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씨가 국민권익위원회를 찾은 것은 논산경찰서를 못 믿어서다. 지난해 5월 김 씨는 백제종합병원의 각종 비리가 담긴 파일을 경찰서가 아닌 국민권익위에 넘겼다. 신고 파일 폴더 개수만 31개. 용량이 3기가에 달할 정도로 신고서는 두터웠다.
처음부터 김 씨가 '권익위에 신고하리라'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논산경찰서에 백제종합병원의 비리 행위를 고발하겠다"고 말하자, 모두 만류했다. 김 씨의 고향은 백제종합병원이 있는 충남 논산이다. 논산 사람들은 마치 짠 듯이 김 씨에게 비슷하게 말했다.
고민 끝에 김 씨는 권익위에 공익 신고하는 길을 찾았다. 권익위에 공익 신고하면, 공익신고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권익위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 경찰은 권익위 눈치를 살피느라 수사에 더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김 씨는 생각했다.
권익위는 김 씨의 기대대로 움직였다. 공익신고 접수 한 달 만에 부패신고팀 등 권익위 소속 세 개 팀이 김 씨에게 만나자고 했다. 신고 접수 두 달 만인 지난해 7월, 권익위는 신고 내용을 바탕으로 보건복지부, 논산보건소를 비롯한 7개 기관에 조사나 수사를 의뢰했다.
권익위로부터 조사나 수사를 의뢰 받은 7곳 기관 중에는 경찰청도 있었다. 불법 리베이트 수수 의혹을 비롯한 5개 사항은 수사가 필요할 것 같다며, 권익위는 경찰청에 김 씨의 신고 내용 일부를 이첩했다. 경찰청은 백제종합병원이 있는 논산경찰서에 사건을 배당했다.
김 씨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들었다. 김 씨는 항목 별로 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언제든지 출석할 의사가 있고, 낼 증거도 있다”고 했지만, 논산경찰서는 김 씨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논산경찰서로 사건이 이첩되고 9개월가량 깜깜무소식이었다.
9개월 만에 논산경찰서가 내놓은 수사결과는 황당했다. 사건 담당 수사관인 논산경찰서 지능팀 박 아무개 경위는 “수사할 필요성이 없다”며 내사 종결했다는 통지서를 김 씨에게 보냈다. 공익신고자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채, 증거 요청도 없이 내사 종결했다.
논산경찰서가 써놓은 내사 종결 사유는 엉터리였다. 김 씨는 "A 씨가 한 의료용품 업체로부터 매달 200만 원씩, 장비를 교체하면 현금으로 500만 원 씩 받는다"고 신고했지만, 논산서는 신고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과거 재판 사실을 근거로 ‘이미 다 끝난 일이다’라고 통보했다. 문장이 문법에 맞지 않지만, 박 경위가 적은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 이렇다.
논산서 "12년 전 재판 받았으니, 리베이트 없을 것이다"
논산경찰서의 첫 번째 잘못은 '10여 년 전 백제종합병원 리베이트 관련 판결문만 보고, 리베이트 의혹에 대해선 더 이상 수사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백제종합병원이 12년 전 리베이트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니, 리베이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수사할 필요가 없다는 엉뚱한 근거를 댔다.
백제종합병원은 2003년 3월부터 3년 반 동안 한양약품으로부터 의약품 납품 대가로 19억4000여만 원을 받아 챙긴 적이 있다. 다만, 재판이 열렸던 2008년에는 리베이트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었다. 현재는 판매촉진을 목적으로 병원이나 제약회사 등이 돈을 주거나 받기만 해도 처벌받지만, 그 때는 아니었다.
이준영 백제종합병원 이사장과 이재효 이사가 2008년 8월 당시 배임수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고 무죄를 선고받은 것도 당시 리베이트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종합병원의 리베이트 관련 재판이 끝난 직후인 2008년 12월, 의약품 분야 불법 리베이트 제공 금지에 대한 제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마련됐다.
논산서는 모른 척 한 것인지 모른 것인지, 신청인이 틀린 주장을 하고 있다고 거짓 주장을 했다. 리베이트 처벌에 대한 법적 근거는 의료법, 약사법, 의료기법 등 다양하다. 하지만 논산경찰서는 "신고인이 법을 잘 몰라서 리베이트를 의료법 위반으로 잘못 알았다"면서 "공익침해 관련해 신고 대상이 아니다"라며 사건처리결과 통지서에 허위사실을 적었다.
논산서, 백제종합병원 측 자료만 보고 수사 종결
논산경찰서는 백제종합병원의 리베이트 판결을 어떻게 알았을까. 박 경위는 지난 29일 <셜록>과의 통화에서 백제종합병원이 제출한 판결문을 근거로 내사 종결을 판단했다고 고백했다. 권익위로부터 수사 요청을 받고, 백제종합병원에 해명을 요구했는데 백제종합병원이 제출한 자료만으로 수사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백제종합병원의 리베이트 의혹은 현재진행형일 가능성이 크다. <셜록>이 만난 백제종합병원 진단의학과 직원 B 씨는 "진단의학과에서 오래 일한 A 씨가 대전에 위치한 의료용품 도매업 회사로부터 매달 대략 200만 원 정도 받고 있다"면서 "이 내용을 A 씨 상사도 알고 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고 말했다.
B 씨의 주장대로면 돈을 받은 A 씨와 돈을 준 의료용품 도매업 모두 처벌받는다. 2010년 11월 제정된 리베이트 쌍벌제에 따라 돈을 받은 병원 관계자와 돈을 건넨 의약 업체 모두 처벌 대상이 된다. 공소시효는 문제 안 될 것으로 보인다. B 씨는 의약용품 업체 직원으로부터 관련 증언을 최근까지 들었다고 밝혔다.
논산경찰서가 저지른 두 번째 잘못은 리베이트를 뺀 나머지 수사 요청 사항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권익위는 리베이트 불법 수수 의혹뿐만 아니라 진료기록부 허위 작성 등을 비롯한 네 가지 항목에 대해서도 수사를 의뢰했지만, 논산경찰서는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하지 않았다. 박 경위가 <셜록>에 스스로 인정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박 경위의 변명은 궁색했다. 권익위가 논산경찰서에 "재조사를 하라"고 통보하자 담당 수사관인 박 경위는 그때서야 공익신고자인 김인규 씨에게 전화했다. 박 경위는 김 씨에게 "권익위로부터 수사 의뢰를 받는 일이 생소한 데다, 문서가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인쇄돼서 잘 인지하지 못했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았다.
담당 수사관 "병원이 검찰에 백을 쓸 수 있으니 다른데 고발하라"
사실 김인규 씨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박 경위의 말은 따로 있었다. 박 경위는 김 씨에게 "시골에 있는 일개 경찰관이 백제종합병원 비리를 담당해 수사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다른 기관에 고발할 것을 권유했다.
박 경위는 "논산경찰서가 아닌 적어도 광역단위 수사기관에 수사 의뢰를 해야 제대로 수사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백제종합병원과 대전지검 논산지청 간의 유착 가능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경위는 그에 대한 근거로 자신의 경험을 들었다. 백제종합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에 대해 수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경찰서 윗선 혹은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 소속 검사의 만류로 구속이 안 된 적이 있는 취지로 말했다.
리베이트 의혹에 대해서 병원이 준 자료만으로 내사 종결을 한 박 경위. 하지만 <셜록>과의 통화에서 박 경위는 "백제종합병원이 공익신고 내용을 보도하면 눈치챌 수 있으니 기사 작성에 유의해달라"는 취지로 말했다.
논산경찰서는 뒤늦게 김인규 씨에게 철저한 수사를 약속한 상황이다. 박 경위는 지난 20일 김 씨와의 통화에서 "수사 내용 보호를 위해 지능팀장에게도 수사 내용을 알리지 않을 예정"이라면서 "자신을 믿고 따라와 달라" 부탁했다.
김 씨는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논산서가 이런 태도로 수사에 나섰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앞서 논산서는 공익신고자에게 전화 한번 하지 않고 백제종합병원 측 자료만 보고 판단했다. 국민권익위가 수사를 의뢰한 5개 사안 중 4개는 수사조차 안 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김 씨가 어렵게 박 경위와의 통화내용을 전부 <셜록>에 넘긴 것은 논산서의 과오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잘못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고 전했다. 논산경찰서는 지난 20일 공익신고자 김인규 씨와 마지막 통화를 나누고 현재까지 연락을 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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