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
고전적인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괴테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매일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으로 몇 가지를 꼽았다. 날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훌륭한 그림을 하나 보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젊었을 적에 이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라는 표현에 한참 시선이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난다. '가능하다면'이라는 단서까지 붙이면서 괴테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게는 18세기 독일사회의 '후진성'이라는 현실 속에서 괴테가 느꼈을 좌절, 고통, 외로움을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괴테의 그 표현은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거짓언어가 넘치는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느껴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는 나의 동시대인이었다.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가 영위해온 삶은 거짓언어의 숲 속에서 끝없이 헤매는 파행의 연속이었다. 6·25 전란 직후 먼지가 풀풀 나는 황량한 길바닥이었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며 놀던 철없는 어린 시절은 그런대로 행복했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3월 어느 날(당시는 4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이 행복의 시간은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날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신신당부 간곡히 말씀하셨다. “어느 정부든 자기 국민에게 나쁜 짓을 하는 정부가 있을 리 없다. 내일 투표는 OOO에게 찍도록 부모님들께 잘 말씀드려라.” 그리고 이튿날 오후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저녁 무렵 성난 사람들이 파출소를 불태우고, 엄청난 시위대가 거리를 뒤덮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총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전쟁 이후 정부가 자신의 국민을 향하여 최초로 총격을 가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부가 저지른 대규모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궐기한 내 고향 마산 사람들이 겪은 일이다.
이상하게도, 3·15에 대한 내 기억 속에 언제나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때 담임선생님이 하셨던 거짓말이다. 물론 선생님은 자신이 원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교사가 상부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제자들 앞에서 교활한 논리로 거짓말을 실제로 함으로써 선생님은 결국 신용을 잃었고, 우리들은 벌써 어린 나이에 스승을 존경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러한 거짓말의 궁극적인 결과였다. 즉, 우리들 중에서 그 이후 자신의 인생행로에서 거짓언어의 일상화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더 끔찍한 장면에 마주쳤다. 초여름 어느 날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농촌을 돕기 위해서 우리들은 각자 양동이 따위를 들고 교외로 대열을 지어서 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난데없이 출현한 군용 지프차에서 내린 뚱뚱한 육군 장교가 우리들 곁에서 걷고 계시던 선생님을 불러 세워 놓고는 느닷없이 지휘봉으로 마구 구타를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학생들의 어지러운 대열이 그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것이다. 그 군인은 5·16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지역 계엄사령부 최고 책임자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의 명분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스승을 구타하는 방법으로, "나라에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이 일로 해서 나는 그 이후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군사정권이 하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군인들에 의한 통치는 기본적으로 몰상식, 무교양, 극단적인 무례에 토대를 둔 것임을 그들 자신이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사통치하에서 내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 강압적 통치방식 이외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몰상식한 짓들을 보고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고통스러움이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초 나는 공군 장교로 사관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졸업식 때마다 오로지 대통령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으로 봄도 되기 전에 길가의 개나리꽃들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 꽃나무들과 병사들을 행사 몇 달 전부터 끊임없이 괴롭히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아야 했다. 그런가 하면 지방 도시에서는 전국체육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그날 대통령이 지나가기로 되어 있는 길가에는 새벽부터 뿌리 없는 생나무들이 급히 심어졌다가 며칠 후에는 대개 말라 죽어버렸다. 이런 종류의 거짓행동과 어리석은 짓은 전국 어디서나, 어떤 학교, 어떤 직장에서나 일상다반사였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른바 장발단속이었다. 멀쩡한 젊은이들의 머리칼이 국가기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길거리에서 함부로 잘리는, 터무니없는 만행이 장기간 계속되었다. 장발단속은 어떠한 법률에 의거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최고 권력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거슬린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내가 1970년대 중반 어느 지방 대학에 일자리를 얻어 근무하던 때, 학생들의 부탁으로 저명한 작가 한 분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대학시절부터 흠모해왔던 이 나라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두어 시간 동안 문학과 역사와 정치에 관한 강연을 들으면서 학생들과 나는 모처럼 진지한 사색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 강연회 끝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와 같이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분이 보이지 않았다. 살펴보니 길 건너편에서 경찰의 장발단속에 걸려들어 그분이 ‘닭장’에 막 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분은 몇해 동안 미국에 머물다가 막 귀국한 때였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세계적인 유행대로 장발이었고, 얼핏 보면 젊은 학생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돌발적인 사태에 당황하여 다급히 경찰관들에게 쫓아가 이분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를 설명하고, 제발 풀어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을 경찰서로 끌려가는 위급상황에서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그분과 나는 근처의 음식점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밥을 먹지 못했다. 작가는 창백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으나,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박정희시대는 참으로 누추하고 야만적인 시대였다. 작가는 불온한 글로 인해 탄압을 받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로서 명예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전제적 권력은 그렇게 탄압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나라 최고 수준의 작가가 장발단속에 걸려 ‘닭장차’에 실린다는 것은 실로 기막힌 코미디이자 누추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가장 야만적인 형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내가 경험한 일은 일선 경찰에 의해 별생각 없이 자행된 사소한 사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일은 박정희시대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극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시대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비극적인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비극이란 원래 위대한 정신의 위대한 몰락에 관계하여 일어나는 인간적 드라마이다. 박정희시대는 '위대성'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치졸하고 천박한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농촌 사람들을 전부 바보 취급하면서 '잘살아보세'라는 유치한 노래를 밤낮으로 틀어놓고 듣기를 강요했고,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을 살린다면서 토착적 민중문화를 가차 없이 파괴하고, 민중의 지속가능한 삶의 근본 토대인 공동체들을 급속히 해체시켰다.
그리고 이 농민문화의 파괴와 공동체의 해체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경제성장'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회, '경제성장'이라는 명분 앞에서는 역사도 문화도 전통도 헌신짝처럼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 그리하여 깊이도 영혼도 없는 사회,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한국사회의 기본성격이 박정희시대를 통해서 굳건히 정립된 것이다.
1979년 10월 어느 새벽,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이웃집에 사는 방송국 기자 가족에게서 들었다. 순간적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결국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구나 하는 허망한 느낌에 돌연히 휩싸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들의 선생님이 군인으로부터 구타당하던 것을 본 이후, 학생, 군인, 교원으로 쭉 살아오면서 나는 한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학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글을 쓸 때도, 글이 발표되고 나서도 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또, 그런 '비굴한' 자신이 말할 수 없이 혐오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해방이다"-독재자 박정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종일 들뜬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1980년 5월 이후, 절망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군사 깡패들에 의한 야만적인 통치하에서 기꺼이 감옥으로, 공장으로, 야학교사의 길로 가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근본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어렵게 구한 외국 서적과 잡지들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래도 책들을 좀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미국 뉴욕주립대학 대학원의 입학허가를 얻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지 몇 달도 안 되었을 때, 나는 뜻밖에 어떤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매우 단순한 경험이었다. 내가 입학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그 대학에는 교수와 대학원생을 위한 여러 개의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대개 내가 이용한 도서관은 인문·사회 분야 도서들이 집중되어 있는 중앙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의 규칙에 의하면 대학원생에 대한 도서 대여기한은 6개월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따라 규칙이 다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한번은 법과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별로 읽지도 않고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살펴보니 대여기한이 한 달밖에 안되고, 그 규정에 따르면 이미 내가 열흘 이상 기한을 넘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욱 놀란 것은 기한이 넘으면 하루 10달러씩 벌금을 부과하기로 돼 있다는 규정이었다.
부랴부랴 법과대학 도서관에 반납을 하러 가서 설명을 했다. 처음 이 대학에 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인지라 이 도서관의 규칙이 중앙도서관과 다른 것을 몰랐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지만, 이런 실수로 학생신분으로 100달러가 넘는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은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고 얘기를 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젊은 여자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뒤에 앉아 있는 할머니 사서(司書)에게로 가서 내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할머니가 내게로 와서는 방금 젊은 직원에게 한 얘기를 다시 자기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얘기를 들은 그 할머니 사서는, 설명을 들으니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규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기 재량으로 벌금을 하루 10달러가 아니라 하루 1달러로 계산하여 모두 10달러로 하여 받겠으니 괜찮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러겠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벌금을 그 자리에서 물고 나왔다.
도서관에서 나와서 곰곰 생각해보았다. 만일 한국의 대학에서라면 이런 경우 어떤 장면이 벌어졌을까. 나는 그동안 내가 재직했던 대학들과 그 도서관 풍경들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한국에서는 이런 모습이 절대로 재현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대학이든 어디든 실무자에게 주어진 재량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을 곧이곧대로 지키든가 아니면 서류조작 따위를 통해서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거짓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마 변함없는 현실일 것이다.
공공기관이든 사기업이든 한국의 조직에서는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실무자에게 현장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결정은 고위층, 상층부에서 이루어지고 실무자급에게는 이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술적 보완 책무가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온갖 짓들이 국책사업이니 뭐니 하면서 횡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중·하위직 공무원, 관련 분야 연구자나 학자들은 이의제기를 하지 못하고, 다만 그 말도 안되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논리를 개발하는 데 고통스럽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철저한 상명하복의 위계구조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조직의 논리가 식민지시대와 군사정권 시절을 통해서 이 사회의 온갖 영역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 경제성장기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시된 덕목은 효율성·생산성이었고, 그러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것만큼 공공조직이나 기업 어느 쪽을 막론하고 제일의 원리로 확고하게 굳어진 것은 군대식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주적·자발적 사고와 판단으로 행동하는 '자유인'의 논리가 아니라 ‘노예의 논리’가 이 사회의 지배 원리가 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노예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필요한 기술은 끊임없는 거짓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힘은 퇴화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고립되고 조소를 당하며, 때로는 냉소 혹은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날 미국 대학의 도서관에서 그 할머니 사서가 보여준 당당한 모습, '자유로운' 모습 앞에서 내가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내심 기가 죽었던 것을 가끔 회상하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이라는 땅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삶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진실 속에서' 산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것이었다. 언제나 거짓언어, 상투적인 언어, 화석화된 ‘공식적’ 언어 속에서 우리의 삶은 영위되어왔다. 즉, 우리는 늘 '노예'로 살아왔을 뿐, '자유시민다운' 발언을 하고 당당한 자세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이 맘껏 놀지 못하고, 건강한 성장기를 박탈당하면서 '교육지옥'에 갇힌 채 살아야 하는 사회, 청년들이 활기를 잃고 기껏해야 7급 공무원이나 '정규직'을 몽상할 수 있을 뿐인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는 여전히 왜 그동안의 엄청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암담한 사회가 돼버렸는지 그 뿌리를 찾아보려는 근본적인 탐구가 없이 늘 피상적인 증상들을 어떻게 하면 완화시킬 수 있을지 임시처방을 궁리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들이 이 나라의 언술공간을 늘 횡행하고 있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된 게 아니라, '경제성장' 바로 그것이 근본적 문제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석유시대가 끝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기후변화라는 가공할 사태가 현실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아직도 경제성장이 계속될 수 있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계속해서 빠져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을 넘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거짓언어, 타성적인 언어습관, 상투적인 사고의 틀을 걷어내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2012년)
출처 《발언Ⅰ》, 녹색평론사, 2016년, 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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