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친노(親盧)'라고 분류되는 정치인들만큼 운이 좋은 정치인들도 드물다. 대부분 386에 해당할 이들은 노무현이 대통령일때 청와대나 국회에 대거 포진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덕에 이른 나이부터 출세한 '친노'들은 참여정부 시절 권력을 잡았다가 이명박이 집권 한 후 잠시 폐족을 자처했지만, 노무현의 서거 이후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들은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을 하다 문재인 정부에선 권력 핵심부가 됐다. 이쯤되면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친노'만큼 이른 나이에, 집단으로, 별다른 노력이나 기여 없이, 길게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도 찾기 힘들 듯 싶다.
노무현 대통령 덕에 출세하고 권세를 누리는 '친노' 정치인들이 '노무현 정신'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과문한 탓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노무현 정신'은 시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승산이 없어도, 패배가 예정돼 있더라도,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말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영남패권주의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도전했고, 정치적으로 불리한 줄 알면서도 만악의 근원 부동산 문제와 정면대결했다.
참여정부 당시 만들어진 종합부동산세는 지금의 문재인 정부와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뚝심으로 관철된 세금이다. 영남패권주의와 부동산공화국의 최대 수혜자인 대한민국의 메인스트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저주라는 표현 이외의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미워했던 건, 그가 온몸을 불살라 영남패권주의와 부동산공화국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아졌다.
시대의 근본모순을 직시하고 장렬히 산화하더라도 끝까지 맞서는 정치인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한데 '친노' 정치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광만 상속받을 뿐 노무현 정신의 고갱이는 외면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시간이 길고 공유한 추억이 많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시에 한 자리를 맡았다고, 노무현 정신을 목놓아 외친다고, 시시때때로 봉하마을을 찾아 대통령 무덤 앞에서 곡진한 예를 올린다고 노무현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박정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건 노무현 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대의 모순과의 정면대결 여부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인지를 판단할 유일무이한 기준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자칭, 타칭의 '친노' 정치인들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입증할 기회가 왔다. 부동산공화국 청산의 특효약 보유세에 대한 입법이 바로 그 기회다. 재정개혁특위가 누더기로 만든 종부세 개편안을 의회에서 '친노' 정치인들이 바로 잡을 천재일우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만약 '친노' 정치인들이 종부세 정상화를 위해 전심으로 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을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친노' 정치인들이 가뜩이나 엉망이 된 종부세 개편안을 아무 생각 없이 통과시킨다면 그들을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로 보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나는 '친노' 정치인들이 노무현 정신을 '말'이 아니라 '법안'과 '정책'으로 입증하길 바란다. 그길만이 '친노' 정치인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진 태산 같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위해서도 현명한 선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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