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해외 대학에서 프로그래밍 전공하고 외국계 기업에서만 10년 넘게 일한 억대 연봉자거든요. 그런데 한국오라클에 입사하고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오라클에서는 숫자가 인격'이라는 거예요. 매출 못 내면 인간 취급도 안 하겠다는 거죠"
"외국계고 업계 1위라 연봉 많이 받겠다구요? 연봉의 절반이 기본급이고, 나머지 절반은 실적을 채우는 만큼만 받아요. 성과급이요? 오라클에선 그런 거 없어요. 한국지사 매출이 1조원이 넘는다는데. 회사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해도 돌아오는 게 없네요"
외국계 IT기업인 한국오라클이 오는 4일이면 '파업 50일째'를 맞는다. 2000년 한국후지쯔가 18일간 파업 한 게 국내 외국계 IT기업 총파업 최장 기록이었다. 한국오라클은 국내 외국계 IT기업 사상 최장기 파업 기록을 일찌감치 경신 중이다.
오라클은 기업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 기업이다. 자체 데이터베이스를 운용하는 국내 기업의 90% 이상이 오라클 제품을 쓰면서 유지·관리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오라클은 외국계 기업 중에서도 처우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직원 수는 1천200여 명으로 알려졌다. 이중 노조원은 500여 명이다.
하지만 파업 현장에서 만난 최고의 IT기업 사원들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 실상은 많이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연합뉴스가 만난 오라클 사원, 노조 관계자들은 10여 년간 기본급이 사실상 동결된 상태고 연봉의 절반가량이 실적 보상금(컴펜세이션)으로 이뤄져 있어서 강도 높은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영업사원 A씨는 1일 오라클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데 기본급이 단 두 차례 올랐으며 인상률은 각각 1∼2%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A씨는 "사실상 기본급 동결이고,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면 기본급이 삭감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오라클은 각 팀의 '매니저'가 해당 팀의 영업 전반을 지휘하는데, 매니저가 설정해주는 영업 '타깃'을 채워야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연봉을 전액 다 받으려면 매니저가 정해주는 타깃을 어떻게든 채워야 하고, 타깃을 채우지 못하면 연봉이 깎이는 임금 구조라는 것이다.
사원들은 '사실상 내 연봉이 매니저의 손에 달려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팀 매니저가 각 사원이 누구를 상대로 얼마나 영업을 해야 하는지 타깃을 정해주기 때문이다.
한국오라클 노조는 매니저가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에게는 타깃을 낮은 수준으로 설정해주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달성 불가능한 수준의 타깃을 줘서 저성과자로 만드는 경우가 발생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오라클에 입사한 B씨는 "영업 타깃을 다 채워도 회계 기간에 변경이 가능해서, 타깃을 갑자기 더 올려버린 다음 타깃을 못 채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영업 타깃을 채우지 못한 사원들은 오라클이 운용하는 '저성과자 프로그램(PEP·PIP)'의 대상이 되는데, 이 프로그램은 사측이 사원을 해고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비판이 내부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저성과자 프로그램 대상이 되면 매니저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시간대별로 일일이 보고하라', '법인카드를 언제 누구랑 왜 썼는지 보고하라' 등 요구를 하는데, 프로그램 대상이 됐던 사원들 대부분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퇴사했다는 것이다.
사원 C씨는 "오라클이 1∼2년 전부터 클라우드 서비스 쪽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하면서 기존의 DB 영업사원들을 상당수 내보내고 클라우드 영업사원을 채용했다"면서 "이 과정에서 저성과자 프로그램으로 오래된 영업사원들을 내보냈다"고 주장했다.
사원들은 매니저들이 저성과자를 해고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팀원에게 일부러 영업 타깃을 어렵게 준 다음 저성과자 프로그램 대상이 되게 만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회사 상조회 탈퇴 현황을 통해 지난해만 100명가량이 회사를 나간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해 9월 설립된 오라클 노조는 이 같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사측과 19차례 교섭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지난달 16일 총파업에 돌입했다.
노조는 노조활동과 노조 전임자를 인정하고 노조 사무실을 제공하면 우선 파업을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사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우선 파업부터 철회하라는 것이 본사 방침'이라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는 기본급 동결과 과도한 실적압박, 저성과자 프로그램 운용 등이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서울지방노동청 강남지청에 진정을 제기하고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한 상태다.
이에 대해 한국오라클 측은 "오라클은 국내 법령을 존중하며, 지금까지 노조와 교섭에 성실히 임해왔고, 앞으로도 원만한 합의를 하기 위해 노조와 대화를 이어나갈 준비는 돼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 측은 사원들과 노조 측의 주장에 대해 "구체적 사안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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