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 아군은 서울을 사수할 것입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대전으로 도망 온 이승만이 머물러 대전경무대로 불렸던 충남도지사공관(이제는 '테미오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거실 앞에 서자 한국전쟁 초기인 6월 27일 밤 9시 이승만이 했다는 '안심방송'이 떠올랐다. 충격적인 것은 이 방송이 있은 지 5시간 반이 지난 28일 새벽 2시 반,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들이 피난 갈 수 없도록 한강다리를 폭파한 것이다.
이승만의 이 안심방송은 당시 대전경무대로 불려가 방송장비를 설치하고 직접 방송을 내보냈던 KBS 대전방송국 유병은 방송과장의 생생한 중언 등을 중심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CIA의 해외방송감청부(FBIS)에 자료에 의해 이승만이 직접 이 같은 방송을 하지 는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27일 오후 1시 국방부와 공보처는 특별방송을 통해 '의정부를 탈환했고 정부는 서울에 있으며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오후 4시에는 국방부가 '맥아더사령부가 서울에 전투 사령부를 설치했고 미군이 내일 참전할 것이며 국군은 현 전선을 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후퇴하는 국군을 보고 동요하던 서울시민들이 이 방송을 듣고 안심하기 시작한 가운데 이승만이 저녁방송을 했다. FBIS 자료에 따르면 이승만은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전보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물자들을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는 요지의 방송을 했다.
현장에서 직접 방송을 중계한 유 과장의 증언이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알려진 이승만의 방송은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오후에 있었던 정부의 두 차례의 발표와 이승만의 방송을 혼동해 이승만이 다 이야기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부의 수반이었기에, 오후에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기에, 다시 말해 정부가 가짜 뉴스를 통해 국민을 기만한 책임으로부터 이승만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날 오후에 있었던 방송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악랄한 거짓말이고 '정부가 발표한 최초의 가짜뉴스'(<동아일보>의 소련 신탁통치 주장 기사는 가짜뉴스지만 정부 발표는 아니었다)였다고 볼 수 있다.
'쿠쿠쿵'. 정부의 안심방송에 걱정을 덜고 잠을 자던 서울시민들은 새벽에 들려온 연이은 굉음에 잠을 깨고 말았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들을 안심시켜 놓고 북한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한 것이다. 한밤중에 자신들이 뽑은 정부에 의해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서울시민들은 피난도 가지 못하고 북한의 점령을 경험해야 했다.
이승만과 '조선조 최악의 왕'인 선조는 아주 닮았다. 구체적으로, 이승만의 대응은 선조의 임진왜란 초기 대응을 빼어 닮았다.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임진강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의 사대문은 굳게 닫혔으며 백성들이 피난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약탈과 방화가 잇따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태운 것으로 알려진 경복궁은 사실 배신당한 조선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었다.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167쪽) 서울시민들은 이승만 정권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착하게도' 경무대와 중앙청을 불태우지는 않았다.
나는 이승만의 여러 실정 중 가장 잘못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한강다리 폭파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강다리 폭파란 단순히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철교 폭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① 6월 27일 오후에 있었던 정부와 이승만의 일련의 안심방송 ② 6월 28일 새벽 2시 반의 한강철교 폭파 ③ 서울 수복 후 북한 협력자 처벌이라는 세 개의 사건을 의미한다.
북한의 남하를 막기 위해, 서울시민을 포기하면서라도 한강다리를 폭파할 수도 있다. 또 피난의 혼란을 막기 위해, 거짓 방송을 할 수도 있다(그러나 1년 뒤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버려야 할 때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들에게 피난가라고 지시했다). 진짜 문제는 그처럼 자신들의 잘못으로 시민들을 방기하고도 돌아와서는 서울시민들을 '북한 협력자'라고 처형하고 처벌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 후 서울시민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놀란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에게 사과를 권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오히려 부역자를 색출한다고 55만 명을 체포하고 800여 명을 처형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난 여론이 너무도 강하게 일자, 이승만도 800여 명만 처형하고 마지못해 나머지 사람들은 풀어줘야 했다는 점이다.
물론 서울시민 중에는 북한이 주도한 인민재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민군이 후퇴하며 함께 후퇴했다고 봐야 한다. 국군이 들어오면 처형당할 것이 뻔한데 서울에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수복 당시 서울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기껏해야 살기 위해 마지못해 협력한 소극적인 '잔챙이 협력자'들에 불과하다.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를 책임지고 있는 정보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 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시민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 당시 공안검사 정희택의 분노가 모든 것을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강변북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 마포대교와 원효대교를 지나면 한강대교 못 미쳐 한강공원으로 빠지는 출구가 나온다. 이 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 걸으면 한강대교 밑을 지나간다. 조금 더 걷다가 고개를 돌리면 멀리 63빌딩 등 화려한 여의도를 배경으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볼 수 있다.
이를 쳐다보고 있자, 하루아침에 이 다리들이 폭파되면서 피난도 가지 못하고 북한군의 점령 하에 놓인 서울시민들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문득 마포와 서대문 지역을 가로지르는 홍제천이 떠오른다.
홍제천은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우리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인조(仁祖)가 재위하던 17세기 초, 홍제천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몸을 씻고 있었다. 그 사연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중 하나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젊은 아녀자 등 50만 명을 포로와 인질로 잡아갔는데, 그 중 일부가 도망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아온 여자들을 오랑캐에게 정조를 잃고 돌아온 '환향녀'라고 손가락질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인조는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는 불문에 부친다고 발표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왕다운 행동인가? 자신의 무능으로 적에게 서울을 내주고, 거짓방송으로 '안심하라'고 이들을 기만하고, 이들이 피난갈 수 없게 한강다리까지 폭파하고도, 돌아와 이들을 북한에게 협력했다고 처형시킨 이승만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 것이다.
"서울시민 여러분, 제가 대통령 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북한에 서울을 빼앗기고 여러분들이 말도 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북한의 점령 하에서 살기 위해 북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무능해서 서울을 적의 손에 넘겨준 저의 잘못 때문입니다. 특히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여러분들이 피난을 가려해도 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한강에 가서 몸을 씻으십시오. 북한 점령 하에 있었던 여러분들의 행동은 불문에 부치겠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고 대한민국에 충성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여러분이 겪은 고통에 사과드립니다."
옛 대전경무대와 한강대교를 답사하고 온 날 밤,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