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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거나, 혹은 탈출하거나"…벼랑 끝에 선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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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거나, 혹은 탈출하거나"…벼랑 끝에 선 이주노동자

국제 앰네스티,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는 '1회용품'" 지적

#사례1. 스리랑카 출신의 이주노동자 K(34)씨는 올 초 경남 진해의 선박 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중 150킬로그램의 철제 파이프에 깔려 발가락과 손가락에 골절상을 입었다.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사장은 12일 후 병원에 찾아와 "다시 일하러 나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며 협박을 했다. K씨는 "몸이 아파 서 있기 조차 너무나 힘들었지만, 사장은 나를 출입국관리소에 끌고 가 고용 비자를 취소시켜 버렸다"고 증언했다.

#사례2. 필리핀 여성 D(25)씨는 한국에 오기 전 가수로 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해 초 E6(예술흥행) 비자로 입국했다. 그러나 매니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동두천의 클럽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주스 걸', '드링킹 걸'이라 불리며 미군에게 성 접대를 해야 했다. D씨는 "매니저가 나를 한국에 데려오는데 5만 페소, 약 950 달러를 썼다고 했다. 그래서 나한테 월급을 전부 주는 것이 아니라 첫 월급은 몽땅 매니저가 가져갔고, 그 다음부터는 월급의 60퍼센트를 가져갔다. 그 빚을 갚는데 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 국제 앰네스티가 21일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실태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진은 노마 강 무이코 동아시아 담당 조사관. ⓒ프레시안

고용허가제가 시행된지 올해로 5년을 맞았지만, 한국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인권 침해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국제 인권단체의 진단이 나왔다. 국제 앰네스티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회용 노동자: 한국의 이주노동자 인권 상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해 2월부터 올해 9월까지 전국 11개 도시의 이주노동자 숙소, 외국인 보호소, 공장 등에서 약 6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작성됐다. 조사를 맡은 앰네스티 동아시아 담당 조사관 노마 강 무이코 씨는 "기존 산업연수생 제도 하에 존재했던 착취적 관행이 고용허가제에도 여전히 남아있다"며 "이주노동자들은 등록 여부에 상관없이 사업장에서의 차별과 신체적 폭력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장 변경 제한한 고용허가제…"참거나, 도망쳐 '불법 체류자'가 되거나"

2004년 고용허가제를 시행하며 아시아 최초로 이주노동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 '인권 국가' 대한민국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임금 체불, 강제 노동, 인신매매, 구타 등 심각한 사례들이 이날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무이코 조사관은 사업자 변경의 자유를 제한한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들을 '인권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의 3년 이상 체류를 금지하고 있는 현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은 최대 3회로 제한된다. 3년 이상 체류 시 사업주가 재고용 의사를 밝혀야 계속 일할 수 있다.

이렇듯 고용주가 이주노동자의 '생명 줄'을 쥐고 있다 보니, 이주노동자들은 사장의 폭력이나 임금 체불 등의 부당한 대우에도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 K씨의 사례처럼 일을 하다 다쳐도 산재 보상이나 치료는 커녕,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부터 해야 한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사업장에서 도망쳐 나온 이주노동자는 두 달 이내 재취업하지 못하면 체류 자격을 상실해 미등록 신분이 된다. 무이코 조사관은 "고용주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없이 인권 침해를 저지르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착취를 참아가며 등록 노동자로 남거나, 도망쳐 미등록 신분이 되는 두 가지 선택 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지촌으로 내몰린 이주 여성들…성관계 강요 받기도

▲ 예술흥행 비자로 입국한 이주 여성들이 고용된 동두천의 클럽 전경. ⓒ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E6(예술흥행) 비자로 입국한 이주 여성들에 대한 인신매매 및 성적 착취도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무이코 조사관은 "많은 이주 여성들이 가수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입국했지만 고용주나 매니저에게 인신매매돼 미군 기지촌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미군들에게 술 시중을 들거나 성 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받는 이 여성들은 고용주가 사업장 변경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업소에 계속 남아 있거나 도망쳐 '불법 체류자'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이 한국의 근로감독관이나 경찰에 의해 구제되는 사례는 별로 없다. 이주노동자 지원센터인 두레방을 운영하는 박수미 원장은 "근로감독관의 유일한 관심은 사업장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E6 비자로 들어온 여성들에게 성 착취나 인신매매가 있는지 별로 감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E6 비자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한국인이나 다른 비자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과는 달리 HIV(에이즈 바이러스) 검사를 의무화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정책적 차별 문제 역시 지적되고 있다.

무차별적 단속 과정…단속 중 이주노동자 구타로 숨지기도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 과정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 강도는 더욱 세지고 있다. 2008년에만 2만9000여 명이 체포·구금돼 2007년보다 50퍼센트 가까이 증가했다. 올해는 단속 강도가 더 높아져 1~5월에만 1만1800명이 체포·구금됐고 1만1300명이 강제 출국 됐다.

앰네스티는 이러한 단속 과정에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과도한 무력을 사용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9월 부천에서는 미얀마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체포된 이후 가슴 통증을 호소했지만,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아 구금된 지 13시간 만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마석에서는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체포된 필리핀 여성에게 공공 장소에서 소변을 보게 하고, 속옷 차림의 필리핀 여성 두 명의 머리채를 잡아 끈 사건도 있었다.

앰네스티 측은 "이주노동자들이 체류하는 지역 주민과 고용주들을 만나본 결과, 이들은 지역 상권이 죽는 것을 우려해 단속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며 "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지역 주민들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정부의 의견과 배치된다"고 밝혔다.

이날 앰네스티는 △고용주들에 대한 엄격한 근로 감독 실시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진정 기구 설립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과정에서 법적 보호 △이주노동조합 설립·가입 등 노동권 보장 △고용허가제 상 사업장 이동 횟수 제한 폐지 등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한편, 노동부는 이날 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대해 보도 자료를 내 "내국인 고용 기회의 보호를 위해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고 있다"며 "사업장 내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를 해소하기 위해 지도·감독과 지원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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