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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 김진숙 "해고 35년,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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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소금꽃' 김진숙 "해고 35년,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2011년 한진중 희망버스 참가자, 해고 노동자 등 모여 김진숙 복직 응원

희끗희끗한 머리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희망버스 당시 제작된 분홍색 손수건을 스카프처럼 목에 두르고 사람들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35년 전인 1981년 당한 해고에 대한 회상과 복직 투쟁에 나선 심정을 담은 발언문이 들려있었다. (기사 아래 김 지도위원 발언문 전문)

"화장실이 없어 어둔 구석을 찾아 현장을 뱅뱅 돌고 식당이 없어 쥐똥이 섞인 도시락을 먹으며 떨어져죽고 깔려죽고 끼어죽고 타죽는 동료들의 시신을 보며 그 사고보고서에 '본인 부주의'라고 지장을 찍어주고 내가 철판에 깔려 두 다리가 다 부러졌을 때도 '본인 부주의'에 누군가 또 지장을 찍어주며 산재처리를 피하던 현장.

일이 너무 힘들고, 스물 다섯 살짜리가 사는 게 아무 희망이 없어 죽으려고 올라갔던 지리산. 천왕봉에서 본 일출이 너무 아름다워 1년간 더 살아보자고 내려와 노동조합을 알게 됐고, 화장실이 없고 식당이 없으면 요구하고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유인물 몇 장에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어 해고된 세월이 35년. 박창수도, 김주익도, 곽재규도, 최강서도 살아서 온전히 돌아가고 싶었던 곳. 현장으로 돌아갈 마지막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발언문을 읽어가는 김 지도위원 앞에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쌍용차 노동자,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 영남대병원 노동자, 콜트콜텍 노동자, 대우버스 노동자도 있었다. 해고를 겪었거나 정리해고에 맞서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모두 김 지도위원의 복직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가자, 해고노동자 등이 28일 산업은행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1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우리는 2011년 희망버스를 타고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했다"며 "그런데 도리어 절망 속에서도 웃으며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전했다.

참가자들은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라며 "김진숙 지도위원이 더 이상 동료의 등을 바라보지 않게, 동료와 나란히 서서 현장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게, 김진숙 지도위원의 마지막 복직투쟁에 함께하자"고 호소했다.

이들 앞에 선 김 지도위원은 준비한 발언문을 읽으며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같은 아픔 겪은 해고노동자들이 김 지도위원에게 전한 응원의 말

김득중 쌍용차지부장,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김계월 아시아나케이오지부 부지부장, 김정봉 콜트콜텍 해고자 등 해고의 아픔을 겪은 노동자들도 김 지도위원에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쌍용차에서 해고됐다 지난 5월 복직한 김 지부장은 "김진숙 지도위원님, 오랫동안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떨리코 큰 힘이 됐다"며 "그 힘으로 저도 마지막으로 복직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도 함께 포기하지 않고 (김 지도위원의 복직투쟁에)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영남대병원에서 해고됐다 지난 2월 복직 뒤 정년퇴직한 박 지도위원은 "복직을 요구하며 병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던 마지막 날, 김 지도위원이 빨간 파카를 입혀주며 '드라이크리닝해서 돌려달라'고 했다"며 "김 지도위원이 그 빨간 파카를 입을 계절이 돌아오기 전에 사랑하는 한진중공업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년 6개월여 앞둔 김 지도위원의 마지막 복직투쟁

김 지도위원은 1981년 10월 1일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1986년 2월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된 김 지도위원은 당시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같은 해 7월 4일 징계해고됐다.

김 지도위원은 지난 6월 23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복직투쟁에 나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지도위원의 정년이 6개월여 남은 시점이었다. 그에 앞서 한진중공업에서는 경쟁입찰을 통한 매각 시도를 앞두고 희망퇴직을 받는 등 인력 감축 움직임도 일고 있었다.

이날 발언문에서도 김 지도위원은 자신의 복직 바람과 함께 한진중공업 상황을 언급했다.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다시 고용의 위기 앞에 서있다"며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와 같이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손으로 승리의 역사를 써보자"고 전했다.

▲ 35년 전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 사원증을 들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가운데). 양 옆에는 문정현 신부(왼쪽)와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 28일 김진숙 복직 응원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과 이를 듣고 있는 참가자들. ⓒ프레시안(최형락)

아래는 김 지도위원 발언문 전문.

어제가 환갑이었는데 산전수전 공중전에 항암전까지 겪으며 한 200년쯤 산 거 같은데 아직 60년밖에 안 살았나 싶다가도 환갑이라서 징그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감옥에서의 생일도 크레인에서의 생일도 특별했지만 회사 정문 밖에서 여러분들의 축하를 받으며 맞는 생일도 각별했습니다.

환갑도 훨씬 전에 간경화로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18살부터 공장생활을 하면서 온종일 욕을 먹고 뺨을 맞고 머리를 쥐어박히는 게 일상이었던 보세공장 시다부터 신문배달, 우유배달, 시내버스 안내양, 그러나 산업역군의 꿈을 안고, 잔업 좀 하면 30만원도 넘는다는 조선소의 용접공이 되었습니다.

화장실이 없어 어둔 구석을 찾아 현장을 뱅뱅 돌고 식당이 없어 쥐똥이 섞인 도시락을 먹으며 떨어져죽고 깔려죽고 끼어죽고 타죽는 동료들의 시신을 보며 그 사고보고서에 '본인 부주의'라고 지장을 찍어주고 내가 철판에 깔려 두 다리가 다 부러졌을 때도 '본인 부주의'에 누군가 또 지장을 찍어주며 산재처리를 피하던 현장.

일이 너무 힘들고, 스물 다섯 살짜리가 사는 게 아무 희망이 없어 죽으려고 올라갔던 지리산. 천왕봉에서 본 일출이 너무 아름다워 1년간 더 살아보자고 내려와 노동조합을 알게 됐고, 화장실이 없고 식당이 없으면 요구하고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유인물 몇 장에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어 해고된 세월이 35년. 박창수도, 김주익도, 곽재규도, 최강서도 살아서 온전히 돌아가고 싶었떤 곳. 현장으로 돌아갈 마지막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항암을 하면서 하루 종일 토하며 서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할 때 이 힘든 걸 뭐하러 하나 싶다가도 이대로 죽으면 저승에 가서도 자리를 못 찾아 헤맬 것 같기도 하고, 희망버스 타고 와서 눈물로 손을 흔들어주고 가시던 그 간절한 손짓들이 눈에 밟혀 버텼습니다.

10년 전 희망버스 손수건입니다. 손수건은 다 해지고 낡을만큼 세월이 흘러 그 때 세 살이던 성민이는 6학년이 되고 초등학생이던 은서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진 조합원들은 다시 고용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얼마 전 조합원 한마당에서 만난 조합원에게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정리해고 투쟁을 몇 번이나 겪었는데 인자 만성이 돼서 개안심니다. 큰 싸움을 몇 번이나 했는데 또 못하겠심니까. 또 바짝 싸우면 되지요."

이런 조합원들이 있어 전 걱정하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목이 쉬도록 출근선전전을 하는 지회장과 간부들. 그리고 2011년 울고 웃으며 끝까지 함께했던 희망버스 동지들.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내고 우리 손으로 승리의 역사를 써봅시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2020년 7월 28일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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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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