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을 걸어왔으니 이쯤이면 종착지일 거라 생각했다. 기대가 빗나갔다. 2021년 2월, 우리가 도착한 곳은 종점이 아닌 기착지였다. 목적지에 가는 도중에 잠깐 들리는 곳 말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다. <셜록>은 위헌을 기대했으니, 다소 실망스런 결과다. 재판관 의견은 5(합헌):4(위헌)로 갈렸다. 목적지가 아니어서 아쉽지만, 조금만 더 가면 곧 종점에 닿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스코어’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셜록>은 이번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을, 목적지가 훤히 보이는 기착지에서의 숨고르기로 여기기로 했다. 기착지는 목적지를 위해 존재하니, 이제 끝도 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25일 오후 2시 헌재 대심판정에서 청구인 A씨가 "형법 제307조 제1항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청구를 기각했다.
형법 제 307조 1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게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같은 법 310조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예외를 둔다.
이 법은 거짓이 아닌 사실을 말해도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사안이면 형사처벌을 할 수 있어 일명 '진실유포죄'라고 불렸다.
청구인 A도 2017년 8월 동물병원에서 치료받은 자신의 반려견이 실명 위기에 처하자 동물병원의 수상한 치료 행위를 폭로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실천하지 못했다.
A는 이러한 점이 헌법상 기본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2017년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번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의 위헌 여부는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헌재는 해당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사실 적시 매체가 매우 다양해짐 따라 명예훼손 표현의 전파속도와 파급효과는 광범위해지고 있다. 일단 훼손되면 완전한 회복이 어렵다는 외적 명예의 특성상 명예훼손적 표현행위는 제한할 필요성이 있다”며 기각 사유를 설명했다.
만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를 고려해 해당 조항을 전부 위헌으로 결정하면 "사람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인 외적 명예가 침해되는 걸 방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어떠한 사실이 진실에 부합하더라도 개인이 숨기고 싶은 병력, 성적 지향, 가정사 등 사생활의 비밀이 침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헌 결정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였다.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비범죄화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표현의 자유의 무게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결과에 대해 당연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분위기가 성숙되어, 형사처벌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지 아니하여도 개인의 명예보호라는 가치가 희생되지 않을 거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그렇다면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에서 '사실'을 '사생활 비밀에 해당하는 사실'로만 한정하는 대안은 어떨까?
이에 대해 헌재는 "개인의 행위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명백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생활의 비밀에 해당하는 사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그로 인해 위축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반박했다.
또 헌재는 "단순히 타인의 명예가 허명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개인의 약점과 허물을 공연히 적시하는 건 자유로운 논쟁과 의견의 경합을 통해 민주적 의사형성에 기여한다는 표현의 자유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 점"을 들어 법익의 균형성도 인정된다고 봤다.
소수의견은 다수 의견을 반박했다.
김기영, 문형배, 유남석, 이석태 재판관은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이 과잉금지 원칙에 반해 청구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일부 위헌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재판관 등은 해당 조항의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적합성'을 인정하면서도 "다양한 사상과 의견의 교환을 보장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기여하는 표현의 자유는 우리 헌법상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핵심적 기본권이므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불가피하더라도 최소한의 제한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어 "진실한 사실을 토대로 토론과 숙의를 통해 공동체가 자유롭게 의사와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므로 진실한 사실 적시 표현행위를 처벌하는 건 이에 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재판관 등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기소됐다가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여러 사례를 언급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법률전문가인 검사와 판사 사이에서도, 원심법원과 대법원의 심급 사이에서도, 명예훼손의 유무죄 판단이 되는 '공공의 이익' 판단이 매우 어려운데, 하물며 일반 국민은 자신의 표현 행위가 공익에 포함될 것인지 그 여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김 재판관 등은 또 "진실한 사실이 가려진 채 형성된 허위, 과장된 명예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를 야기하면서까지 보호해야할 법익이라고 보기 어려워 법익의 균형성을 충족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김 재판관 등은 "피해자가 명예훼손에 대한 피해를 회복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공적 인물과 공적 사안에 대한 감시와 비판적 보도를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3자의 고발에 따라 진실한 사실 적시 표현행위에 대해서도 형사절차가 개시되도록 하는 '전략적 봉쇄소송'마저 가능하게 돼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됐다"고 지적했다.
헌재의 이번 결정을 두고, 이후 다른 사건을 계기로 다시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위헌'이나 '일부 위헌'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6년 2월 정보통신망법에 의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위헌이 아니라고 결정한 바 있다.
당시 헌재는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형사 처벌하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제1항에 대해 7대2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과거 정통망법에 의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에 대한 판단 때 보다 진일보하게 발전한 셈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은 5년 만에 7:2에서 5:4로 달라지면서 다수 의견을 바짝 쫓아가고 있다.
2015년 폐지된 간통죄도 25년 동안 다섯 차례나 심판을 거듭한 끝에 위헌 결정이 나왔다. 1990년에는 위헌 의견이 3명에 불과했으나, 2008년에는 위헌이나 헌법불합치 의견이 5명으로 합헌 의견을 넘어섰다. 결국 간통죄는 법 제정 62년만에 폐지됐다.
사단법인 <두루>의 이상현 변호사는 "헌재에서 위헌 결정을 받아낸 '간통죄'나 '군대 영창제'처럼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추후 사회적으로 분위기가 조성되면, 결국 위헌 결정을 받아낼 수 있을 듯하다"고 분석했다.
이 변호사는 "헌재가 이번 헌법소원에 대해 합헌을 내렸다고 해서, 기존의 방식대로 기소하고 처벌하라는 의미는 아니"라면서 "헌재에서 의견이 5:4로 나뉠 정도로 대립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에 대해 검찰과 법원이 더 유의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걸 함의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진실탐사그룹 <셜록> 이명선 기자는 형법 제307조 1항, 제310조는 위헌이라 생각하며 위헌법률심판 청구인으로 나선 바 있다. 이 기자는 사단법인 <두루>와 함께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작년 10월경 제출했다. 해당 헌법소원은 정식 심판에 회부돼 현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
'진실유포죄를 고발합니다' 기획을 작년 12월부터 보도해 온 <셜록>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사라질 때까지 노력할 생각이다. 우리는 기착지에서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저기 고지가 보이니,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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