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독 미군 3만6000명 중 1만2000명을 빼내기로 한 결정하면서 독일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가 발칵 뒤집혔다.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한 지역안보에 중대한 균열을 초래하는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이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29일(현지시간) "몇 주 내에 주독미군 약 1만2000명을 빼내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면서 "5400명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재배치하고, 6400명은 본국으로 소환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나아가 이번 결정은 '전략적 배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에스퍼 장관은 "주독미군 감축으로 동유럽에 병력을 배치하고, 나토의 전력을 강화하고, 러시아를 저지하는 등 동맹국 지역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여러 원칙을 고려한 전략적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참모들의 '외교적 포장술'을 무시하고 속내를 원색적으로 드러내기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식의, 에스퍼 장관이 설명한 이유로 주독미군 감축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독미군 감축 결정은 독일이 방위비 분담을 충분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이 유럽을 지키려고, 독일을 지키려고 주둔하고 있다. 독일은 비용을 내야하는 만큼 내지 않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호구(suckers)가 되고 싶지 않다"면서 "돈을 내지 않으니까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낼 돈을 안 내는(delinquent)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독일을 채무불이행자로 몰아붙이는 근거는, 나토 회원국들이 지난 2014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중을 2024년까지 2%로 올리기로 약속했는데도 독일이 지난해 기준으로 1.36%만 국방비로 지출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28개 나토 회원국 중 미국과 영국 등 8개 나라만 약속을 지키고 있다면서 “독일이 돈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군대를) 감축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에스퍼 장관이 내세운 '전략적 결정'이라는 것을 스스로 부정했듯, 주독미군 감축은 전략적 결정이기는커녕 지역안보와 미국의 국익을 심대하게 해치는 매국적 결정에 가깝다는 비판이 미국의 여야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CNN 보도에 따르면,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 고위급 군 출신 전문가들은 주독미군 감축 결정은 러시아를 돕는 것이며, 미국의 국가안보와 군비태세를 약화시킬 뿐 아니라 미국민의 혈세를 낭비하고, 독일과 나토, 유럽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2008년 대선주자로 나섰던 밋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은 트럼프의 결정에 대해 "러시아에 주는 선물이며, 동맹국 얼굴에는 한 방 먹인 것"이라면서 "그 결과는 지속적이며, 미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하원 군사위원회 위원인 공화당 중진 마크 손버리 의원도 "당혹스러운 결정"이라고 비판했고, 유럽안보 전문가인 트루먼 국가안보프로젝트의 레이철 리조는 "이번 조치가 전략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럽주둔 미군사령관을 역임한 마크 허틀링 예비역 중장은 "주독미군 감축 결정과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매우 불편했다"면서 "어떠한 전략적 이익을 고려한 것이 아니며, 유럽에서의 군사적 역량을 전개하는 데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독미군 결정 배경에 대해 개인적인 이유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저 취임 이후 줄곧 냉랭한 관계였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응징'하길 원했고, 이례적으로 지속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적국'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는 이득이 되기 때문에 주독미군 감축이라는 어이없는 결정이 나왔다고 주장한다.
"메르켈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에서 나온 결정"
브루킹스 연구소의 토머스 라이트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이 결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 그리고 특히 메르켈 총리에 대한 뿌리깊은 심리적 적대감과 관련이 있을 뿐, 전략이라고는 없다"고 혹평했다. 신미국안보센터(CNAS) 소장 리처드 폰테인은 "트럼프 정부는 방위비 지출을 충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을 응징한다는 것말고 어떤 근거도 내놓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주독미군 감축 결정의 파장은 곧바로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으로 연결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방위비 증액을 트럼프 대통령이 또하나의 치적으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이날 미국은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대표 교체를 알리며 본격적인 압박에 나설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전임 제임스 드하트 대표는 작년 9월부터 지난 3월까지 한국 측과 7차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이끌었다. 특히 7차 협상 후 한미가 실무선에서 13% 인상안에 잠정 합의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거부했다. 이후 한국이 13% 인상안을 고수하고 미국은 50% 정도 인상한 13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독미군 감축 결정과 관련해서도 독일이 "청구서를 지불하기 시작한다면 재고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미국이 원하는 수준으로 방위비를 지출할 것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독미군감축은 실제로 감축 작업을 완료하기까지 수년이 걸리고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 정치권에서 여야 모두 반대가 거세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할 경우 계획대로 이행이 될지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방위비 증액 압박도 이미 올해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이 2.5%에 이르는 한국에 대해 무리한 요구라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