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현장의 많은 스태프가 '프리랜서'다. 사실상 방송국에 종속돼 정규직 직원처럼 일하지만 임금 수준은 형편없이 낮고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무늬만 프리랜서'다.
29일 서울 마포구 마포FM에서 방송현장 비정규직 '무늬만 프리랜서' 증언대회가 열렸다. CJB청주방송이재학PD사망사건대책위원회가 주최했다. 고 이재학 PD는 CJB 청주방송의 14년차 프리랜서 PD였다. 방송국의 차별과 갑질을 고발하다가 해고를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증언대회는 방송노동 현장의 다양한 직군의 열악한 상황을 고발하며 이러한 노동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증언대회에는 아나운서, PD, 방송작가 등 또 다른 이재학PD들이 모여 방송현장에서의 비정규직 차별 실태를 증언했다.
비정규 차별, 성차별 만연한 방송국
유지은 대전MBC 아나운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대전MBC 소속의 정규직 아나운서와 똑같이 일했다. 회사 내 유 아나운서의 자리가 있었고 회사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았다. 사원증과 명함도 나왔다. 보수는 주급으로 지급됐다.
노동자 대우에서 차이가 났다. 그는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보수를 출연료로 받아야 했다. 대전MBC가 책정한 출연료 수준이 문제였다. 해당 출연료를 그대로 노동 시간만큼 받으면 이 방송사 소속 직원이 받는 급여보다 올라갔다. 유 아나운서는 "급여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많아진다"는 이유로 적은 출연료를 받아야 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겨냥해 출연료가 별도 책정된 셈이다. 그가 '프리랜서'로 고용된 이유는 오로지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불안한 지위 때문임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유 아나운서와 같은 프리랜서 아나운서 이전엔 '계약직 아나운서'가 있었다. 이들도 정규직 아나운서와 똑같은 일을 했다. 다만 고용 형태가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급여가 낮고 고용 형태가 불안정했다.
증언 대회에서는 방송사의 성차별이 노동 조건에도 구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전MBC는 계약직 아나운서와 정규직 아나운서를 단순히 '성별'로 구분해 채용했다. 여성 아나운서는 계약직에서 '프리랜서'로, 고용 형태가 더 불안해졌다.
유 아나운서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부터 20여 명의 여성 아나운서는 모두 계약직이거나 프리랜서로 채용된 데 반해 남성 아나운서는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이러한 '채용 성차별'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무늬만 프리랜서', 즉 일은 정규직과 다름없이 하지만 정규직이 비해 훨씬 낮은 보수와 불안한 고용 형태, 낮은 처우를 받는 것은 아나운서에만 한하지 않는다.
대구MBC는 지난 2월, 자막 CG 업무를 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기본급을 없애고 프로그램별로 바우처를 지급하겠다'고 통보했다. 바우처는 일종의 어음과도 같다. 노동자들은 바우처를 받아 다시 현금으로 교환해야 한다. CG 업무를 맡은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 노조가 없기 때문에 대구MBC는 일방적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2010년부터 일했다는 한 드라마 스태프 이 모 씨는 "정규직 방송 스태프들이 비정규 스태프에게 반말을 하는 건 관행"이라며 "그 분들은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고 성토했다. 이 씨는 이어 "사고가 난 채로 2년간 산업재해 처리도 받지 못하고 일하기도 했다"며 "방송사 정규직들이 평소에는 검찰 욕하고 재벌 욕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일에는 침묵하는 걸 보고 환멸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금은 2020년...동료 처우 개선 시급"
방송작가 역시 방송사의 '갑질'에 휘둘려 불안정한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한 최모 방송작가는 "방송 작가들은 모두 프리랜서"라며 "우리의 임금은 '인건비'도 아닌 '제작비'로 편성된다"고 말했다. 방송 외주 제작에 책정된 금액이 줄어들어도 비슷한 수준의 방송은 계속 납품해야만 한다. 그만큼 비정규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줄어들거나, 구조조정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비정규 노동으로 인한 방송 스태프의 불안정 노동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겉으로는 빛나는, 하지만 실질로는 '무늬만 프리랜서'인 방송 비정규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더 열악해지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 방송작가는 "20여 년 전부터 방송 작가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러나 "방송국이 이 문제를 개선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20년 후에도 고 이재학 PD와 같은 일은 반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작가는 "이재학 PD 사건을 보고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라고 느꼈다"며 "결국 PD, 작가 등 모든 방송 스태프들이 자기 일이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 이재학 PD 유족 대표로 이 자리에 참석한 이대로 씨(고인의 동생)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 3개월여 가까이 방송사의 차별 갑질 문제를 파헤치는 중"이라며 "지금은 2020년인데 이런 비상식적인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 씨는 이어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안착하고 있지만, 방송 비정규 종사자들에게는 꿈만 같은 이야기"라며 "저희 형의 명예 회복은 물론, 저희 형과 같이 프리랜서로 일하는 동료들의 처우개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 사례 증언이 이어진 후 마이크를 든 김성길 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는 "방송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본적인 노동자 보호나 제도적 장치조차 마련되지 않았다"며 "표준계약서 도입조차 되지 않는 현실은 유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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