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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어르신 치료를 위해 '베란다 발판'을 직접 제작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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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어르신 치료를 위해 '베란다 발판'을 직접 제작한 이유

[발로뛰는 동네의사 야옹선생의 지역사회 진료일지] 넘어짐의 의미

안녕하세요. 외래, 방문 진료와 왕진을 하며 지역사회의 아픈 분들을 만나고 있는 야옹선생 박지영입니다.

저는 걷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출퇴근할 때도 많이 걸으려고 일부러 버스 정류장 다섯 개 정도 목적지 전에 내립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두 볼에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걷는 그 순간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몇 해 전 발목이 부러져 한 달가량 목발을 짚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평소 활동적이고 걷기와 자전거 타기, 등산을 즐기는 저에게 그 한 달은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집안에서는 엉덩이로 살살 밀고 다녀야 했고, 밖에서는 경사가 있거나 계단이 조금만 많아도 이동을 포기하게 되었죠. 당연히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가지 않고, 가더라도 무조건 가까운 쪽으로 선택을 했었죠.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먼 곳으로 이동은 엄두를 못 냈습니다.

생각해보면 혼자 자유롭게 서서 걷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은 자립의 기본 조건입니다. 오죽하면 자립이라는 글자에 설립(立)자가 들어있겠습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서고 걷기가 힘들어집니다. 다리에 근력이 떨어지고, 균형을 잡거나 자세를 유지하는 능력도 떨어집니다. 당뇨가 있는 분들은 발바닥 감각이 떨어지고 발이 심하게 저리기도 합니다. 관절염 때문에 걸을 때 통증이 있어서 걷기 힘들 수도 있지요. 백내장, 녹내장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서 혹은 어지러워서 걷기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걷기가 힘들어지면 '낙상 즉 넘어짐'의 위험이 생깁니다.

얼마 전 저희 병원에서 고혈압 치료를 받으시는 한 어르신이 길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신 후 거동을 못 하고 계시다는 이웃의 제보를 받고 왕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가서 보니 이마와 볼, 가슴 앞쪽에 큰 멍이 들었고, 턱에 찢어진 상처가 있습니다.

"아이고, 어르신~ 어쩌다가 이렇게 다치신 거예요?"

"몰라유. 그냥 길 가다가 넘어졌슈. 요새 자꾸 어지럽데유."

혈압을 재어보니 수축기 혈압이 100이 넘지 않아 일단 드시던 고혈압 약부터 정리를 했습니다. 최근에 혈압이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여쭤보니 식사를 제대로 못 하여 체중이 줄어든 것이 이유였습니다. 체중이 줄자 근력이 떨어지고 어지럼증이 생기면서 넘어지게 된 것이죠.

집에서 넘어져 발목이 골절된 다른 어르신도 있습니다. 이분은 베란다와 방 사이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셨고, 이 때문에 발목이 부러지셨다고 합니다. 살펴보니 문턱 높이가 무려 20cm나 됩니다.

화장실에서 씻으시고 나오다 물 묻은 바닥이 미끄러워 순식간에 넘어져 갈비뼈가 골절된 어르신, 눈길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후 꼬리뼈가 골절된 어르신, 집에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쳐 뇌출혈이 생겼는데 뒤늦게야 발견된 어르신도 계셨습니다.

ⓒ박지영

그러니 노인에서 넘어짐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젊은이들은 뼈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크게 나도 금방 아물지만, 어르신들은 조금만 다치거나 아파도 회복하는 힘이 떨어져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기가 힘듭니다.

흔히 나이가 드는 과정을 조금씩 쇠약해지는 것이라 상상하기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치거나 병을 앓을 때마다 계단처럼 기능이 푹! 떨어지는 것이죠. 그러니 어르신들에게 '넘어짐'은 다시는 혼자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 즉 자립하지 못 할 수 있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민들레 의료사협 방문팀은 어르신 왕진이나 장애인 방문 진료를 나갈 때 집안 환경을 꼭 살펴봅니다. 넘어짐에 취약한 어르신들이 걸려서 넘어질 만큼 문턱이 높지는 않은지, 화장실이 미끄럽지는 않은지, 넘어졌을 때 크게 다칠만한 뾰족한 물건이나 위험 요소들은 없는지 알아보고, 미끄럼방지 매트나 손잡이 설치가 필요한 경우 지원받을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보고 연계를 해드립니다.

▲ 왼쪽부터 '미끄러운 욕실 바닥, '발이 걸리는 높은 문턱', '다치기 쉬운 날카로운 모서리'. ⓒ박지영

앞서 문턱에 걸린 어르신 집은 베란다가 낮고 방이 상대적으로 높아 베란다 쪽에 문턱과 비슷한 높이로 발판을 놓아드리려고 계획을 했는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 결국 민들레 의료사협에서 자체제작을 하기로 했습니다.

댁으로 방문하여 직접 사이즈를 재고, 재료를 구하여 병원 옥상에서 솜씨 좋은 민들레 직원이 튼튼한 발판을 만들어 설치까지 해드렸습니다.

▲ 발판을 만들어 설치중인 민들레 의료사협 김창일 선생님). ⓒ박지영

"이렇게 베란다에 발판을 딱 맞춰주시니, 문턱에 걸리지도 않고, 세탁기에서 옷 꺼낼 때도 편하고 좋네요~."

어르신의 입에 웃음이 걸립니다.

이렇게 아픈 분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의사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습니다. 어떤 자원을 어떻게 연계해야 하는지,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잘 알아야 하고,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에게는 직접 뛰어다니며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제가 일하는 민들레 의료사협은 의사들뿐 아니라 간호사, 작업치료사, 사회복지사, 직원들 모두가 한팀으로 일하며 아픈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개인 의료기관의 사정이 민들레와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얼마 전 왕진 시범사업의 성적이 기대보다 저조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왕진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왕진을 하는 의사들이 지역사회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지역사회의 자원들을 잘 알고, 아픈 이들의 건강을 위해 움직일 의지가 있는 누군가가 코디네이터로 역할을 하며 필요한 자원들을 연계하고 직접 발로 뛰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강력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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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수료했다. 현재 대전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원장 및 지역사회의료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엄마의사 야옹선생의 초록처방전>, <아이를 위한 면역학 수업 : 감염병, 항생제, 백신>, <야옹의사의 몸튼튼 비법노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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