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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들의 침묵과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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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들의 침묵과 발언'

〈전태일통신 13〉한 교회 조직원의 고민

지난 1989년 8월,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즉각 모든 초, 중, 고등학교에서 조합에 가입한 교사들을 해고 조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각급 학교의 책임자들은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그 불순분자(?)들을 색출하여 목을 쳤다.

사방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디 한번 버텨보겠다던 부천 소명여고가 교사를 해고한 것이 같은 해 12월이었고, 다음 해인 1990년 2월에 전국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직권 면직된 사람이 전교조 설립에 핵심 인물이었던 인천 박문여고 국어교사 조용명이다.

그 때 재단 이사장인 천주교 인천교구장은 어떻게든 조용명을 살려보려고 겨울방학을 이용한 1개월 정직으로 징계를 대신하려 했으나 문교부 눈가림에 실패하여 폐교 조치까지 들먹이는 거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는 눈물을 머금고 해고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나는 교구사제평의회에서 이렇게 따져 물었다. "단지 전교조 가입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조용명을 해고한다는 것은 아무리 이 정부의 압력이 심하다 하더라도 천주교회로서는 양심상 못할 짓이 아니냐? 조용명을 끌어안고 있다가 학교가 문을 닫게 된다면 차라리 그 편을 택해야 한다. 그게 교회가 입만 열면 강조하는 순교정신 아닌가? 무고한 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학교를 유지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정신일까?"

내가 생각해도 어디 한군데 틀린 말이 없다. 그 때에 재단 이사였던 한 선배 사제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만 껌벅거리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난들 왜 학교를 책임 맡고 있던 이사들의 속타는 심정을 몰랐겠나? 솔직히 고백하자. 그 때 내가 책임자였다고 해도 그 엄청난 압력을 이겨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라면 더욱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런 힘든 사정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건 엄연한 불의다. 이해와 용납은 별개다.

우리 천주교회의 주교님들이 다른 사립학교의 이사장들과 함께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를 외치고 나섰다. 반대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헌법소원과 정권퇴진 운동, 심지어는 학교 폐쇄까지 고려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개정된 사학법이 종교학교의 설립목적 실현과 창의력 발휘에 결정적인 방해요소가 된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다.

과연 그런가? 개정된 사학법의 쟁점 사항은 이사 정원의 25%를 외부 인사에게 할당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학부모와 교사와 지역인사로 구성된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할당 이사 수의 2배수를 추천하면 이사회가 최종적으로 그 중에 반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나는 학교를 운영해보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투명한 학교운영을 위해서 25%의 외부이사는 절대 미흡한 수다. 그런데 그 25%가 이사장에게는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만큼 큰 장해물이 되는 걸까? 혹시 외부 사람이 알아서는 안되는 매우 중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거나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지금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겠다는 지나친 불안감의 표출이 아닐까?

한겨레신문이 실시한 설문조사 통계를 보면 응답자의 과반수가 개정된 사립학교법을 찬성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30%에 불과하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바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언제나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수의 이사회는 다수의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이 힘의 부당한 남용을 사전에 방지하자는 게 사학법 제정의 목적이다.

우리 주교님들의 주장은 명백히 학생과 학부모 위에 서 있는 재단이사장의 논리고, 조, 중, 동으로 대표되는 재벌 신문들의 논리며, 한나라당의 논리다. 그분들이 누구인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사제와 신자들이 곡기를 끊고 누워 있을 때도, 우리 군을 정의롭지 못한 전쟁의 용병으로 이라크에 보낼 때도, 요즘 소수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인권 문제가 새로운 이슈가 되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분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쩌자고 당신들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되는 사학법에 대해서는 한데 뭉쳐 목소리를 높이시는가? 15년 전에 '불순 교사' 조용명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결국은 그렇게 못했지만) 안간힘을 쓰던 그분들은 지금 다 어디에 계신가?

천주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비체이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자 거대한 국제 조직이다. 굳이 신학적인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한국 천주교 조직의 최고기관이다. 나는 이 조직의 말단 조직원이다. 여기에 말 못할 나의 고민이 있다. 아니,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내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는 나를 포함한 여러 동료, 선후배들의 아픔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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