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 대법관은 사망 전날인 지난 17일 손녀인 클라라 스페라(변호사)를 불러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 가장 열렬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내가 교체되지 않는 것이다."(My most fervent wish is that I will not be replaced until a new president is installed.)
긴즈버그의 이같은 유언은 그와 오랜 친분이 있는 <NPR뉴스>의 니나 토텐버그 기자가 보도했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한다면, 연방 대법원의 이념 성향은 '보수 6 대 진보 3'으로 보수 절대 우위가 된다. 이를 우려한 긴즈버그는 병석에서도 절대 일을 놓지 않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법률가인 손녀를 불러 자신의 후임 인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민주당의 슈머, 펠로시, 시프가 쓴 글인지도"...시프 "너무 저열한 주장"
긴즈버그는 이념 성향을 떠나 미국 역사상 2번째 여성 대법관이라는 기록과 여성, 소수자 인권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판례로 미국인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받아온 인사다. 때문에 그의 유언은 분명 정치적 구속성을 갖는다.
긴즈버그의 공석을 하루라도 빨리 보수 성향의 판사로 채우는 게 시급한 트럼프는 21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긴즈버그의 유언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조작됐을 수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긴즈버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아담 시프(민주당 하원 정보위원장)와 척 슈머(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낸시 펠로시(민주당 하원 의장)가 쓴 글인지 모르겠다. 나는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갑자가 튀어 나왔다...너무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슈머의 거래이거나 펠로시나 교활한 시프가 조작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내말은 어쩌면 긴즈버그가 그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주장에 대해 시프 의원은 트위터에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대통령, 이건 너무 저열하다. 나는 긴즈버그의 유언을 쓰지 않았다"며 "나는 이 나라를 위해 평생 봉사한 긴즈버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새 대통령) 취임 전에는 (긴즈버그 후임 인준은) 안 된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날 인터뷰에서 오는 25일이나 26일께 후임자를 지명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예우 차원에서 긴즈버그 추도식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겠다면서 현재 후보를 5-6명으로 압축하고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앞서 트럼프는 낙태 반대론자인 에이미 코니 배럿 제7 연방고등법원 판사, 쿠바계인 바버라 라고아 제11연방 고법 판사 등을 후임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016년 대법관 인준 저지하며 쏟아낸 공화당 의원들의 '말폭탄', 부메랑으로 돌아오나
민주당은 긴즈버그의 유언과 함께 2016년 2월 대선 9개월을 앞둔 시점에서 공화당 의원들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을 반대한 '전례'를 내세워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2016년 2월 대선을 9개월 앞두고 스캘리아 대법관이 타계하면서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자 오바마가 이 자리에 메릭 갤런드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인준을 거부해 결국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 후 다음 해 닐 고서치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인 미치 맥코널은 "선거를 앞둔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은 유권자의 뜻을 무시한 절차"라고 주장했다. 맥코널 뿐만이 아니라 현재 긴즈버그 후임 인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공화당 의원들이 당시엔 이런 주장을 했다.
린지 그레이엄(미국 상원 법사위원장) : "트럼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공석이 생기더라도 나는 다음 선거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테드 크루즈(텍사스): "대법원의 공석이 지명돼 선거연도에 확정된 일은 80년 전에나 있었다. 선거철에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오랜 전통이 있다."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나는 우리가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대법관 후임 문제를 논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이 공화당이더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선거를 9개월이나 앞둔 시점에서 "새 대통령이 후임 대법관을 인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선례'를 남긴 공화당이 4년 뒤 선거를 6주 남긴 시점에서 후임 인준을 밀어붙이면서 내세우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톰 커톤(아칸소) : "그때는 대통령이 민주당이었고 상원 다수당이 공화당이었기 때문에 투표를 통한 유권자들의 선택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대통령과 상원 다수당이 모두 공화당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존 바라소(와이오밍) : "2016년 바이든(당시 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후임 대법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바이든의 룰대로 하는 것이다."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는 20일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연설에서 "미국 헌법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가 있다.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하며 이들은 이런 권력 남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선거일 이전 후임 인준을 서두르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현재 공화당 상원의원(53석) 중 리사 머코스키와 수잔 콜린스 두 명이 연방대법관에 대한 인준 표결을 11월 대선 이후로 연기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상원에서 찬반 동수가 나올 경우, 미국 헌법상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캐스팅보트 행사권이 부여된다. 따라서 현재 공화당 상원의원 중 2명이 더 인준 표결을 반대하고 나설 경우, 부결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추가 이탈표가 2표나 더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여론조사 결과는 긴즈버그 후임 인선을 반대하는 의견이 늘었다. 20일 로이터통신-입소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62%가 11월 대선 승리자가 미국 연방대법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23%는 이에 반대했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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