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출근 시간이 다가온다. 밤낮이 바뀌고 나서는 아이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도, 함께 외출을 할 여유도 없다. 하지만 야간 근무를 하지 말라고 회사에서 지시를 한다면 그것 역시 낭패다.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 바로 야간 근무 수당 때문이다. 급여가 워낙 낮아, 야간 근무 수당 20만 원은 매우 큰 금액이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모르는 비정규직은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벌어야 한다. 몸이 어떻게 병들어가고 있는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민간서비스노동조합연맹 정민정 여성국장)
한밤에도 밝은 대형 할인점, 아침이 와도 쉽사리 잠들 수 없는 여성 노동자들. 연간 200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자랑하는 '속도 사회' 대한민국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 급기야 장시간 노동과 야간·교대 근무가 유방암 발병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24시간 속도 사회'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고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여성환경연대가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마련한 토론회에서는 유방암의 환경 요인, 성장 만능·속도 사회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고갔다.
▲ 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속도 사회와 유방암'이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여성환경연대 주최로 열렸다. ⓒ프레시안 |
"유방암이 직업병?…야간 근무, 유방암 발병 위험 높인다"
10월은 '세계 유방암 예방의 달'이라지만, 개인에게 유방암 조기 검진을 강조하는 '핑크 리본 캠페인'만이 진행될 뿐, 정작 유방암의 환경적 요인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이 공론화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최근 덴마크에서는 항공사 승무원의 유방암을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판례가 나왔다. 20~30년간 일주일에 최소 1일 정도 야간 근무를 했던 승무원들의 유방암 발병에, 야간 근무에서 노출된 인공 조명이 영향을 줬다고 인정한 것이다.
앞서 2000년 스칸디나비아에서 유전자가 같은 쌍둥이를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방암의 위험 인자 중 유전적 요인은 27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73퍼센트가 환경적 요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토론회에서 인하대학교 임종한(산업의학과) 교수는 "야간 근무와 교대 근무는 신체 호르몬 분비를 교란시켜 암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 교수에 따르면 우리 신체에서 암, 당뇨 등을 예방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주로 야간 수면 시에 분비되는데, 야간 근무나 교대 근무를 하게 되면 이 호르몬이 부족해 유방암 발생률이 높아진다.
임 교수는 또 "특히 유방암 발병률이 다른 암에 견줘 교대 근무나 과로 시에 유의미하게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고 설명했다.
'낮보다 밝은' 대형 할인점의 밤…잠들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
▲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할인점들은 손님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할지 몰라도, 이곳에서 밤새 일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고된 직장일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한인임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총 노동 시간이 가장 긴 나라이며, 2위인 그리스와의 격차도 크다"며 "지난 수십 년간 경제 발전은 지속돼 왔지만 노동자들의 과로 노동은 그만큼 유지·강화돼 왔다. OECD 최고의 산재사망률과 지난 10여 년간 줄지 않는 재해율은 바로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정민정 민간서비스노동조합연맹 여성국장 역시 백화점·할인점 등 대형 유통업체의 야간 영업 및 연중무휴 영업 사례를 소개하며 "소비자의 편의라는 명목 아래 늘어나는 24시간 영업은 야간·교대 근무로 인한 여성 노동자의 건강 악화 뿐 아니라, 영세 상인들의 생존권을 침해하고 에너지 과소비를 불러일으키는 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속도 사회' 패러다임부터 바꿔야"
이날 토론회 참가자들은 "사회 전체적으로 속도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이 영업 이익 확대를 위해 노동 시간을 늘리는 것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것이 아니라, 임금의 감소를 감수하고서라도 장시간 노동의 늪에서 빠져나와 한다는 것.
이에 대해 한 연구원은 "자고 일어나면 뛰는 집값, 아이들의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많은 대공장 노동자들이 서로 초과 근무 수당을 챙기기 위해 잔업·특근을 자처하는 일들이 빈번하다"며 "이는 노동자들을 '임금 노예'로 만드는 늪에 스스로 빠지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진행돼 왔던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일변도의 투쟁이 과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 장시간 노동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임금의 감소를 감수하고서라도 사회보장 시스템의 구축을 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민정 여성국장은 "서비스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장시간 노동 개선을 위해, 대형 유통업체의 '영업 시간 제한'과 '주 1회 정기 휴점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여성환경연대는 29일 대형 유통업체의 24시간 영업을 반대하는 '파자마 캠페인'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홈플러스 인근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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