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사측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한뎃잠을 자면서 농성을 벌였다. 천신만고 끝에 1,2심에서 승소했다. 복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힌 것이다. 희망의 끈이 사라지자 한 동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동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로부터 3년 뒤, 함께 싸우던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 대법원 판결이 사법부와 행정부의 부적절한 거래 대상에 올라와 있었다.
KTX 해고 노동자들은 다시 노숙 농성에 들어갔다. 이미 사측과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 이들은 이제 사법부를 상대로도 투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29일엔 사상 처음으로 대법정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25일 내놓은 조사결과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치 민원을 요청하며 청와대에 '제물'로 내놓은 사안은 KTX 해고 무효 소송뿐만이 아니다. △과거사 국가배상권 소멸시효 3년 제한, △민주화보상금 등 수령자의 국가배상권 부정, △진실규명 신청하지 않은 과거사 피해자의 국가배상권 부정, △이석기 전 의원 등 내란선동죄 유죄, △키코 통화옵션계약 불공정 행위 불인정, △쌍용차 정리해고 파기환송 판결, △전교조 법외노조 판단 등 십수 건에 이른다. '사법 농단'이라 할 수준이다.
'사법 농단' 피해자들은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김승하 KTX 열차승무지부 지부장은 "'뒷거래 판결'을 부당하다고 외칠 수도 없는 제 친구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조작된 판결임이 드러난 만큼 책임이 있는 사람들 모두 처벌하도록 하고 모든 것을 되돌려놓을 수 있는 보상을 꼭 받아내겠다"고 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지난 2014년 최악의 판결로 쌍용차 해고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꼽은 바 있다"며 "판결 이후 네 명의 동료와 가족을 떠나보냈다. 총 29명째"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하는 법원이 작태를 보고 노동자뿐 아니라 국민이 실망과 분노하고 있다"며 "진실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해자들은 공동 성명을 내 "이러한 사법부를 믿고 그저 눈물을 삼켰던 우리는 이번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며 "국정농단 세력을 몰아낸 국민들의 힘으로 이제 사법 농단세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정의와 상식에 기초한 사법부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김명수 대법원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사법 농단 세력 모두를 고발 또는 수사의뢰 조치하고 검찰 수사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협조하라"며 "나아가 조사보고서에 인용된 모든 문건을 공개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법 농단이 불가능하도록 제도적인 재발방지대책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피해자들은 아울러 다음 달 5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검찰에 고소, 고발하기로 했다. 이날 법원노조도 조합원 3453명의 서명을 받아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30일 현재까지 검찰에 접수된 고발 건수는 10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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