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인근 워싱턴 기념탑 앞 잔디밭에서 5일(현지시간) 삭발식이 진행됐다.
"1960-70년대 군사독재시절 한국에서는 저항의 의미로 삭발을 했습니다. 문화와 세대를 통틀어 삭발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머리는 미는 것은 힘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신의 대의에 대한 헌신적인 행동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민권을 위한 싸움에 전념하고 있고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가장 높은 수위의 저항인 '삭발식'에 한국계 이민자들 뿐 아니라 히스패닉, 백인 등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이 동참한 이유는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멕시코와 국경에 '장벽'을 쌓아 남미 출신의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웠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이민자 문제는 역행했다. 불법으로 입국한 이민자들의 미성년 자녀를 부모와 분리해 수용하는 '가족 분리 정책'을 쓰는 등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은 '반인권'의 대명사였다.
이렇게 4년의 '암흑기'를 지낸 이민자들을 상대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서류 미비자 1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획득할 기회를 제공하는 '포괄적 이민개혁안'을 지난해 대선 당시 약속했다.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은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인 다카(DACA) 수혜자 290만 명과 농장, 건축, 조경, 식품가공 등 필수직종의 서류미비자를 포함한 560만 명 등 최소 800만 명의 서류미비자들에게 합법 비자와 영주권, 시민권까지 허용하는 이민개혁안을 마련했다. 민주당은 상원에서 공화당의 반대를 돌파하기 위해 예산조정안에 포함시켜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예산조정안은 소수당의 필리버스터가 불가능해 현재 상원에서 50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이 이탈표만 없다면 공화당 도움 없이 자력으로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9월 19일 상원의 엘리자베스 맥도너 사무처장(입법고문, parliamentarian)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맥도너 사무처장은 "이민개혁안은 어떤 기준에서 살펴봐도 매우 광범위하고 새로운 이민정책"이라며 "이는 예산조정 규칙을 훨씬 초과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를 예산조정안에 포함시켜 처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해석을 내렸다. 상원 사무처장의 해석은 강제력은 갖고 있지 않으며, 실제로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이를 무시하고 사무처장을 해고한 전례도 있다. 맥도너 사무처장이 민주당에서 내놓은 조정안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밝히자, 이민자 권익 옹호단체들은 사무처장의 해석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 상원의원 중 보수 성향인 조 멘친(웨스트버지니아), 커스틴 시네마(애리조나) 2명의 의원이 바이든 정부에서 추진하는 3.5조 달러의 사회복지 예산안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민개혁안은 3.5조 달러 내에 포함돼 있다. 이들 의원은 재정적자 등을 이유로 3.5조 달러 원안에서 대폭 삭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불거진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민개혁안이 빠질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5일 백악관 인근에서 NAKASEC(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민권센터, 하나센터 등 한인 시민사회단체들과 CASA 등 이민자 권익 옹호단체들이 '삭발투쟁'을 벌인 이유다.
이날 삭발식에는 51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51명은 이민 개혁안이 포함된 예산조정안이 상원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숫자(민주당 상원의원 50명 + 상원의장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다.
"30년을 기다린 '골든 타임'...이민개혁안 경제-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
문유성 민권센터 회장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워싱턴D.C.에서 삭발식을 거행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민 운동가들 입장에서는 이번이 정말 중요한 기회"라고 말했다.
"이번에 이민 개혁안이 준비되기까지 30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민자들 입장에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될지도 예상하기 힘듭니다. 공화당은 이민 문제에 있어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이민개혁안이 통과되려면 행정부, 상원, 하원이 모두 민주당이 잡고 있어야 합니다."
문 회장은 현재 미국내 한인들 중 서류미비자는 약 15% 정도로 추산된다며 이민개혁안 통과가 한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슈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미국 내 서류미비자 출신국가 중 7-9위, 다카 대상자 출신국가 중 6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민개혁법은 사실 이민자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민자들이 미국 경제에 차지하는 영향이 큽니다. 또 정치적으로도 소수 인종의 정치적 권리 신장의 문제와도 직결된 이슈입니다. 공화당이 이민 개혁안에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날 삭발투쟁에 참여한 홍주영 나카섹 이사장은 삭발 후 기자와 인터뷰에서 "내 자신 뿐 동생과 어머니, 또 우리 공동체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소회를 밝혔다.
"저는 저항의 의미와 이민자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삭발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자신의 일을 하기를 바랍니다. 상원 사무처장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민개혁안이 포함된 예산조정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이번이 이민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이며, 매우 드문 기회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는데 지쳤습니다. 우리는 앞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 뿐 아니라 청원 전화,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할 수 있는 노력들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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