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델이 지은 3층집 1층에는 '물질생활'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요. '물질문명'이라고도 부릅니다. 아주 오래도록 호모사피엔스가 살아온 방식인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사용가치' 중심으로 구성된 세상입니다. 1층이 없는 2층, 3층은 상상할 수조차 없겠지요. 헤이즐 헨더슨은 경제를 크림 케이크로 묘사했지요. '경제 케이크'를 자르면, 여러 층이 있는데 위층에는 돈으로 계산되는 경제가, 아래층에는 아주 큰 비거래적 비화폐경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브로델 3층집의 1층과 2층에 걸쳐 살고 있는 자연부문과 호혜경제의 영역입니다.
'교환가치의 문지방' 계단을 지나 경제가 시작되는데, 브로델은 이 지점에서 '숙명적인'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사회를 이뤄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교환이 있지요. 그래서 브로델은 '시장'은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의 사회생활과 함께 존재했다고 합니다. 시장은 사회 속에서 제도적으로 약속된 장치입니다. '상도'라고도 하죠.
그러면 1층의 물질생활과 2층의 경제생활(≒시장경제) 위 3층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요? 그 주인공은 '자본주의'입니다. 브로델은 3층 입주자를 '경쟁과 규범'이 있는 시장이 아니라 '독점과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반시장(反市場)이라고 부릅니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끼어들어 그 거리를 벌려놓고 양쪽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3층이 아니라 2층에 입주해 있습니다. 2층집은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속이 훤히 보입니다. 경쟁과 규범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3층에는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독점이 살고 있습니다. 3층은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홍기빈 옮김, 길 펴냄)에서 '악마의 맷돌'이라고 표현한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현란한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그래프가 자주 보입니다. 한결같이 '여기에 투자하면 돈 된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규제'는 시장이 싫어한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참 거슬리는 말입니다.
시장은 실체가 없습니다. '싫어한다'는 감정적인 표현을 할 수 없지요. 싫어하는 주체는 사람이고, 그 시장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입니다. 정보와 자금을 동원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 말입니다. 사회적 필요, 즉 공공성에 기초한 규제조차 '시장'이 싫어한다고 몰아 부칩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면 '시장'을 부정하는 자, 곧 이 사회에 살 수 없는 자로 낙인찍죠. 안될 일입니다.
굳이 헨리 조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저성장·고령화 미래사회'를 위해서는 집권당대표가 국회연설에서 제기했던 '지대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 같은 GDP 총액에 육박하는 가계부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도 부동산불패신화를 걷어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건물주입니다. '조물주보다 높은 게 건물주'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른들은 어른 자격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도 없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것이 상식인 세상이어야 합니다. 포용적 사회경제로의 대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그 많던 경제민주화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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