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80년 광주 민주항쟁 41주년이다. 40주년을 맞이했던 작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광주 항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간 숨겨진 새로운 사실도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혹자는 '아직도 5.18을 연구할 게 더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지난 40년여 년 동안 수많은 자료와 연구논문이 발간됐기 때문이다. 증언이 쌓이고, 그에 따른 분석과 해석이 덧붙여지면서 광주 항쟁의 실체와 의미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견고해졌다.
반면, 그러한 작업들이 5.18 광주 항쟁을 '저항 주체의 모범'으로 인식되도록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우리는 광주 항쟁에 참여한 이들을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 규정하거나, 계엄군에 저항해 싸운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과연 광주 항쟁을 그렇게 협소한 관점으로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가 낸 <1980년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펴냄)는 기존 우리가 인식하는 광주 항쟁과는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5.18 광주항쟁이 군부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기 위한 항쟁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2021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광주항쟁이 주는 의미를 되짚는다.
김 교수의 이러한 분석은 1991년 5월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발생한 5월 투쟁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김 교수는 <1980년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와 함께 발간한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후마니타스 펴냄)에서 한국 운동역사에서는 실패한 투쟁으로 평가된 1991년 5월의 봄을 다시 주목했다. 당시 투쟁에 참여한 이들의 싸움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의 시도가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는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것이다.
<1980년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는 2013년에,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은 1998년에 발간됐다가 이번에 개정판으로 나왔다. 이 책이 지금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 14일 김정한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인터뷰 上 : 민주화 승리사관'을 벗어나서 광주항쟁의 '시민군'을 들여다보다)
"91년 5월, 그들이 원한 건 민주화였다"
프레시안 : 광주 항쟁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협소한 해석인 듯하다. 1991년 5월 투쟁을 이야기해보자. 91년 5월은 학생들에 의한 투쟁으로 시작해서 끝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생들의 고립된 싸움으로 간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과격한 투쟁으로 이어지다 결국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유서대필, 외대 계란 투척 등으로 끝나버렸다.
김정한 : 학생들의 고립된 싸움은 1996년 한총련이 연대에서 싸운 게 학생들만의 싸움이라 할 수 있겠다. 91년은 전국적으로 항쟁과 시위가 있었다. 하루에 5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학생만 참여했다고 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대신 87년은 중산층까지 다 참여했지만, 91년은 그렇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강경대 열사가 경찰 폭행에 의해 사망했을 때는 많은 사람이 분노해서 참여했다. 이후 분신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고, 유서대필 사건이 결정타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그렇게 50일 정도 싸우고 끝났다. 유서대필 사건으로 학생들은 패륜아로 낙인찍히면서 실패한 투쟁으로 규정내렸다.
김정한 : 이번에 재출간하면서 60여일로 수정했다. 강경대 열사가 사망하는 4월 26일부터, 6월 20일 광역의회선거까지로 보면 50여일인데,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철수하는 게 6월 29일이다. 광역의회선거에서 여당 승리로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지도부가 싸움을 내려놓은 날이 공식적인 종결 시점일 것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12.12쿠데타와 5.18학살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대선에서 당선됐다. 91년 5월에 가장 많이 나온 구호가 '노태우 정권 타도'였다. 당시에 그 이상의 명확한 목표가 있지는 않았지만, 민주화의 역전을 막고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했다.
프레시안 : 87년 체제가 합의를 만들어내고,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면, 이후 이를 이행하는 내용과 과정이 들어가야 했는데, 이는 지지부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4년 뒤인 91년 5월이 그런 부분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다고 했다.
김정한 : 1990년 3당 합당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당시 내각제로 개편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민주화가 되기 어렵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컸다. 당시도 공안통치가 계속 이어져왔다.
프레시안 : 그런데 87년은 모두가 달려들어 무언가를 깨뜨리려고 했다고 하면, 91년은 대다수가 투쟁을 관망하는 느낌이었다. 운동이 고립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정한 :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공안통치를 주도했던 국무총리인 노재봉이 물러나면서 이제는 (투쟁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3당 합당을 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노재봉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이익을 얻었고, 6월에 광역의원 선거가 있으니 거기서 이기면 된다는 식으로 수순을 밟아갔다.
사실 91년 5월 투쟁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세력은 있다. 3당 합당을 했는데, 대선후보로 확정이 안 된 김영삼이 그렇다. 그는 5월 투쟁을 거치면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의 확정되는 식이었다. 노재봉이 날아가면서 그렇게 됐다. 김대중도 3당 합당을 거치면서 수세적 위치에 있었지만, 5월 투쟁을 거치면서 정치적 대표성이, 야당이라는 정체성과 자신이 사회운동과 결합돼 있다는 것이 더 견고하게 됐다. 그렇게 5월 투쟁에 참여한 이들이 어느 정도 이익을 얻으면서 투쟁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아갔다.
프레시안 : 당시 재야 정치‧시민‧사회 인사들이 모인 범국민대책회의가 만들어졌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의견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87년이 날것의 모든 것을 받아 용광로같은 분출구를 만들어 의견을 냈다고 하면, 91년은 87년 이후 만들어진 노조나 운동단체들이 결합했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정한 : 그때 5월 투쟁에서 거리에 나온 이들 중에는 운동단체 등에 소속된 사람도 있었고, 보통의 일반 시민도 있었다. 거기 나온 대중들이 원한 건 민주화였다고 생각한다.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주요 운동단체 지도부도 겉보기로는 일반 시민의 요구와 비슷한 슬로건을 가진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당시 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고, 선거를 통해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서로 달랐던 것이다.
"열사 정국, 80년대 조직 문화 비판 필요하다"
프레시안 :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입장이 달랐던 이들은 떠나고 남은 이들은 점차 고립된 싸움을 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5월 투쟁은 매우 강한 싸움으로 흘러갔다. 하나하나씩 이야기해보자. 5월 투쟁은 등록금 시위에 참여한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김정한 : 사실 강경대가 대낮에 백골단에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게 굉장한 공포를 주는 사건이었다. 이는 당시가 공안 정국이었고, 강경진압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람들이 충격 받은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폭력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는 충격도 있었던 듯하다.
프레시안 :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터졌던 듯하다.
김정한 : 강경대 사망 후, 폭행한 전경 백골단 몇 명이 구속되고, 내무부 장관이 경질되는 등 꼬리 자르기, 축소 수사 논란이 이어졌다. 그때 사진을 보면,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와 매우 비슷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91년 5월을 '제2의 6월 항쟁'이라고 했던 건, 그러한 연상 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종철도 그랬는데, 강경대도 이랬다' 이런 충격이 있었다. 그래서 투쟁이 시작됐다.
프레시안 : 이후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열 명이 넘는 학생, 노동자 등이 분신하거나 사망했다. 이때를 열사정국이라고도 한다. 한국 역사에서 이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그렇게 죽음을 선택한 것은, 몰렸을 수도 있고, 너무나 절박해서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한 : 사실 비판적으로 당시 운동 문화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화가 역전되는 정세 속에서 절박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자신이 분신하면서 투쟁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방식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다. 생각해보자. 그렇게 분신이 이어지는데, 유서대필 사건은 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을까. 유서대필 사건은 거짓말이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노태우 퇴진' 외치고 분신한 김기설의 유서가 강기훈의 필적과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지만, 딱 봐도 둘의 필체는 너무 달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믿었다.
프레시안 :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김정한 : 사람들이 분신에 대해 공포를 느낀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강경대의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대중은 분노와 공포를 경험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지만 연속되는 분신은 이들 대중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제 대중들은 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다시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되돌리고자 했다고 본다. 유서대필 사건에 대중이 암묵적으로 동조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프레시안 : 폭력을 바라보는 양면성의 대중이 있지만, 열사와 같은 또 다른 대중도 있다. 이 대중의 차이는 계급으로, 아니면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 대중이 다른가도 고민스럽다.
김정한 : 대중의 양면성도 있고, 당대 운동의 정서였던 면도 있다. 왜 이렇게 분신을 많이 했을까를 고민해봤다. 열사 문화가 운동 문화로 정착됐는데, 이제는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파괴적인 운동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프레시안 : 그때 투쟁의 주체들은 더 해야 한다는 식으로 악화일로로 갔다는 느낌이 든다. 노골적으로 죽음을 이용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정한 : 죽음을 이용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것인데 '우리가 더 열심히 싸워야 된다' 이것이 열사 문화의 기본 방식이다. 80년대 조직 문화를 비판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사회운동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하다.
"91년 시점에서 보면 87년은 매우 신화화됐다"
프레시안 : 91년 투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87년이 항쟁의 처음이자 끝으로 평가받게 됐다. 87년에 우리 사회 민주화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공이 돌아갔다. 이는 87년의 주역들, 즉 소위 386세대들이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 들어가면서 더욱 견고해진 듯하다.
김정한 : 87년 항쟁을 이끈 주역들은 386세대라고도 하고, 민주화 세대라고도 한다. 민주화를 성공시킨 세대라고 해서 주목받았고, 이는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바탕과 발판이 됐다. 그러나 91년 시점에서 보면 87년은 매우 신화화됐다는 게 드러난다. 그때 91년 투쟁이 실패하면서 민주화는 매우 제한적으로 성립돼 버렸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 :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김정한 : 87년 신화가 386세대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91년 투쟁의 실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사고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87년의 승리로 민주화가 잘 이뤄졌는데, 91년의 실패가 왜 중요하느냐는 식이다. 실패했어도 민주화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91년 강경대 죽음은 박종철과 판박이다. 민주화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이를 무시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 인정하면 자신들의 성과가 모래성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기에 애써 무시한 게 아닌가.
김정한 : '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이후 민주화가 이뤄졌고, 이것이 이어져 2016~2017년 촛불이 켜졌고, 현재 우리가 정권을 쥐고 있다' 이것이 87년 386세대의 승리사관이다. 이 논리 속에서는 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화가 꺾였다고 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실패한 역사도 우리 사회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왜곡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간된 두 권의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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