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동성애가 '허용'돼 청소년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져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 차별금지법 반대론자들의 주된 주장이다. 물론 동성애자는 '허용'한다고 해서 생기지도, '금지'한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들의 '존재'는 찬반의 영역이 아니다. 성소수자는 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후부터 약 14년 간,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의는 저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차별금지법이 포괄하는 차별의 범위가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에만 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 폭넓고 복합적이다. 물론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차별이 있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차별, '복합차별'
차별은 권력의 문제다. 권력은 복합적이고 교차적이다. 권력을 가진 지위와 그렇지 않은 지위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 지역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이 남성으로서 여성에 비해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연령, 학력, 직업과 같이 상황이 바뀌면서 억압받는 집단에서 지배하는 집단으로 혹은 역으로 소속이 바뀔 수도 있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다면적인 것처럼 차별은 다면적인 현상이다. 올해 초 모 여대의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 거부 사건이나, 재작년 일부 여성들을 중심으로 예멘 난민 수용을 거부했던 움직임이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면서 이주민이거나 성소수자이면서 장애인으로 중첩적인 차별의 피해를 받을 수도 있다.
여성 노인 A를 예로 들어보자. A는 최근 취업에 실패했다. 그와 나이도 같고 경력도 비슷한 남성 노인 B는 채용됐다. 성별의 구분이 필요 없는 직종이었다. A는 성차별을 당한 것일까. 하지만 여성 청년 C도 채용됐다. 여성이 채용됐으니 성차별이라고 할 수도, 남성 노인이 있었으니 연령차별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차별과 연령차별이 혼재된 제3의 '복합차별'을 겪은 셈이다.
A은 분명 차별을 겪었지만 현존하는 개별적 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과 연령차별금지법으로 의율되지 않는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은 구체적인 차별행위가 어떤 차별금지사유에 해당되는 문제인지 먼저 특정하고 발생한 불이익한 결과와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차별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차별판단에서 A와 같이 차별금지사유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즉 차별적 동기가 혼재된 경우에는 분명한 차별 판단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이렇듯 개별적 차별금지법 상호간에 결여된 지점을 보완할 수 있다.
존재하나 보이지 않던 차별, '혐오표현'
정의당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이나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평등법에는 '혐오표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혐오표현(hate speech)는 특정한 소수자 집단을 향해 가해지는 경멸적, 모욕적 표현을 말한다. 혐오표현은 '표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규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차별금지법이 규정하고 있는 차별의 영역 즉 고용, 교육, 재화·용역의 이용 및 제공, 행정에서 차별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때 괴롭힘(harrassment)에 해당한다.
혐오표현이 그렇게 위험한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욕설이나 농담으로 희석되는 혐오표현은 차별에 관한 여러 연구에서 차별의 한 형태이자 구조적 차별의 시작으로 지목된다. 한 사회에서 어떤 혐오표현이 사용되고 있는가는 그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차별받고 있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혐오표현은 현존하는 차별을 반영하는 현상이자 그 자체로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한 위계를 만드는 차별 행위다. 어떤 특성을 이유로 사람을 구분하고, 이들을 열등하고 불쾌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묘사한다. 이런 편견과 고정관념을 근거로 해당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고 나아가 폭력을 가하거나 억압하는 내용들로 구성된다.
최근 몇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 혐오표현의 표적 집단으로는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여성 등이 주요하게 지목됐다.
사치와 낭비를 부리며 남자를 뜯어먹는 '김치녀'가 있었고 자기 아이만을 생각하며 민폐를 끼치는 아기 엄마인 '맘충'이 있었다. 지체 장애인을 멸칭하는 '병신'은 혐오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관습적으로 굳어졌다. 성소수자를 향한 '똥꼬충', 동남아시아 이주민을 비하하는 '똥남아'까지 혐오표현은 우리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있다.
혐오표현이 만연해지면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구별·배척·제한하는 차별을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처럼 생각하게 된다. 불쾌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편견이 사회적으로 굳어지면 이는 구체적으로 법이나 정책을 통해 이들을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근거가 된다. 최근 한국사회 역시 이주민이 위협적이라는 차별적 인식에 따라 다문화 정책이나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정책들이 만들어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차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차별은 편견에서 기인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드는 저서 <편견>에서 편견에는 두 가지 요소 필요하다고 했다. 좋거나 싫은 태도가 있어야 하고 과잉 일반화된 잘못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에 차별에 대한 민감성을 높이는 법이다. 어떤 행동은 차별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분명한 기준과 메시지를 주며 무엇이 차별인지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 안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성찰하고 차별을 발견하여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기본 대원칙을 확인하는 법이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차별은 많은 경우 무의식적이며 비의도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 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차별해야겠다는 악의적인 동기를 가지고 차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사회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익숙한 관념과 태도가 있고, 그러한 관념과 태도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올 뿐이다.
가령 동남아시아인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므로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게 '동성애자는 '에이즈의 주범'이므로 위험하다', '여성은 자기중심적이고 남성에게 의존적이다', '장애인은 열등하다', '이주민은 잠재적 범죄자이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런 차별적 사고는 알게 모르게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줄 때, 친구를 사귀는 것부터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대할 때, 직장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물건을 팔 때 등. 우리는 눈빛과 표정, 말투와 같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최근 차별은 사회변화와 함께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대중적인 관심으로 퍼진 페미니즘부터 성소수자를 향한 공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드러낸 비정규직의 차별적인 노동환경,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을 향한 인종차별, 복지시설에 고립되는 장애인 정책이 가진 장애인 차별의 문제, '흙수저 신드롬'으로 불리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불평등 등 사회 곳곳에서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평등은 헌법상 기본권이자 인권으로서 보장되는 권리다. 헌법재판소는 "평등의 원칙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우리 헌법의 최고원리"이자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서도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라고 천명한 것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로서 대우받아야 한다.
따라서 차별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자 숙제다. '동성애 찬반'이라는 왜곡된 프레임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던 차별을 발견하고 이를 고쳐 나가는 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논의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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