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11월 22일자 프레시안 <탈춤과 나> 마승락 탈춤 5에 이어지는 글이다.
1). 창작 마당극의 살아 있는 전설 <칼노래 칼춤(劍訣)>
93년 ‘소리 없는 만가’ 공연을 마치고 한두레 사무실을 성수동으로 옮겼다. 그간의 지하 생활을 마치고 지상으로 옮겨 놀이패 울력과 연습실을 공유했다. 신입 단원도 늘어 서창수(추계예대 탈 87), 이석규(서울대 탈 89), 전종출(시립대 탈 90), 손현숙(시립대 탈 91), 등이 합류했다. 가히 놀이패 한두레의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1994년은 1894년에 탐관오리의 폭정과 외세에 항거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놀이패 한두레’가 1974년에 출범했으니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였고, 한두레의 역사가 또한 창작 마당극의 역사이기도 했으니, 마당극 20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학 100주년, 한두레 20년, 마당극 20년이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준비했는데, 탈춤 부흥 운동의 주역이자, 한두레 창립자, 마당극 창시자인 채희완 선생이 사실상 이 큰 그림을 그리셨고, 작품의 총연출까지 하셨다. 나는 이 작품에서 기획을 맡았다.
동학군들이 훈련했다는 칼춤을 구현해야 했기에, 그 전년도부터 한두레는 조선 무예 24반 경당 사범을 모시고 목검을 들고 무예훈련을 하였다. 워낙에 탈춤으로 다져진 단원들이라 진도가 빠른 편이었다. 2월 말 정읍에서 펼칠 공연을 앞두고 의정부 쪽에 숙소를 잡고, 부산의 자갈치 단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춤꾼들이 모여 동학교도가 수련하였다는 칼춤을 재현하기 위해 합숙 훈련을 하였다.
지난 시기 한두레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최고의 예인들이 힘을 보탰다. 미술에 김정헌(화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임옥상(화가, 전국민족미술인연합 대표) 선생이 힘을 실어주셨고, 동래야류 탈 제작 명인이신 이석금 선생과 이연수 선생이 탈을 제작하여 주셨다.
음악에는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 가수, 작곡가) 선생이 녹음과정을 진두지휘하셨고, 특유의 굵은 저음으로 나레이션을 해주셨다. 또한 해금 명인 최태현(작곡가, 중앙대 국악과 교수) 선생께서 전곡을 작곡해 주셨다.
2월 28일 정읍시 고수부지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고부 역사 맞이굿을 시작으로, 3월 30일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전시회 열림굿 공연, 4월 2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제1회 민족춤제전 열림굿 공연으로 대강의 얼개가 만들어졌고, 이후 거듭된 연습과 창작, 수정과정을 거쳐 10월 22일 부산 KBS홀 공연에 이어 10월 29일 공주 우금치 야외 특설무대에서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우금치 위령굿 공연에 이르기까지 전초전까지 치렀다.
이렇게 거의 1년에 가까운 사전공연 및 준비과정을 거치고 문예회관 소극장 공연에 앞서 막바지 스튜디오 녹음이 있었다. 김벌레 스튜디오에서의 녹음과정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보고 있는 이의 머리카락이 쭈뼛거릴 정도로 혼을 실은 최태현 선생의 해금 연주를 비롯해,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스튜디오 분위기를 압도하는 김민기 선생의 완성도를 향한 치열함과 냉정, 단호함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예정된 녹음, 편집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김벌레 선생도 기나긴 시간 동안 아낌없이 기꺼이 도움을 주셨다.
나레이션에는 김민기 선생 외에도 극단 현장의 최재모, 정인기가 참여했고, 국악 연주에는 최태현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애제자들이 참여하였고, 노래는 진혼곡의 민중가수 김영남과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민요연구회의 안계섭, 한두레의 정권진류 판소리 이수자 정연도 형님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내 1994년 10월 3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마당극의 전설이 된 ‘칼노래 칼춤(劍訣)’이 공연되었다
본공연이 올라가서도 총연출 채희완 선생께서는 손을 놓지 않으셨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매 공연 전에 새로운 쪽대본을 써오셔서 아낙네 마당과 광대 마당을 조금씩 수정하셨다. 또한 유족들의 동선과 몸짓, 청수 한동이의 무용수들의 시선과 항아리 드는 모양새까지 일일이 지도하셨고, 마지막 커튼콜의 대나무 춤의 동선과 탈들의 시선까지 세밀하게 요구하셨다. 그렇게 리허설을 마치고 관객이 입장하기 전에는 객석 뒤의 대나무 숲의 상태와 효수된 탈들의 위치와 각도까지 점검을 마치고 나서야 관객이 입장할 수 있었으니, 당시 기획이었던 나로서는 문예회관에서 정해진 시간에 관객을 입장시켜야만 하는 하우스 매니저에게 매번 사과하며, 양해를 구해야 했다.
이렇게 문예회관에서의 공연은 매 공연 연일 객석을 가득 채웠고,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갈채를 받았다. 그해 11월 12일 광주 YMCA 강당과 19일 마산 체육관에서의 공연으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이후 1997년과 2001년, 2014년에도 다시 공연되었는데, 1997년 6월 6일 진주 남강 고수부지 야외무대에서 제2회 진주 탈춤 한마당 개막공연으로, 1997년 9월 6일~8일 과천 종합청사 앞 야외무대에서 세계마당극 큰잔치 개막공연으로 다시 공연하였다.
또한 2001년에는 9월 17일부터 19일까지 과천 마당극제 2001 특별 초청(다시 보고 싶은 마당극 1위로 선정) 공연 후 동년 9월 25일~29일 수운회관 특설무대에서 다시 공연하였다.
마지막으로 공연한 것은 동학 120년을 맞은 2014년 6월, 보은문화예술회관 배뜰공원 특설무대와 동년 11월 12일 구로아트밸리에서 초연 후 20년 후에도 그 감동을 이어갔다.
‘마당극의 살아있는 전설(역사)’이라는 카피는 필자가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초연 때부터 쓴 것이 아니고 97년 제1회 과천 세계마당극 큰잔치의 개막공연과 2001년 과천 마당극제 특별 초청 공연- 다시 보고 싶은 마당극 1위로 공연하고, 같은 해 수운회관에서 재공연할 때도 아니라 2014년 동학 120주년을 맞아 구로아트밸리에서의 공연을 기획하면서 처음으로 당당하게 내건 카피이다. 필자가 이렇게 ‘마당극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카피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지난 기간 이 공연에 참여했던 출연진과 스태프를 비롯해,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소속 딴따라뿐 아니라, 이 공연을 본 관객이라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94년 초연은 물론 매 공연 쏟아졌던 언론과 평단의 찬사도 쏟아졌기에 더욱 자신있고 당당하게 이 작품을 그리 명명했다.
공연의 음악, 춤, 연기, 구성에 이르기까지 가히 마당극의 진수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지금이라도 다시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그냥 ‘전설이 되어버린 마당극’이 아니라 ‘마당극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마승락 건국대 탈춤반 86, 전 놀이패 한두레 대표, 전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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