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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35년 전 고문 트라우마, 판사가 어루만졌다

'간첩 조작 수사관' 고병천, 징역 1년 실형 판결

"피고인 등이 저지른 가혹행위는 피해자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안긴 만행에 가까운 행위로,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행위임에도 피고인은 그런 행위를 관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고인 논리대로라면 가족 중 누군가가 그런 행위를 당하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과연 피고인의 가족에게 고문이 가해졌을 경우 피고인이 지금 같은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재일 교포 간첩 조작 사건'에 가담한 고병천 전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수사관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이성은 판사가 내린 판결 내용은 고문 범죄 행위자에 대한 단죄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 씨로부터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언급하며 피해자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졌다.

<고병천 재판 기사>

① "고문 안 했다" 간첩 조작 수사관, 뻔뻔함 언제까지?

② 34년 만에 법정서 '간첩 조작' 잘못 시인한 수사관

③ 허공에 내뱉은 사과, 판사는 그를 법정 구속했다

④ "법원이 자격이 있나" 판사는 눈물을 흘렸다


2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서관 501호에서 열린 선고공판. 재판 시작 한참 전부터 방청석이 가득 찼다. 고 씨로부터 직접 고문을 당한 윤정헌 씨, 이종수 씨뿐 아니라 다른 보안사 고문 피해자 김장호 씨, 학원 침투 사건 피해자 강종건 씨, 삼척 고정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태룡 씨 등이 들뜬 얼굴로 선고 순간을 기다렸다.

지난달 30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 판사는 눈물을 흘리며 "법원에 이 사건을 믿고 맡겨준 데 대해 감사하다"며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결론을 내보겠다"고 말했다.


구치소 수감 중인 고 씨는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풀색 수의를 입고 등장했다.

1980년대 보안사 대공처 수사 2계 소속 수사관이었던 고 씨는 재일 교포 유학생인 이종수 씨, 윤정헌 씨를 각각 1982년, 1984년 불법 연행한 뒤 간첩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철제 의자에 앉혀 몽둥이로 때리기', '물 적신 수건으로 코 덮고 물 붓기', '엘리베이터 고문' 등 가혹행위를 했다.

이후 고 씨는 2010년 피해자 윤 씨가 신청한 재심 사건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윤정헌에게 구타나 협박을 한 사실이 없다', '이종수에게도 구금,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증언해 위증죄로 기소돼 지난해 말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고 씨는 재판 과정에서 범죄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국가안보를 최우선하던 특수한 사회상황 때문에 대공 수사기관에서는 가혹행위 같은 불법수사가 관행이었다는 점, △일개 수사관으로서 그런 관행을 혼자 바로잡는 게 불가능했다는 점, △개인적 영달을 추구하거나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점,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 조직과 동료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한 점 등을 이유로 선처를 호소해왔다.

노환으로 청력 기능이 약해진 고 씨는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기 시작하자 한쪽 귀를 마이크에 갖다 댔다.

이 판사는 고 씨가 지금까지 제기한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했다. 우선 "보안사는 민간인에 대해 수사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수사관이 민간인에 대해 수사를 개시한 것 자체가 위법이기 때문에 당시 안보 상황이나 수사 관행이 어땠는지는 가혹행위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개인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선 △간첩 검거에 따른 공적이 모두 공작과에 돌아가는 게 못마땅해 업무 범위를 확대해 경쟁적으로 발굴 작업에 나섰던 점, △당시 수사 2계에서 두 번째로 계급이 높은 사람으로서 간첩 검거 및 작업을 주도한 공적을 인정받아 포상을 받은 적이 있는 점 등을 언급했다.

이어 위증 행위에 대해 "다른 수사관들처럼 처음부터 소환 통지에 불응하거나 증언 거부권 행사 등으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음에도 굳이 출석해 기억에 반하는 진술함으로써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심리를 방해하고 국가 사법 기능을 침해했다"며 "간첩으로 만들었던 당시 수사에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는 보안사 수사관들의 입장을 적극 관철시키는 한편 당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를 은폐, 축소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문할 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이 판사는 고 씨가 했던 가혹행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안긴 만행"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관행으로 규정함으로써 본인에게는 그다지 책임이 없다거나 지금에 와서 달리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은연중에 표출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가족에게 고문이 가해졌을 경우 피고인이 지금 같은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면서 "노환으로 인해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가족들이 피고인의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사정도 주장하지만, 고문 피해자들의 생명 신체에 가할 당시 그들에게도 그들을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피고인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 판사는 "이 사건은 자백이 적용돼 징역 1월부터 10월까지 선고할 수 있는 사건이나 양형기준의 상향을 상회하는 형을 선고하겠다"며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지난 선고공판에서 검사가 구형한 그대로였다.

30~40년 전, 죄 없는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고 씨는 결국 인생 말년에 죄인 신세가 되었다. 고 씨는 고개를 떨궜다. 반면 윤 씨와 이 씨를 비롯한 고문 피해자들은 밝은 낯빛으로 법정을 나섰다.

▲28일 고병천 사건 선고공판이 끝난 뒤 소감을 말하는 피해자 윤정헌 씨(왼쪽에서 두 번째). ⓒ프레시안(서어리)

"가해자들, 스스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고문 피해자들은 이날 판결에 대해 "피해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어 고맙다"고 입을 모았다.

윤 씨는 "구금 당시 의대생으로서 나 스스로 진단해볼 때 트라우마가 없다고 봤는데, 지난 재판 때 같은 공간에서 가해자인 고병천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때 마음 속 깊이 큰 상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판사가 우리 입장을 이해하시고 최대한으로 고려해서 판결하신 것 같다. 좋은 판사님을 만났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씨는 "아주 복잡한 심경이지만 원래 고병천이란 사람은 보안사 수사관 중에서도 아주 악질이었다. 결국 잔머리에 스스로 넘어간 것"이라며 이날 판결에 대해 흡족한 마음을 드러냈다.

매번 재판에 참관했던 '학원 침투 간첩 사건' 피해자 강종건 씨는 "판사님이 이 시대에서 사회적인 역할을, 보답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속 시원하고 기분이 좋다"며 "다시 이러한 암울한 시대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굳건한 고문 추방 기회를 이때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변호인들은 판결 내용은 환영하면서도 검찰 태도에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고소인인 윤 씨 측 대리인을 맡은 신윤경 변호사는 "이 사건이 모해위증죄 성격이 있는데도 단순 위증으로만 공소장을 썼다"며 "모해위증이 적용됐다면 구형량이 더 높았을 텐데 검찰이 사실상 방해한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장경욱 변호사는 "대한민국에서 고문 피해자들이 재판을 거치면서 트라우마가 치유되기보단 가해자와 다름없는 듯한 태도로 인해 2차, 3차 피해를 입는다"며 "이제야 고문 피해자와 가족이 트라우마 씻을 수 있게 된 점에서 이성은 판사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이 판결을 계기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능욕하는 일 없어야 하고 여전히 과거를 합리화하기 바쁜 가해자들이 존재한다면 공소시효의 틈바구니 속에 숨을 게 아니라 스스로 피해자들 앞에서 사과해서 스스로 참회받고 인생을 마감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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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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