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쉘위댄스>는 일상의 무료함에 빠진 중년 회사원이 춤을 배우면서 삶이 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춤을 배우게 되는 동기는 퇴근길 전철에서 매일 보는 건물의 댄스 교습소 창문에 비친 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가는 모노레일을 타거나 시내를 달리는 JR 전철을 타면 색다른 장면을 볼 수 있다. 철로가 빌트인 가구처럼 시민들의 생활공간과 맞닿아 있는 곳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전철에서 손을 뻗으면 아파트 베란다의 빨래를 걷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들게도 한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노선 바로 옆에 있는 빌딩의 회사원이 복사기를 다루는 모습도 보인다.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 비견되는 도쿄 우에노 시장을 가면 철도 고가 밑으로 다닥다닥 상점이 들어서 있다. 철도고가를 경계선으로 한쪽은 왁자지껄한 시장이 한쪽은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우에노 역은 JR동일본과 도쿄메트로의 환승역이기도 하고 서울 지하철 2호선과 같은 도쿄 순환 전철 야마노테센을 비롯해 야마가타,아키타,조에쓰,호쿠리쿠,도호쿠,홋카이도 신칸센 고속열차, 다카사키 선, 우쓰노미야 선, 게이힌 도호쿠 선, 조반 쾌속선 열차가 다닌다. 지하철은 긴자 선, 히비야 선이 지나간다. 우에노 역에서 하루 종일 인파의 물결을 볼 수 있는 이유다. 열차를 타고 우에노역에 접근 하다보면 길게 이어지는 환승노선 안내 차내 방송도 들을 수 있다.
일본 국토교통성 자료(2016년 철도통계)에 따르면 야마노테센 외선순환선의 최고 혼잡구간은 우에노역과 오카치마치역 사이로 163%의 혼잡률을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 우에노역과 오카치마치역을 잇는 고가 밑이 우에노 시장이다. 때문에 시장 상인들은 분초가 멀다하고 굉음을 내며 달리는 전동차 밑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흔한 방음벽조차 없다. 그러나 상인들이나 주민들이 철도를 지하화 하자거나 이전하라는 요구는 없거니와 이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도 보지 못했다. 도쿄도 수송분담률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철도는 오래전부터 도쿄 시민들 삶의 일부분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바른미래당 안철수 후보는 서울개벽이란 이름의 공약을 내세웠다. 그 중 핵심은 서울시내 철도 지상구간 6개 노선 57㎞를 지하화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는 엄청난 비용부담은 민자를 유치해 해결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안철수는 한때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인으로 상징 됐다. 스스로도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갈 지도자라 칭했다. 그러나 시장 후보로 나서 발표한 철도 지하화 공약은 철지난 개발독재 시대의 논리를 개벽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청소년기를 경인선 주변 도시를 전전하며 지냈다. 1974년 서울지하철1호선이 개통되고 경인선 전철화로 인천까지 전철이 다니게 되었을 때 경인선 주변의 풍광은 주로 논밭이었다. 중동, 송내, 백운 주변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 것은 경인선을 따라 꾸준히 인구가 유입되고 신도시가 들어선 덕분이다. 철도 연변을 따라 도시가 확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같은 철도를 혐오시설로 치부하거나 지역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규정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만약 철도 지하화가 시도 되고 그 위를 지역 발전을 위한 개발구역으로 지정한다면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하철 시공과 개발구역 건설권을 따낸 건설사들과 부동산 개발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이다. 사업관련 인·허가권을 행사하며 떡고물을 챙기는 이들이다. 안철수 후보는 막대한 개발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민자유치를 대안으로 내놨다.
지금 한국에서 필요한 것은 그동안 재벌 퍼주기로 진행된 민자사업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지 민자사업을 한없이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엉터리 수요예측과 민간사업자의 도 넘은 이익추구, 관련 지자체의 이권 결탁 등으로 민자사업의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전가되어 왔다. 국제사법분쟁까지 치달으며 지차체를 말아먹은 경전철 사례도 있다. 높은 통행료로 서민들 주머니를 털고 있다고 비판 받아온 게 민자사업이다.
민자유치를 통한 경인선 지하화는 정치인들의 단골 공약이었다. 지방선거를 앞둔 2014년 2월 24일에는 부천역 남부광장에서 '경인선 지하화를 위한 100만 시민 서명운동'선포식이 열렸다. 경인선 주변 자치단체장과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이 앞장섰다. 현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의원들도 적극 참여했다. 이후 경인선 지하화 사업은 경인지역 정치인들의 숙원사업이 되어 있다.
경인선 지하화는 여러 가지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개발 붐을 일으켜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킨다는 명목이다. 한국사회가 언제까지 개발이익을 나눠먹고 그 결과를 정치적 업적으로 치장하는 사회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경인선 전철이 땅속으로 들어가고 그 위에 연트럴 파크를 닮은 공원과 고층 빌딩과 아파트 단지, 상업시설이 유입되면 경인지역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삶의 질이 개선될까?
도시를 재생시킨 다는 것이 당장 무엇인가를 부수고 개발지역을 확보해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어 부동산 특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투자가치로 치환시키는 개발논리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지역 낙후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장기적 전망을 토대로 철도와 지역의 상생을 모색 하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경인선은 1899년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 노선이다. 119년을 달리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유산이다. 수많은 서민들의 발이었던 철도를 혐오시설로 규정하고 뽑아내야 할 낡은 전봇대로 규정하기에는 이 길이 담고 있는 역사와 사연들이 아련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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