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안 중요하다는 건 아닌데 좀 과하지 않나?'
이 기사는 이런 말들에서 시작됐습니다. 정확하게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상황에서요. 이런 발화를 하는 이들은 거의 남성, 대체로 중년 이상의 남성들입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이 '바로 그 페미니스트'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기에 이런 말을 주저 없이 건넬 수 있는 것이지요. 페미니스트는 결코 내 앞에 앉아 있는 '상식적인' 여성이 아니라 일부 '극단적인' 여성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 앞의 바로, 그, 지금도 웃으며 당신의 말에 맞장구 쳐 주는 그 여성이 페미니스트일 수 있습니다. (인터뷰이들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당신의 말에 일일이 반박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끄덕여주고 마는 그 여성은 이미 당신을 "거른" 것입니다. 체로 이물질을 걸러냈다고 표현할 할 때의, 그 의미로요.) 특히 지금의 20대 여성들은 이전 그 어떤 세대보다 페미니즘과 친숙한 세대일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 20대에 들어선 이 여성들은 강남역 살인사건, 미투 운동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20대를 보냈습니다.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이들에게 이제 대중적인 용어입니다. 지난 달 25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고 당신 앞에 앉아 묵묵히 일하는 있는, 대학 동창인 동갑내기 사회 초년생 20대 여성들과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편집자
"'담배 타임' 여전히 중요…근데 담배도 여자가 피면 고깝게 봐요"
'세상 많이 좋아졌다', '여자나 남자나 똑같다', '여풍', '이제 성차별은 없다'는 말을 수십 년 째 들어왔고 실제로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고등고시에 합격하는 여성의 수도 늘었지만, 놀랍게도 20대 중후반, 사회 초년생인 이들도 여전히 회사에 '여자 임원이 없고, 여자 간부가 없고, 결혼하고 출산하면 회사 생활을 계속 하는 게 어려워 보인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여전히 '안 끼워주고' 말이다.
세진 : 저희 부서에서 한 번도 여자 임원이 나온 적이 없어요. 워낙 남성 비율이 높은 부서긴 하지만, 그래도 눈으로 그런 걸 보니까 내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선이라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또 사내 결혼한 여자 선배가 있는데 그 분이 출장이라도 다녀오면 다른 선배들이 '남편 밥은 챙겨줬냐' 그런 말을 하는 걸 몇 번 들었어요. 그 분 남편한테 그런 질문을 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가영 : 요샌 비혼도 늘고 결혼해도 아이를 안 갖기도 하지만, 지금 중간 간부급 이상을 보면 여전히 결혼한 여자가 계속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입사할 땐 성별 비율이 같더라도 간부급이 되면 그 비율이 남성이 훨씬 많은 식으로 역전이 되는 거죠. 그래서 팀장급들 보면 사실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로 채워지는 거예요. 같은 성별이고, '가장'으로서의 공감대도 있고 하니 서로 말하는 것도 편하고. 그런 식으로 팀장급 이상이 되면 여자들은 더 끼기 힘들게 되는 것 같아요.
지민 : 회사에서 승진하거나 할 때 일 잘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정치질도 능력이잖아요. 윗사람 줄을 잡아야 하는데 윗사람이 다 남자예요. 그러니 남자들이랑 잘 지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죠. 승진하는 거 보면 일을 못하더라도 윗사람에게 잘 하는 남자를 뽑는 것 같아요. 여자들은 사실 일을 잘 해도 깍쟁이 같다는 소릴 듣는 것 같고요. 공부 잘하고 일 잘하고 하면 더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고 배제하려는 것 같고.
가영 : 여자가 일 잘 하면 독하다고 하고.
희수 : (남자들 인간관계에 끼려면) 담배랑 술을 해야 하잖아요.
지민 : 담배 피워야지. 승진하려면 담배 피워야 돼요.
희수 : 군대 몇 기야, 이러고.
세진 : 근데 담배도 여자가 피면 고깝게 보지 않나?
가영 : 사실 저는 채용에서의 성차별은 잘 못 느꼈어요. 들어와서 보니 인사팀도 있고 시스템이 있어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고 느꼈거든요.
지민 : 들어와서가 문제죠. 자연스럽게 사내 정치에 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요. 일단 남자 수가 많으니까.
가영 : 정치에 여자들을 안 끼워주죠. 무리지어 다니잖아요. 당연히 여자를 안 끼워주려고 하는 게 보여요. 똑같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같은 행위를 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그 무리에 안 끼워주죠.
세진 : 소식 빠른 게 중요한데 보면 윗사람들 소식을 제일 먼저 아는 건 역시 남자들.
가영 : 맞아요. 우린 그게 담배 타임이더라고요. 근데 똑같이 담배를 피워도 여자는 피면 숨어서 피워야 되니까.
지민 : 성 관련 문제가 생기면 회사에서 바로 잘릴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여자를 배제하려고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오해조차 생기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니 여자들은 그 사회에 녹아들기가 어렵게 되죠.
"이제 '여성'인재 소리 좀 그만했으면…"
이들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말이 하나 있다. '여성'인재다. 채용에서의 차별은 입사자 개인이 알기 어렵고 승진에서의 성차별은 '감'은 있지만 역시 개별 사례로 들어가면 주장하거나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성이 승진하거나 채용될 때 붙는 '여성'인재라는 말은 이 과정에서 오히려 '우대'가 있었다는 느낌을 받게 해 승진한 여성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후배 여성들의 사기를 꺾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기업들은 자사가 성평등한 회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지만, 현재 20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여성'인재, '여성'임원이라는 수사 없이 여성이 '실제로' 회사에 오래 근무할 수 있고 '실제로' 유리천장이 사라지는 근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여성 인재를 우대한다'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성평등한 근무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요구다. 20대 사회초년생 여성들에게 그것은 '요구'라고 할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기업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세진 : 남성들은 승진하면 그냥 '무슨 부장에 누가 승진했다' 하는데 여성이 승진하면 꼭 '여성'임원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요. 그런 타이틀이 붙으면 직원들은 '이 사람이 실력 있어서가 아니라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승진을 시킨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가영 : 우리 회사는 '여성인재를 우대한다'고 해요. 여성친화적인 회사라고 생각되고 싶은가 본데 그렇게 하니까 임원이 되거나 팀장이 돼도 실력을 인정받아서 승진한 게 아니라 혜택을 받아서 된 거라고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에서 사람들이 욕을 하더라고요. 여성인재라고 하는 말 자체가 여자는 열등한 존재니까 우대해야 뽑히고 승진한다, 이런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
희수 : 사실 전 (학교 다닐 때 성적 같은 거 보면) 여자애들이 더 똑똑한 애들 많은 거 같아서 굳이 여성인재를 뽑겠다고 선언하지 않아도 그 직무에 맞는 사람을 실력대로 뽑으면 여자가 더 많이 뽑히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지민 : 물론 채용에서부터 성차별이 뚜렷하게 있는 곳은 있다고 봐요. 법조계 같은 곳들 얘기 들어보면 동등한 조건이면 남자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곳에서는 '여성'인재를 비율을 정해서라도 뽑게 하는 게 필요하겠죠.
"똑똑똑, 힌트? 혹시 당신…?"
대학에 다니면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겪고 체화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이들의 '겉모습'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 말 없이 지시한 일을 해 내고 아직 선배가 어렵고 배울 게 많은 신입사원의 입장에서 웬만큼 '불편한' 일이 있어도 '불편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일일이 지적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므로" 말하지도 않는다. 일부 여성혐오적인 발화에서 재현되는 페미니스트는 "못생기고 뚱뚱하고"(가영) "항상 예민하게 굴고 뭐든지 불편하게 여기고 남성을 혐오하는"(희수) 집단이지만, 다른 모든 사상의 담지자들을 외양이나 말투로 구별할 수 없듯이, 실제로 페미니스트를 겉모습으로 구별할 방법은 없다. 지민은 "페미니스트를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라고 말하는 것은 여자들을 등급으로 분류해 하위 등급의 여자로 만들며 비하하는 약은 행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한다. '상식적인' 동료, 페미니스트 동료는 '어디든지 있다'.
기자 : 회사에서 성차별이나 페미니즘 관련해서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신가요?
지민 : 사실 사회인 되고나서는 이 주제(페미니즘·성차별여성혐오)에 대해 터 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긴 해요. 여자 직장 동료들이랑은 가볍게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남자들이 껴 있으면 굳이 얘기를 꺼내진 않아요. 피할 수 있으면 피하죠. 저는 사실 입장도 강한 편이고.
가영 : 참고 살죠. 남자들이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해도 굳이 지적은 안 하죠. 사실 주변에 불편한 얘기 계속 하는 남자 동료가 있어요. 외모 평가를 많이 해요. 제 몸을 뒤에서 훑어 보고 "살 빠졌네?", "오늘 모처럼 예쁘게 입고 온 거 같은데 어디 소개팅이라도 가?" 이런 식으로요. 칭찬한다고 하는 거죠. 본인은 그게 불편한 얘기라는 걸 인지도 못해요. 참고 사는 게, 그런 걸 하나하나 다 문제 삼고 넘어가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지민 : 그렇다고 회사에서 아예 얘기를 안 나누는 건 아니고요. '똑똑똑, 힌트?' 이런 것처럼 '혹시 당신…?' 하고 동료를 만날 때가 있어요. 친구 이야기인데, 회사에서 성차별적 발언 하는 남자가 있어서 제 친구가 지적을 했대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여직원이 조용히 '그 성별 다 왜 이래요?'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가 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알아본 거죠. 저도 같이 밥 먹던 여직원이 어느 날 특정 주제로 욕을 하는데 감이 오더라구요. 이 사람 나랑 비슷한 생각(페미니스트) 하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그 직원하고는 편하게 얘기하게 된 거죠.
기자 : 페미니즘을 알게 된 게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오히려 불편함을 인지해서 더 불편해졌다며 후회한 적은 없나요?
세진 : 아뇨. 그런 적 없어요. 오히려 사회에서 보호막을 치고 가는 느낌이에요. 걸러 들어야 될 말이 어떤 건지 알게 되고, 성차별적인 말이나 행위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지 알게 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에요.
가영 : 저는 대학 때 페미니즘을 접하지 않았어도 결국 알게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이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는 학문인 거잖아요. 제가 페미니즘을 옹호한다고 해서 회사 선배한테 '그건 성차별적 행동이에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지만, 불편함을 느끼고,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요.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또 해소가 되고요. 페미니즘을 알게 된 것에 대해 후회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지민 : 페미니즘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뭐가 맞고 틀린 지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알게 된다고 생각해요.
가영 :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존재는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없으면 불편함을 느껴도 '나 혼자 이상한 건가? 내가 잘못된 건가?'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를 갉아 먹게 되고. 페미니즘, 여성 혐오,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전체 사회에도 많아지고 개개인 주변에도 많아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동 : 공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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