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곳곳에서도 제주4.3항쟁 70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 당시 대략 3만여명의 제주도민들이 '빨갱이'라는 이념 낙인에 찍혀 국가폭력에 희생된 지 올해로 70년. 대구와 경북 일대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졌다. 성주군에서는 천도재도 진행됐다. 시민들은 붉은 동백꽃 배지와 빨간리본을 가슴에 달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분향소를 찾은 이들은 무명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헌화하며 다시 한 번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바랐다.
3일 대구경북진보연대·대구민예총·대구참여연대 등이 참여하는 '4.3항쟁70주년 대구행사위원회'는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민주광장에 시민분향소를 차렸다. 분향소는 오는 5일 저녁 8시까지 운영된다. 분향소 앞에는 제주4.3항쟁에 대한 미국과 국제연합(UN)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분향소는 대구, 포항, 구미에 올해 처음 차려졌다. 성주군에서는 원불교 성지에 주민들이 제주4.3희생자 영령을 위한 특별천도재를 진행했다. 전국 17개 시·도에 비슷한 분향소가 들어섰다.
특히 이날 대구 분향소에는 오후 1시 30분부터 5시간 가량 70여명의 시민들이 분향을 했다. 시민들은 4.3항쟁에 대한 설명이 적힌 간판을 읽기 위해 가던 길을 멈췄다. 일부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달았고 어떤 이들은 빨간리본에 추모 메시지를 적었다. '4.3민중항쟁 진상규명', '무고한 희생자에게 사과하라', '잊지 않겠습니다'. '역사에 정의를' 등의 문구가 리본에 적혔다.
'4.3항쟁 잊지않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리본에 쓴 대학생 정은영(23)씨는 "고등학생일 때 4.3을 처음 배웠고 최근에는 4.3 기행도 다녀왔다"며 "아직 많은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제대로된 역사 교육이 더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분향을 마친 중학생 이원지(14)씨는 "오늘 역사 선생님이 수업 시간 때 4.3을 가르쳐주셔서 처음 알았는데 시내에 분향소가 있어서 신기하다"면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오늘부터 아픈 역사에 대해 더 공부하겠다"고 했다.
대구행사위는 이날 오후 분향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3은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반통일·분단의 아픈 역사이자 냉전체제에서 빚어진 참극"이라며 "국가폭력 희생자들은 구제돼야 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4.3의 진실과 교훈을 올곧게 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4.3정신을 계승해 정의와 인권, 평화와 통일의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대구 시민들이 함께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 정권 당시 국가폭력으로 아버지를 잃은 채영희 대구10월항쟁유족회장, 박정희 정권 당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남편을 여읜 고(故) 도예종 열사의 부인 신동수씨가 참석했다.
한편, 대구민예총은 3일·10일 저녁 7시 대백 앞에서 '4월에는, 바람의 노래를 불러요'를 주제로 4.3 추모 거리공연을 한다. '오늘도무사히', '심상명', '마쌀리나', '전복들', '극렬', '라이브오' 등 인디 가수들이 무대에 선다. 오는 7일에는 시민 40여명이 평화버스를 타고 4.3 광화문 국민문화제에 참석한다.
제주4.3항쟁은 1947년 3월 1일 군중을 향한 경찰 발포로 시작해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6월까지 제주 전역에 걸쳐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남한 단독선거에 반발한 제주도민들을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무차별 진압했다. 제주4.3사건위원회(2001년)에 따르면 신원이 확인된 사망·행방불명자만 14,231명이다. 유족회는 제주도 전체 인구 10%가량인 3만명을 희생자로 추정한다. 50년 가까이 폭동·소요로 불리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당시 '제주4.3특별법'이 제정돼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으로 국가를 대표해 유족에게 사과했다.
프레시안=평화뉴스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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