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논평'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체제 차원으로 보면 원격의료는 시금석이고 마중물이며 물꼬이다. 산업과 경제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영리병원, 바이오신약, 빅데이터 등도 모두 마찬가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의 본질에서 나온 다양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원격의료(비대면 진료) 활성화를 관철하든 못하든 그에 대한 '집착'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온 패키지와 함께. 건강 향상도 몇 가지 산업의 발전도 아닌, 체제 강화(또는 전환)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원격의료, '바이오 자본주의'는 우리의 구원자일까?)
이런 프로젝트를 '개인' 차원으로 축소하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개인이 특별히 이 '의료산업'에 경도되어 이런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체제 차원의 프로젝트니 정권도 뛰어넘는 '주류'의 경향성, 그리고 강고한 구조라 해야 정확하다.
체제는 또한 오래 간다. 이번 시도가 어떻게 결말이 나든, 때로 같은 모양으로 때로는 다른 모양으로, 아마도 지겹도록 계속될 것이다. 희미한 기회나 작은 틈만 보여도 기-승-전-'신(新)의료 기술'이라는 주장을 펴리라 예상한다. 비관적 시나리오로는 결국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뜻을 이룰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낙관한다. 역사적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말로만 건강·안전·생명·삶의 질을 내세우고 실질이 없으면, 그 어떤 기술· 정책·제도·정치·경제도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건강과 안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낭비와 비용 부담만 커지면 어떤 사회가 이를 길게 용인할 수 있을까.
먼 훗날 이야기만도 아닌 것이, 모순은 구조적이며 따라서 늘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정부는 방역을 성공으로 규정하고 '한국형'으로 설명하려 하나, 현실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국제 표준을 추진한다는 'K 방역'으로는 물류센터나 콜센터 등의 집단 감염을 예방하지 못하는 이 부조화.
따져 묻자. 어떤 원격의료로, 무슨 방법으로, 코로나19 유행과 확산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인가? 치료로 한정해도 마찬가지다. 청도대남병원과 대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비대면 진료가 얼마나, 무슨 도움이 되었나? 앞으로 원격의료 체계를 잘 만들면 비슷한 상황에서 뭔가 도움이 될 법한 대안이 될까?
출발부터 엇나갔다. 코로나 유행의 고통은 현재이며 또한 과거다. 이 집단적 경험을 아예 없던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원격의료 또는 그 무엇이든 모든 희망은 생명에 대한 미증유의 위협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모든 희망(또는 대안)은 기계적이거나 무능력하거나 게으른 것이다.
끝나지 않았으니, 사람과 삶에서 시작한다는 점만 명확하면 전화위복도 가능하다. 경제 부처가 앞장서고 정치권이 달라붙어 원격의료를 거론하는 데서 당연히 '재난 자본주의'를 떠올리나, 그 대항으로 '재난 민주주의'를 상상하면 코로나 유행은 오히려 기회이다.
포스트 코로나까지 염두에 두면서 실천해야 할 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원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불평등 축소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알면서 무시하거나 회피했던 시대적 과제. 공공성 강화와 공공보건의료 확충이라는 요구도 곳곳에 가득한 불평등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코로나 유행은 감염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명확하게 드러냈지만, 이는 단지 우연이 아니라 우리 사회경제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예를 들어 다시 물류센터와 콜센터를 호출할 필요가 있을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거나 개인 예방을 실천하기 어려운 환경과 조건은 이미 충분히 사회적이며 또한 구조적이다.
'기저질환'이니 '치명률'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질병의 의료 이용 등도 모두 불평등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코로나 유행의 사회경제적 결과, 예를 들어 소득 감소나 실직, 해고 등에는 불평등이라는 말조차 어색하다. 국내를 넘어 국제 차원의 불평등인 점도 잊을 수 없다.
다시 강조한다.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온갖 불평등으로 가득한 우리의 사회경제 체제를 경험하고 느끼며 인식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물질이며 몸으로, 사람과 삶에서 출발하는 모든 포스트 코로나는 이로부터 출발하고 이를 토대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썽 많은 원격의료에도 당연히 같은 원리가 통한다. 감염부터 사회적 결과에 이르기까지 '기술'이 불평등을 줄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가 기본 질문이다. 더 가난하고 사정이 나쁜 사람이 감염병에 덜 걸리고, 혹시 병이 들면 더 빨리 낫고, 또는 소득을 유지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다른 질병이나 건강 문제도 원리는 같다. 사회경제적으로 조건이 나쁘고 접근성, 보장성이 낮은 계층이나 집단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농촌에 혼자 사는 노인을 돌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역할과 가치를 판단하려면 원격의료 '바깥'에서 따져야 답을 구할 수 있다. 더 심층 구조에서 출발하는 방법이다. 누구에게 무엇이 왜 필요한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방법이 얼마나 쉽고 어려운지. 그래야 상하좌우 상호관계가 나오고 우선순위가 드러난다.
원격의료가 어디쯤 있는지 우리는 이미 답을 안다. 사회적 가치를 달성하는 데 왕진, 방문보건과 간호, 주치의제도, 지역의 기초 공공의료 자원 확충, 커뮤니티 케어 등보다 앞자리라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격의료는 이 과정에 활용할 수 있는 보완적 수단이고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누가 가장 절박한가? 지역과 현장에는 코로나로 경험한, 체화한 불평등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정말 원격의료 또는 비대면 진료가 그렇게 중요한가? 모두를 불안하게 했던 그 부족한 음압병실, 중환자실, 공공병원, 의료인력은? 확진을 받고도 갈 데가 없어서 집에 있어야 했던 확진자들은? 자칫 정말 큰 일 날뻔했던 만성 정신질환자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저절로 그 고통은 숨거나 사라진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를 대신해, 국가와 중앙 정부 차원에서 마치 포스트 코로나 체제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원격의료. 사람, 삶, 지역은 더 소외되고, 모순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굳이 밝혀 적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지역이 고통의 진원이며 재난 민주주의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경험을 기억하고 해석하며 새로운 대안의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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