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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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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가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2

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가 올해 11월 20일까지 재검토를 앞두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변경으로 바뀌는 것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을 읽었다. 그가 1765년부터 1766년 까지 6개월에 걸쳐 북경을 여행하고 쓴 장편 기행문이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은 두 가지 판본으로 전해진다. 홍대용은 <을병연행록>을 한문으로 썼고 또한 한글로도 썼다. 책을 만든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내가 읽은 판본은 한글판 <을병연행록>을 한문본과 비교하면서 고어의 느낌을 살리면서 현대 한국어로 바꾼 것이라 하는데 읽는 내내 쉽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쓰인 기행문이니 아주 오래 전이라고는 할 수 없음에도 책과 나 사이의 거리감은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좁혀 지지 않았다. 홍대용 시대에 한국어를 한글로 쓰는 방식과 현재의 방식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101주년 3.1절 기념식은 흥미로웠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원문,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로 낭독하는 행사는 신선했으나, 기념식을 생중계로 보면서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기미독립선언서> 원문이 첫번째로 낭독되었다. 원문 낭독을 들으며 나는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라는 첫 문장의 뜻을 고등학교 때 배웠던 기억은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낭독하는 원문 독립선언문을 듣는 내내 기이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원문 낭독 다음으로 영어 낭독이 이어질 때 그 기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독립선언서 원문보다 영어로 번역된 선언서가 더 이해하기 쉬웠다. 마지막 순서는 “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 즉 원문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선언서 낭독이었는데,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라는 구절을 들을 때는 살갗이 반응하는 전율을 느꼈다. 모든 문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역사와 한국어를 고유한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는 일치하지 않는다. 고유 언어로써 한국어가 형성된 지 아주 한참 후인 1443년에 한글이 만들어졌다. 고유 언어인 한국어와 고유한 문자 시스템인 한글이 1443년에 조우했지만, 한국어를 한글로 쓰고 한글로 쓰인 한국어를 읽는 사람이 보편적으로 읽기 시작한 역사는 그보다 아주 한참 뒤에야 시작된다. 고유한 언어가 있고, 그 고유한 언어로 글을 쓰고, 그렇게 쓰인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야 고유한 출판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고유성을 지닌 한국어 출판의 역사는 1377년의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의 역사와 일치할 수 없다. 아주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국어가 한글로 표기되고, 한글로 표기된 한국어 텍스트를 독자가 읽는 한국어 출판의 역사는 아직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다 많은 글이 한국어로 쓰여야 하고 한국어로 읽혀야 한다. 한 언어는 보다 많이 사용 되어야 성장한다. 사용되지 않으면 언어는 사라진다. 한때 꽤 넓은 지역에서 쓰이던 켈트어는 라틴어와 게르만어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사람 약 3백만명에 불과하고 이누이트어 사용자는 3만명이라 한다. 사용자가 작은 언어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한국어는 이런 위기로부터 자유로운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편도 아니다. 중국어 사용자 13억, 스페인어 사용자 4억 6천만명, 영어 사용자 3억 7천 9백만명, 러시아어 사용자 1억 5천만명, 일본어 사용자 1억 2천만명과 비교해보면 한국어 전체 사용자는 7천 7백만 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출판의 상호교류가 없기에 한국어로 쓰인 책의 잠재 독자는 최대 5천만 명 정도이다. 특정 언어에 기반을 둔 출판문화는 언어 사용자의 절대 규모의 영향을 받는다.

작가는 인세로 정가의 10%를 받는다. 1만원짜리 책이 1만권 팔리면, 작가에게 돌아가는 인세는 1천만원이다. 10만권 팔리면 1억원이다. 한 해에 10만권 이상을 팔 수 있는 작가는 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작가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어 사용자가 5천만명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면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일본어로 출간되는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해에 10만권을 팔 수 있는 것과 100만권을 팔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10만권 팔리면 1억원의 인세 수입을 기대할 수 있지만 100만권이라면 10억원, 1천만권을 판매하면 100억원의 수익이 생긴다. 작가가 오로지 인세수입만을 생각한다면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중국어나 영어로 글을 쓰는 게 상업적인 이윤만을 고려한다면 더 낫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자신의 모국어가 소수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로 글을 쓰는 것을 선호한다. 언어의 고유성은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 형성과 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언어의 고유성과 언어의 상업적 경쟁력을 단순 비교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분명 상품이다. 상품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책이 갖고 있는 상품의 속성 때문에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판매되고 구입되는 현장을 산업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산업의 논리로만 설명될 수 없는 의지와 사명감을 출판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인구가 5천만명에 불과하고 출생률도 떨어져서 신규 창출 독자도 적은 사양산업이니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사람이나 책을 판매하는 사람이나 책을 읽는 사람 모두 앞으로 더 많이 쓰이고 성장하고 발전해야 할 한국어의 고유성 유지에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책을 매개로 구성된 생태계 구성원 모두에게서 발견된다.

당연히 국가도 출판산업의 특이성과 문화적 기능을 잘 알고 있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법에 따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도 만들어졌다. 책이 오로지 상품이라면 필요하지 않았을 법이자 국가기관이다. 많은 나라에서 책이 갖고 있는 상품의 성격 이외의 문화적 성격을 감안하여 각 나라의 사정에 적합한 방식으로 출판문화를 지원하고 육성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 도서를 정가로 판매하게 하고 할인을 금지하는 시장 개입적인 도서정가제를 도입 운영하고 있을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모든 나라에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언어 사용자의 절대 숫자 자체가 다르고 해당 언어가 세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에 출판문화를 지원하고 육성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지녔어도 그 목표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수단은 나라와 해당 언어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국어 출판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도서정가제가 필요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굳이 그 제도가 필요 없는 나라도 있다.

기능적으로 세계 공용어 구실을 하고 있는 영어가 가지고 있는 패권이 한국어엔 없다. 영어권 국가는 영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법과 제도를 가질 필요가 없다. 영어는 그런 법과 제도가 없으면 사라질 위험에 처한 언어가 아니다. 한국어는 다르다. 5천만명 정도에 불과하며 사용자가 단시간 안에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는 언어가 아니기에 한국어 출판시장은 시장원리에만 맡겨두면 시장원리에 의해 사라질 수 도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물론 한국어 출판산업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 출판시장은 다양성이 특징이다. 몇 개의 거대 출판사가 출판을 좌지우지 하는 영어권 출판과는 달리 한국어 출판 생태계는 1인 독립출판사부터 대규모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어 시장 규모가 작기에 역설적으로 생긴 다양성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초기 투자비용으로 인해 영어권 출판산업 보다 한국어 출판산업은 무명 작가에게도 출판의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한국 출판산업은 영어나 중국어에 비해 규모의 경제를 유지할 수 없는 상대적 불리함과 종다양성이라는 장점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장단점이 교차할 때 해결의 방향은 분명하다.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리는 것이다. 한국의 출판산업을 시장의 논리에만 맡겨두면 한국어 출판산업의 단점은 보완되기는커녕 커지기만 할 것이다.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을 살리기 위한 법률적 기반이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이라면,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의한 시행규칙인 도서정가제는 “출판에 관한 사항 및 출판문화산업의 지원·육성과 간행물의 심의 및 건전한 유통질서의 확립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출판문화진흥법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도서정가제는 소비자의 후생을 위협하는 반시장적 제도가 아니라 국가가 한국어 출판문화를 지원 육성하겠다는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이지, 도서 할인을 금지하여 소비자의 후생을 위협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도서정가제의 핵심은 도서 할인 금지도, 도서 할인을 합법화하는 것도 아닌 한국어 출판문화 진흥을 위한 수단에 대한 고민이다. 그렇기에 도서정가제는 출판을 시장의 논리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판단을 고스란히 담아야 하는 제도이어야 하며, 책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주체가 자본의 크기와 시장에서의 유리한 위치와 상관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출판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이어야 한다. 도서정가제는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체인서점이라고 특별 대우받지 않고 영세 독립서점이라고 해서 불리한 위치를 강요받지 않고, 대형 출판사라고 절대적으로 유리하지도 작은 출판사라고 절대 불리하지도 않으며, 이름 있는 작가라고 무조건 이득을 보고 무명 작가라는 이유로 무조건 손해 보지 않는 제도적 장치이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도서정가제를 지지한다.

노명우는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며, 니은서점 북텐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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