한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지한 학자들조차도 진위를 구분할 길이 없이 인용의 허구에 빠지게 된다. 2천년대 들어서서도 한국의 정부 부처에서는 문화산업이라는 표현 자체가 생소하고 어색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부터 문화산업에 대한 산발적이고 정치적인 그래서 사실상 내용은 비어 있는 슬로건식 주장들이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정부가 체계적으로 문화산업 육성정책을 수립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정부가 할 일이 없다거나, 한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 이래의 모든 정권은 문화산업 육성과 지원을 앞세워 왔고, 또 나름대로 뭐든 해 왔다. 콘텐츠진흥원을 만들어 연구사업, 지원사업 등을 펼친다거나 하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대중문화를 세계시장에 성공시킬 수 있다면 다른 선진국들은 왜 못했겠는가? 문화란 축산업이나 제조업이 아니다. 고기를 수출하거나 휴대폰을 파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에 와서는 오히려 문화산업과 문화계를 탄압하는 정책이 이 분야를 압박하였음을 알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문화계 인사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탄압하려던 사건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문화산업을 지원하고 육성했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현실을 모르고 소설을 쓰는 것이거나 혹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실을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CJ E&M 이나 SM Entertainment 등과 같은 기업들의 독자적 노력과 도전이 한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한류의 성공이 정부와 기업간의 긴밀한 연계에 의해 가능했다는 생각은 믿음에 불과하며, 사실상 문화산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정부의 역할이 과대 상상되는 이유는 위에 지적한 공공외교 부문에서의 의도치 않은 왜곡 (나는 이것이 각자의 일에 충실할 뿐 전체를 보지 않는 제도적 함정이라고 생각한다)에도 주요한 문제가 있지만, 이와 함께 동아시아나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 언론과 학계의 기본 시각에도 원인이 있다. 특히 한국의 경제 성정 및 사회 발전 모텔을 연구하는 구미 학계의 주류 시각은 이른바 국가주도형 수출전략 성장 모형이다. 시민사회와 시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국가과잉이 명백한 한국이라는 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할 때 서구의 시각에서 정부의 주도는 당연한 것으로 예상되는 요인일 수 있다. 또 마치 이를 증명이나 하듯 한국 정부는 한류가 국제적 반향을 일으키자 이를 국책 사업처럼 언급하기 시작하고 콘텐츠진흥원이나 영화진흥위원회 등 국가 기구를 통해 지원과 통제를 시작한다. 그런 점을 지적하며 한국의 한류는 정부가 기획하고 주도하였다고 보도를 하는 미디어가 생기고 이를 인용의 쳇바퀴에 넣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등 한류 관련 부처와 기관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든 강조하는 것이 해당 기관의 일이고 임무일 것이지만, 결국 한류에 대한 일그러진 인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점에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한류는 일본 대중문화의 카피캣인가?
한류의 기원은 일본 대중문화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문화나 일본 문화산업의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연구들이 필요하겠지만 한류의 성장과 관련하여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논한다면 그 직접적 영향은 별볼일 없었다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일본 대중문화는 양국의 정치적 긴장으로 인해 1997년 김대중 정부에 의한 해금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한국 사회에 뒷문으로 들어와 미미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미국식 대중문화가 시장을 주도적으로 지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는 표절의 방식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한국에 유입되어 드라마, 광고, 쇼, 영화, 음악, 패션,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로열티 없이 베껴 먹을 수 있는 풍부한 수원지가 되었다. 성장기 한국 미디어 산업에 일본의 영향은 깊고 컸으리라 생각한다. 그로나 80년대 고속성장기를 거쳐 90년대에 진입하면서 일본 문화의 매력은 한국에서 극복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려와는 달리 김대중 정부의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인한 일본문화 쓰나미 현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문화정책을 참조하거나 베끼지는 않았을까? 80년대 일본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을 때에도 일본 정부는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의 관여가 반일을 촉발할까 경계했다. 이 점은 이와부치가 지적한 이른바 탈취(deodorization) 전략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공공외교는 있었을 망정 대중문화를 정부가 나서서 육성한다는 개념은 예나 지금이나 생소하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정부 관여를 극도로 주의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문화가 일반적으로 띠게 되는 상업성과 결합된 퇴폐성과 저항성을 생각해 보면 국가권력을 흥행의 배후로 의심한다는 것이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류의 성공은 오히려 일본 정부를 자극하여 2000년대에 들어 이른바 쿨 재팬 Cool Japan 정책에 상당한 압박을 주지 않았겠나 추측을 가능케 한다.
K 의 의미
케이팝이 뭐냐? 한국인이 빠지면 케이팝이 아니냐? 케이팝에서 한국적인 것은 어떤 것이냐? 한국적인 것이라고는 본래 없는 것 아니냐? 한국적인 것도 없는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아니면 케이팝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냐? 등등 케이팝의 정체성을 두고 주장이 분분하다. 케이팝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이다. 그것은 일본을 기모노와 사무라이로 연결시키고 중국은 공자와 치파오로, 한국을 한복이나 김홍도의 민화로 치환하려는 노력과 같다. 누가 미국을 떠올리며 인디언이나 기병대를 연상하는 사람이 있는가? 동아시아는 현재 미국이나 서유럽과 더불어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된 지역에 속한다. 수없이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가졌고 로봇 기술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과학자의 이미지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요컨대 케이팝에서 한국적인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그 인식 자체가 주변과 중심의 불균형을 웅변하는 것이다.
케이팝이 한국적인 것을 들어내고 외국적인 것만을 모방하려고 기를 쓴 것도 아니다. 백년 가까이 외국 문물을 먹고 살면서 그것이 이미 한국인의 것이 되어 버렸는데, 마치 양복이 서양에서 왔어도 이제는 한국인의 옷이듯이, 그럼에도 이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는 지적질을 한국인 자신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을 이미 사라진 왕조의 유물로 상상하는 덫에서 나오지 못하는 한 케이팝이 왜 한국적인지 이해할 길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케이팝과 비케이팝의 차이는 한국 라면과 외국 라면의 차이만큼 있는 듯 없는 듯 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라면이 한국 것인지 다 안다. 그래서 케이팝으로부터 지극히 한국적인 어떤 것을 찿으려는 무망한 노력은 스스로를 오리엔탈리즘의 노예로 세우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한류와 문화제국주의, 혹은 문화 저항
한류의 확산이 소문화제국주의 혹은 유사문화제국주의 아닌가 지적하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매우 부족한 가설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는 대체로 일방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뇌를 하거나 지배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는 지배자와 정복자의 문화로 들어갔지만 저항의 지주가 되기도 했다. 문화제국주의는 수사에 불과하다. 문화는 모방의 실천이고 한류가 그 구체적 사례이다. 서구 대중문화와 일본을 경유한 것들, 중국으로부터의 전통 문화 등등이 한국인의 몸을 지나며 다른 빛과 냄새로 나온 것이다. 중국의 드라마가 이미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문화적 상품의 지구적 유통과 소비. 돈 내는 자가 내용을 호령한다는 것도 이미 헐리우드 제작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인이 어벤저스의 멤버가 되는 것은 동아시아 시장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산업의 욕망이다.
미래의 한류를 위한 처방
미 공공외교협의회 (Public Diplomacy Council) 의 회장인 셰리 뮐러 (Sherry Mueller)는 미국의 공공 외교를 어렵게 만드는 세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공공외교를 여전히 주변적인 것으로만 보고 군사력과 경제력에 기초한 외교를 견지하려는 입장,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서로 배척되는 개념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국내 정치와 국제관계를 별개로 분리하는 태도 등이 공공외교의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뮐러 2021). 한국의 공공외교에도 같은 지적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한류가 세계로 나아가고 인류 보편의 대중문화로 성장해 가자면 뮐러의 지적은 매우 적절한 충고로 받아들일만 하다. 문화의 힘을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중요성과 비교하여 주변적이라고 과소평가하는 나라가 문화강국이 될 길은 멀다. 한류는 한국의 것이며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스로 국지적 문화로 머물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한류가 좋다면 외국의 문화도 품을 줄 알아야 더 큰 문화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최근의 얼어붙은 한일관계를 보면 두 나라가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 같이 꼴 사나운 모양을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에는 제4차 한류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정치와 이념을 극복하는 문화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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