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게 보아왔던 느낌 그대로였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이후 지나치게 최저생계비 기준에 집중된 각종 급여와 서비스, 종류만 많고 서로 파편적이고 분절적인 고용지원 정책과 복지제도 등 현 우리나라 복지제도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매우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맞춤형 급여체계, 통합 고용서비스, 사각지대 해소, 지역단위의 통합형 전달체계 등 기본적인 개혁 방향은 동의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그 내용 역시도 구체적인 제도와 주요 대상 집단별 효과까지도 고려되어 꽤 구체적이었다.
물론 이 정책 세미나에서 제시된 정책 대안들이 만족스러웠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문제의 진단과 해결 방향이 수긍할 만하였다 하더라도 그 해법은 점진주의적인 것에 머물러 일상적이고 심각한 위협으로 몰리고 있는 대부분의 삶의 문제에 비하면 전혀 충분치 못한 것이었다.
▲지난 달 초에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로 꼽히고 있는 박근혜 의원 주최로 고용복지 정책 세미나가 개최되었었다. ⓒ연합뉴스 |
그간 복지이슈는 진보의 전유물처럼 여겨왔다. 무상급식을 시작으로 복지를 정치쟁점으로 떠오르게 한 장본인도 진보진영이거니와 예전부터 국민복지기본선운동부터 시작하여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복지의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터였다. 지금도 '보편적 복지'라는 구호 아래 복지정치에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복지를 위해 무엇이 얼마만큼 준비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이 말이 무색해 진다. "역동적 복지국가", "사회연대 복지국가", "보편적 복지국가"와 같은 추상적인 담론 논의 아니면 의료, 교육, 주거 등 일부 분야에 따라 분절화된 정책 과제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희망제작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한겨레 사회정책연구소 등 한참 싱크탱크 설립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내용을 연구자나 전문가에 개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진단과 이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안 아직 사회적 대안과 정책을 체계적으로 엮어 비전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복지에 대한 토론회, 세미나, 학술대회, 포럼들이 연이어 개최되고 있으나 이미 몇 번만 참석해보면 익히 익숙한 이름들이 토론자와 발제자의 자리바꿈을 했을 뿐이고 그에 따른 논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제자리를 맴도는 모습에 대해 혹자는 자원이 부족한 탓을 돌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을 얼마만큼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인식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 같은 모습은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민주화 운동의 관성'에 기인한다.
근 몇 십 년 동안 우리사회 진보를 지배했던 의제는 '민주화'였고, 이 의제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쪽이 절대적인 명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구도는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 못한 반민주세력과 가지고 있는 민주세력으로 피아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정치적인 민주적 권력의 쟁취가 핵심을 차지한다.
하지만 '복지'는 그러한 성격의 의제가 전혀 아니다. 서구 사회복지의 기원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서 보수 세력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현대 복지국가의 성립 역시 진보와 보수가 새로운 사회모델로서 합의하면서 이루어지고 발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복지가 어느 특정한 정치세력의 절대적인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사고는 커다란 착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8, 90년대까지는 민주화에 대한 정치적 욕구가 강하게 표출되어 온 것이지만 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양극화, 실업, 고령화 등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욕구에 대응하지 못한 민주화 정부에 실망하고 경제적 욕구만이라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었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과 같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욕구에 대응하는데 역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또다시 정권이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욕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역시 마찬가지 운명은 피할 수 없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누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민주화에도, 경제성장의 신화에도 절망했던 국민들이 '사회복지'라는 의제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복지를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복지를 여전히 민주화 의제처럼 명분으로 사고하는 모습에 자주 놀라게 된다. 정치인이나 활동가가 아닌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복지의 실현을 위해 문제부터 보다 깊게 이해하고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대안을 구축해나가는 것 보다는 정치적 세규합이 언제나 우선이다. 사회 문제 진단은 신자유주의 타령으로 간단히 요약되고 복지에 대한 비전은 '보편적 복지'라는 추상적 구호아래 개별적인 전문가들이 예전부터 제기해 왔던 정책 과제를 모아놓으면 완성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권이 바뀐다 한들 식자들이야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한다 할지 몰라도,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문스럽다. 또다시 로드맵만 5년 내내 만들다가 실망과 절망을 낳고 또 다른 회귀로 귀결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일 듯싶다.
정말 '복지'의 실현이 진짜 목적이라면 복지국가 성립 이미 반세기 전에 그 당시의 사회문제와 빈곤을 이해하기 위해 현장의 사회조사부터 시작했던 페이비언처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총체적인 사회진단과 그에 기반을 둔 체계적 대안전략을 도출하기 위해 과감하게 틀을 깨고 전국적인 논의를 이끌었던 신노동당의 사회정의위원회 정도의 작업은 구상되어야 하지 않을까?
개별적 수준이 아닌, 집합적이고 조직적인 투자와 체계적인 작업 없이 과연 97년 이후 점차 전면화 되고 있는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와 그 속에서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해 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서 그에 상응하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이를 위한 전략들이 구체적으로 수립될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도 없이 보수의 복지는 가짜복지이고, 진보는 다르다고 아무리 강변해 봐야 결국 내용적으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직까지 이런 것들이 서구의 논의와 사례만 뒤적여도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복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다. 우리 땅의 우리 문제에서부터 튼튼하게 논의를 구축해가는 장정에 나서기 보다는 바깥의 저명 학자로부터 손쉽게 답을 따올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것이 기초적 논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시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현실속의 사람들에겐 공허한 말들일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 내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남의 복지는 가짜복지고 모호하다고 비판해봐야 부메랑일 뿐이다. 결국 '진짜 복지'를 자처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이런 소리나 들을지 모른다. "복지는 명분이 아니고 해법이야,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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