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충남 계룡에 있는 작은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첩첩산중에 가려져 있던 커다란 2층 공장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매우 큰 규모의 공장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널브러진 책상에 뿌연 먼지와 톱밥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벽에는 드문드문 기타들이 걸려 있었다.
대신 공장 앞마당에는 천막농성장이 설치돼 있었다. '천막농성 415일'이라고 적힌 피켓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1년 동안 싸우고 있는 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이었다.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탈의실 앞에 걸려 있던 달력은 2007년 3월에 멈춰 있었다.
콜텍은 1년 전, 노동자들의 파업에 직장 폐쇄로 맞대응했다. 조합원들은 직장 폐쇄 이후 공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지만 상황은 답보 상태였다.
농성 13년 동안 세 번 떠난 '휴가'
어느 농성장이 그러하듯,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적당히' 합의하고 사태가 마무리 된다. 콜텍 사업장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콜텍과 사장이 같은 인천의 기타 공장 콜트와 공동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장장 13년 동안 이어졌고, 농성 4464일 만에야 겨우 일단락됐다. 마무리되기 직전까지는 노동자 한 명이 47일 간 단식을 하기도 했다.
단식을 진행한 임재춘 콜텍 해고노동자는 사측과 조인식을 마친 뒤,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렸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 "13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젊은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세계에서 살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내가 마지막 단식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갑자기 콜텍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임재춘 씨를 모티브로 만든 독립장편 영화다. 길 위에서 1882일째 농성 중인 해고 노동자가 집으로 열흘 간 휴가를 떠나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첫 공개된 이래,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 부문 대상, 독불장군상, 독립스타상(이봉하 배우) 등 3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실제 주인공 임재춘 씨는 농성을 하는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농성장을 세 번 나갔고, 다시 돌아왔다. 영화를 준비하던 이란희 감독은 임재춘 씨에게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왜 돌아왔는지 안다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거리에서 싸울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듯해서였다.
이란희 감독 "같은 세대, 공간 속 사람들, 결국 같은 문제 시달려"
돌아오는 대답은 싱거웠으나 그 안에는 그가 지난 13년 가까이 버틴 근본이 깔려 있었다. 이란희 감독은 "그는 늘 돌아와서 일정을 지켰고, 결국 '끝'이라는 것을 냈다"며 "그가 농성 중에, 농성장 밖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 집중하고자 했다"고 영화의 고갱이를 설명했다.
감독이 집중하고자 한 게 무엇인지는 영화를 보면 납득이 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재복이를 통해 사람이 가져야 할 염치, 그리고 도리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놓지 않는다.
이 모든 가치와 의미는 등장인물들이 재복이가 만든 밥을 함께 먹는 것으로 연결된다. 가족만이 '식구'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가치를 공유한 이들도 식구(食口)라는 의미가 포개어진다.
이란희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면서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 살다 보니 크게 보면 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감독은 "각자 살아온 세월과 처한 상황이 다르다 보니 삶의 세세한 면들이 다를 것"이라며 "이 영화를 매개로 이런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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