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성인이 돼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푸른 호수(Blue Bayou)'가 입양인들 사이에서 논란이다.
'정의를 위한 입양인 연대'(Adoptees for Justice)는 2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최근 개봉한 저스틴 전 감독의 '푸른 호수' 영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제작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입양인 커뮤니티의 스토리를 허락 없이 각색했고 이에 따른 보상이나 별개의 의미 있는 지지 없이 개봉했다"며 보이콧 입장을 밝혔다.
입양인들 "여전히 역경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허락 없이 사용하는 것은 착취 행위"
'푸른 호수' 주인공 안토니오 르블랑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녀도 갖고 미국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법 체류자가 되어 모국인 한국으로 강제 추방당한다. 해외 입양인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기자에겐 당연히 아담 크랩서 씨가 떠올랐다. 크랩서 씨의 이야기는 기자도 2017년 인터뷰를 통해 보도했고,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언론을 통해 수차례 보도됐다. 2016년 강제 추방 당한 뒤 6년째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크랩서 씨는 해외 입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정의를 위한 입양인 연대'가 지적하는 이 영화의 문제다. 문화예술작품은 인간의 삶을 예술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가공해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창작자와 작품 대상 사이에 '객관화/타자화' 작업이 포함된다.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당사자들의 삶과 연대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당사자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창작자, 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등이 그들의 삶을 '대표'할 수 없다. 그들의 경험과 감정에 공감하는 일은 당사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일이다. 이는 창작자에게 주어진 도덕적 책무이자 인간적 도리다. 문화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의 고양이며, 이를 통해 관객, 관람자, 청취자의 인간됨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입양인들에게 대상화/타자화는 근원적인 상처다. 이들에겐 자신의 일생을 좌우하는 결정인 입양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타인들에 의해 결정된 것에 따른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이들은 입양을 통해 태생적 정체성이 뿌리 뽑히고 새로운 정체성이 이식된다. 입양인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누구보다 치열한 실존적 문제로 다가오지만, 어쩌면 그 해답을 평생 풀어내지 못하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입양인들의 삶과 경험을 가시화하는 일은 세심함이 필요하다. (다른 피해 당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저스틴 전 감독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다. 좋은 의도로 추방 입양인의 삶을 자신이 가진 자원과 수단을 동원해 가시화 시키고 공론화 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가공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야기한 논란은 전 감독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입양인들과 진정한 연대와 소통의 의미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라는 점에서 그의 불성실함이 아쉽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은 많은 입양인들에게 다시 한번 '타자화' 되는 경험을 안겼다.
크랩서 "나는 헐리우드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이다"
아담 크랩서 씨는 30일 기자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나는 전 감독이 한국계 미국인이나 한국계 입양인 공동체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분열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해 트라우마를 더 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슬프고 답답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입양과 추방을 둘러싼 법은 미국의 주마다 매우 다른 복잡한 문제인데 적절한 연구와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어이가 없다"며 "입양 전문가, 인류학자, 연구자 등 많은 전문가들이 있는데 전 감독은 어느 쪽의 자문도 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앞서 크랩서 씨는 지난 20일 개인 성명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알리기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은 지지하지만 저스틴 전 감독의 접근은 그렇지 않았다"며 전 감독과 있었던 일에 대해 밝혔다. 전 감독은 4년 전 크랩서 씨에게 영화를 제작할 목적으로 연락을 했다. 전 감독과 별개로 영화배우 대니얼 대 김 씨가 영화 관련 상의를 하기 위해 한국으로 올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크랩서 씨는 전 감독에게 대니얼 대 김에게 연락해 보라고 답했다. 그 이후로 전 감독은 연락이 끊어졌다. 크랩서 씨는 2020년 이 영화의 프로듀서에게서 자신과 양부모가 함께 찍은 사진 사용을 요청 받기 전까지 전 감독 측으로부터 전혀 연락이 없었다고 밝혔다. 크랩서 씨는 사진 사용을 포함해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크랩서 씨는 "나는 수익이나 영화제에서 상을 타기 위한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헐리우드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속 인간"이라며 "나는 전 감독과 그의 팀이 타인의 트라우마를 자신의 헐리우드 야망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중단해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추방 입양인 문제 개선 원한다면 '입양인 시민권법' 통과에 함께 해달라"
크랩서 씨는 전 감독이 추방 입양인의 고통을 소재로 활용했을 뿐 입양인들이 겪는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목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전 감독에 의해 입양인 시민권법( Adoptee Citizenship Act)과 같은 입양인 추방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들은 무시됐다"고 말했다.
'정의를 위한 입양인 연대'도 "입양인 시민권법이 통과된다면 아담과 같은 국제 입양인들을 구제할 수 있지만 전 감독의 영화는 시민권이 없는 국제 입양인들의 숫자와 사진들을 보여주기만 하고 이에 따른 행동으로 옮길 방법이나 그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크랩서 씨와 이 단체는 전 감독과 영화 제작사 측에 영화 상영을 중단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입양인 시민권법'은 미국으로 국제 입양됐지만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입양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다. 미국에서 입양부모가 입양절차를 완료하지 않아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입양인들은 최대 4만9000여 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한국인 출신 입양인이 약 2만 명으로 알려졌다. 이 법안은 지난 2009년부터 세 차례나 하원에 발의됐지만 2년 회기 안에 통과되지 못하고 번번이 폐기됐다.
한편, 전 감독은 지난 27일 성명을 내고 영화 제작 과정에 한국계 미국인 이민 변호사와 함께 13명의 입양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전 감독은 "이 영화는 한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며 "이 영화를 만든 것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비인간적인 정책에 대해 알게 됐기 때문이며 이 영화로 입양인들에게 계속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또 영화를 제작한 '포커스 피처스'는 이 영화를 자문했다는 입양인들을 포함해 최근 결성된 단체인 '입양인 옹호'(Adoptees Advocacy)의 성명을 배포했다. 이 단체는 "우리는 '푸른 호수'가 우리가 겪었던 부당함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며 이 영화에 대한 보이콧을 "우리에 대한 치명타"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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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크랩서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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