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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한국어 바로알기] 수육과 양곱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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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한국어 바로알기] 수육과 양곱창

요즘은 채식주의자도 참 많다. 채식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어트의 일종으로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도 어려서는 고기가 없어서 못 먹었고, 나이가 들면서는 한이 맺혀서 많이 먹다가 더 나이가 드니 당뇨도 심해지고, 피도 흐려져서 어쩔 수 없이 채식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기만 보면 침을 흘리며 식탐이 도진다. 예전에는 제삿날이나 먹던 고기인데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으니 참으로 세상 좋아졌다.

어머니께서 제삿날이면 수육을 만드셨는데, 따뜻할 때 먹으면 정말 맛이 좋았다. 그러나 제사용 음식은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먼저 먹으면 안 된다. 제사상을 차릴 때 옆에 섰다가 과일이 떨어지기만 기다린 적도 있다. 떨어진 과일은 다시 올지지 않으니 주머니에 넣고 가서 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수육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냥 ‘푹 삶은 고기’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원래 수육은 ‘숙육(熟肉)’이라고 썼다. 간단하게 말하면 “삶아서 익힌 고기”를 말한다. 물론 그것을 삶기 위해서는 마늘도 넣고 생강도 넣는 등 많은 재료가 들어갈 것이나 기본적인 의미는 ‘삶아서 익힌 고기’라는 뜻이다. 그러니 수육이 돼지고기인가 쇠고기인가는 물을 필요가 없다. 어느 고기든지 수육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또 다른 수육이 있다. 한자로 ‘獸肉(수육)’이라고 쓰는데, 이것은 짐승의 고기를 말한다. 즉 물고기가 아닌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수육이라고 한다. 돼지고기나 쇠고기 모두 수육이라고 하는데, 평상시에 식당에서 먹는 수육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숙육’에서 ‘ㄱ’이 탈락하여 수육이 된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즐기는 ‘수육’이다.

어느 음식점에 갔더니 수육과 아울러 ‘만화(마나/만하)’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자주 보지 못하던 것이라 주인한테 물었더니 ‘지라(脾)’고기라고 한다. 처음 듣는 말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고어사전>에 ‘만하 脾/ 만화 脾’라 표기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만하, 만화’라고 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지라’나 ‘만화’ 같은 이름은 거의 듣지 못했다. 고유어가 한자어에 밀려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지라’라는 이름은 그래도 어려서 몇 번 들은 일이 있지만 ‘만하/만화’는 생전 처음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순 우리말이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우리말은 모르고 한자어로 비장(脾臟)이라고 하면 더 쉽게 알아들으니, 우리의 언어행태가 한자를 모르면 인식하지 못하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이런 종류의 단어는 상당히 많다.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밥을 먹다가 “양이 안 찼어.”하고는 ‘양’의 의미에 관해 토론을 했다.(밥 먹으면서 한국어를 토론하는 우리는 참으로 잘 나가는 한국어학과 교수 부부다.) 양이 작아서 많이 못 먹는 것인가, 양이 적어서 못 먹는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하였다. 사실 토론이랄 것도 없이 필자의 주장일 뿐이었다. ‘양’은 순우리말로 ‘위장’이라는 말이다. 한자로는 ‘月+羊’이라고 쓰기는 하지만 중국의 한자어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어다. 정약용은 그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리나라 속어로 소의 밥통을 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로 거성이다.(東俗 牛胃曰月羊(月+羊) 吾東之造字也 去聲)”라고 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니까 양은 ‘소의 밥통’을 일컫는 순우리말인데 사람들은 ‘양곱창’이라고 하면 “양의 곱창”을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 ‘소의 위장’을 썰어서 구워먹는 것이 양곱창이다. 상당히 쫄깃한 것이 식감이 좋다. 양의 곱창이 그런 식감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양이 작아서 밥을 많이 못 먹어.”라고 하는 말이 맞는 것인데,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이 적어서 못 먹어.”라고 답을 한다. 아마도 수량을 셀 때 쓰는 ‘양(量)’과 헷갈려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소의 밥통’을 말하던 것이 ‘사람의 밥통’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배가 부르지 않다.”는 말을 “양이 차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위장을 더 채워야 한다.”는 말이다.

순우리말이 한자어와 헷갈리고, 한자어에 우리말이 세력을 잃고, 한자어의 음운이 바뀌고 했으니 우리말을 제대로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부단히 익혀서 바른 말을 후손에게 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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