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2월 19일, 점심도 건너뛰면서 진행한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간단히 끼니나 때우려고 컵라면에 물을 붓고 익기를 기다리면서 연구실 PC를 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띄웠는데 완전히 메가톤급 뉴스가 떠 있다. 단 한 줄 - '북한, 김정일 위원장 사망'. 그리고 이틀 전인 12월 17일 아침 8시 반경에 열차 안에서 심근경색증으로 돌연 "서거"했다는 북한 방송을 인용한 보도들이 매체별로 천편일률적으로 주욱 떠 있다. 토씨 하나 차이나지 않았다. 중앙일간지든 인터넷 신문이든.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이 일주일동안 대한민국과 북한의 언론망에는, 참으로 역설적으로, '죽은 사람' 즉 김정일 혼자만 살아있었다. 김 위원장의 죽음 직전에 체결됐다는 미-북 식량지원 합의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국체에 정면으로 도전한 선관위 디도스 공격도, 한미FTA 졸속 처리 후유증도 .... 모두 모두 증발하고는 남북한 공히 금수산 궁전의 유리관 안에 '전시'된 한 시신의 그림자 안에 가려졌다.
이 그림자 안에서 대한민국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좀 희미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불안스러워했던 것인데 세 가지가 그랬다.
그 첫 번째. 2011년 연말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에 중요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것.
대통령까지 나서서 우리뿐만 아니라 우방국의 어떤 나라도 김 위원장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국정원장을 감싼다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북한은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이고 바로 붙어있지 않은가. 그런데 국정원을 비롯해 외교부나 통일부, 그리고 국방부 같은 우리나라 대북관련 기관들은 북한 언론에서 사전에 예고한 17일 당일의 "특별방송"이라는 어휘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래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정부 부처는 이날 북한이 정오 '특별방송'을 예고했을 때까지만 해도 북핵 6자 회담과 관련된 입장 표명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기자들과 북한 TV를 모니터하던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정오에 북한 아나운서가 검은 옷을 입고 나오자 얼굴이 사색이 돼 곧바로 장관실로 직행했다." (<국민일보>, 2011. 12. 19.)
그런데 "21일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일본의 정보기구인 내각정보조사실은 19일 오전 북한이 1994년 김일성 사망 이래 처음으로 '특별방송'을 할 것임을 총리실에 보고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사실이 곧 공표될 것임을 암시했다. 통신은 내각정보조사실 관리가 당일 오전 10시8분 총리실 및 관계부처에 북한이 낮 12시부터 특별방송을 할 것임을 알렸다면서, 특히 당일 오전 10시39분에는 북한이 이전에 내보냈던 특별방송의 내용 리스트를 총리실에 전달하며 김 위원장의 신변 이상 가능성을 예고했다." (<세계일보>, 2011. 12. 21.)
그래, 북한 내부의 소식을 전해줄 이른바 인적정보망, 즉 '휴민트'가 없다는 것만 너나없이 면죄부처럼 되뇌고 있는데, 24시간 모니터로 국정원 컴퓨터에 전량 저장되어 있을 북한 방송의 보도 목록 가운데서 '특별방송'을 키워드로 간단하게 검색만 하면 짐작할 수 있었을 일이다. 일본 내각정보조사실에서는 '특별방송'이라는 어휘 하나에도 신경을 뻗쳤는데, 우리 국정원 안에서는 키보드에 손가락 하나 건드릴 생각을 못했다니. 그 먹통 정보 감각, 해석 둔감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두 번째. 그리고 설사 북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북한에 대해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기본적으로 MB 정권은 예전의 역대 민주 정권들이 대북정책에서 쌓아놓은 모든 공덕을 모조리 무너뜨린 대신 그런 포기를 상쇄하는 전략전술적 이점은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다. 애초 북한에 대해 실용주의적으로 나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MB정권은 우리나라의 해결능력을 넘어서는 북핵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철저하게 대결정책으로 일관하여 사실상 북한에 도발의 구실만 제공하고 바다와 땅에 걸친 남북접경지대를 국지적 분쟁지역으로 만들 수도 있는 실책만 누적시켜 왔다. MB 정권은 북한 정권의 "독재적" 성격과 북한 사회의 "폐쇄적" 성격이 어느 수준, 어떤 양상으로 작동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북한을 움직일 지렛대는 하나도 확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누차 보여주었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라는 초미의 사태에 대해 기껏 하는 일이란 초상난 집을 상대로 비상경보를 발동하거나 조문가려는 우리 식구들을 겁주기에 바쁘다.
그리고 세 번째. 이렇게 알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상대임에도 대한민국은 북한에서 하다못해 쥐새끼 한 마리가 도망가도 그로부터 오는 영향을 실시간대에 즉각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렇게 부담스러운 북한이면 아예 없는 셈치고 외면하고 살 수 있으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북한은 물론이고, 북한을 지렛대로 하여 주변의 4대 강국은 대한민국이 북한을 도외시 하고 그냥 두 다리 뻗고 지내게 가만히 내버려 두었는가? 미국은 북한과 협상하여 돈 쓸 일만 생기면 한국에 그 부담을 떠넘긴다. 일본은 한국에 압박을 가할 일만 있으면 북한 카드를 흔든다. 러시아는 한국이 북한에 경제적 이득을 취할 여지가 있으면 사정없이 끼어든다. 중국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쯤 되면 입에서 푸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무슨 북(北)바라기인가? 북쪽이 뭘 하는가 바라보기만 하고 있으니. 무슨 나라가 어찌 이렇게도 할 게 없지?' 우리는 과연 통상 규모 1조억 달러의 거대 통상국가라는 경제적 위상에 상응하는, 대북관계의 정치적 능력과 권위를 국내외에서 확보하고 있는가?
정치는 단독 플레이가 아니며, 대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해서 효과가 있기만 한 것도 아니다. 현재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의 모든 무능력과 무기력의 원인은 북한을 대한민국 국가 정치의 진지한 '상대'로 마주하도록 하지 못함으로써 '대북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대북 소통정치를 하지 않으니, 이렇게 국가가 공백으로 남긴 것을 메우기 위해 결국 시민단체나 야당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상난 집이 평소 적대하던 우리를 상대로 경보를 발휘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집에 송장은 놔두고 장례보다는 전쟁이나 하겠다고 총부리를 울러멜 상가집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장례식이나 끝나고 발휘해도 늦지 않았을 경보는 왜 또 괜시리 발휘했다가 장례도 안 끝났는데 5일만에 해제할 닭머리 짓은 애초에 왜 하는가? 도무지 대북 문제만 뜨면 상식은 온통 마비된다.
차라리 국가나 정부 차원에서 통큰 조문에 나서라. 그러면 너도나도 조문하겠다는 우리 안의 갈등도 잠재워지고 나아가 북한을 소통 상대로 만들 기회도 생길 것이다. 그러면 뒷구멍에서 돈이나 찔러주며 통사정 하지 않더라도 금강산 피격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핵문제에 대해서도 허심탄회 얘기할 날이 올 것이다.
곤란한 상대를 가까이 하면서 그 상대를 변화시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와 가까워지지 않으면, 그런 상대를 변화시키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과 어려운 일 가운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분별력이 지금처럼 아쉬운 적이 없다.
조문 국면을 대북 정치 복원의 새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 ― 이것이 지금 우리가 철저하게 각성해야 할 대북정치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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