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석 교장선생님은 저명한 여행가이자 여행작가이십니다. 스스로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라 하며 ‘걷기 달인’, ‘길의 탐미주의자’로 통합니다. 히말라야, 카라코람, 알프스, 백두대간 등 국내외 굵직한 트레일을 걸었으며, <서울신문>에 <진우석의 걷기 좋은 산길> 연재를 시작으로 국내외 ‘날 것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관광공사 ‘이 달의 걷기길’ 선정위원으로 있으며, 삼성 SERICEO‧여행작가학교 등에서 여행강사로 활동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에 걷는 <공주 공산성과 부여 부소산성>에 대해 들어봅니다.
공주 관문인 금강교 건너 공산성으로
공주의 관문 격인 금강교를 건너면서 비로소 공주에 입성한 걸 실감한다. 금강교는 공주의 살아 있는 역사다. 금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맞으면서 다리 중간쯤을 지나면 철교 구간이 나타난다. 금강교는 1933년 철교로 지어졌다. 폭 6.4m, 길이 51.3m의 규모로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경성과 목포를 잇는 구간 내에서 공주읍과 장기면을 연결했다. 6·25전쟁 때 다리의 2/3 정도가 파괴됐고 1952년에 복구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일반적인 다리와 철교 구간이 섞여 있다.
금서문주차장에서 불과 100m만 오르면 공산성 금서문에 올라선다. 금서문은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자리한다. 3칸 규모의 문루로 1993년에 복원했다. 공산성의 이름은 조선시대 때에 붙여졌고 백제 때에는 웅진성이라고 했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병력으로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해 금강이 흐르는 천혜의 지형인 공산에 지금의 공산성을 쌓았다. 당시에는 흙성이었고 지금 남아 있는 석축은 조선 중기에 새로 쌓은 것이다.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폭이 좁은 산성의 전체 길이는 2.2㎞쯤 된다. 길은 시계방향으로 성을 한 바퀴 돌아 원점 회귀한다.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공산성
금서루에서 이어진 성곽을 따르면 느티나무 노거수가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언덕 위에 자리한 공산정에 오르자 공주 시내와 금강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눈으로 성을 한 바퀴 더듬어 보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든다. 금강이 해자 역할을 하고, 성벽이 쌓인 곳은 제법 험준하다. 반면에 내부는 평평하고 부드럽다.
공산정을 나와 급경사를 내려가면 공북루에 닿는다. 공북루는 1603년에 옛 망북루터에 세운 2층 문루로 금강을 끼고 있다. 영은사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고 임류각에 다다른다. 웅장한 2층 누각인 임류각은 500년 동성왕 때 지어진 건물이다. 높이 15m의 2층 구조로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로 추정한다.
임류각 앞에는 비석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 명국삼장비. 명나라 장군인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들이 공주에서 왜군을 막았다 하여 세운 송덕비다. 임진왜란 때 공산성은 승병 훈련소였다. 여기서 훈련받은 승병들이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충청남도 금산 전투에 참여했다.
광복루를 지나면 토성 구간을 밟는다.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이 일품이다. 공산성의 정문 격인 진남루를 지나면 연못과 건물터가 남아 있는 왕궁터에 닿는다. 공산성은 새로운 백제를 열었지만, 백제의 멸망을 지켜보기도 했다. 660년 나당연합군 침공으로 사비가 함락되자 의자왕은 공산성으로 들어와 최후 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결국 항복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스스로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중국기록 <당서>에는 백제 장수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했다고 전한다.
왕궁터 위에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 임금과 관련이 있다. 원래 이 정자가 있던 자리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으로 공산성에 피해있던 인조는 이 나무에 기대 걱정을 했다. 그런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며 이 나무에 정3품의 작호를 내렸다. 그 후 나무가 죽자 영조 때 정자를 지어 그때 일을 기념하게 했다.
무령왕릉 출토 유적이 전시된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호무덤과 6호무덤 사이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이 발견으로 미궁과도 같았던 백제 문화의 참모습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 무덤의 주인이 적힌 묘지석, 왕과 왕비의 다양한 장신구 등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품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왕궁과 시가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 부소산성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이다. 북으로 금강을 두르고 있는 모양새가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이곳에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사비성)이 있다. 산성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쌓았다. 흙과 돌을 섞어 다진 산성은 2,2㎞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부소산성에 들어서면 먼저 삼충사(三忠祠)가 보인다. 백제 말의 3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이어 나타나는 영일루는 사비성의 동대(東臺)가 되는 영일대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 건물은 1964년에 홍산에 있던 홍산문루를 옮겨 지은 것이다. 그 아래쪽에 자리한 군창터는 백제 때에 군대 곡식창고였다. 이곳 땅 속에서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왔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는 사자루(泗疵樓)가 있다.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바로 아래쪽으로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백화정 아래 낙화암은 삼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천 궁녀 전설로 해서 낙화암(落花巖)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이곳의 본래 이름은 ‘타사암’(墮死巖)이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란 뜻이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고란초와 약수(고란정)가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백마강변의 고란사에서 우리의 백제여행도 마무리된다.
두발로학교가 4월 21일(토) 걷는 제64강 <공주 공산성과 부여 부소산성>의 구체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7:00 서울 출발(출발 시각 엄수합니다. 행락철이라 교통체증이 우려되고 중간탑승자의 불편도 고려하여 정시 출발하니 시간 꼭 지켜주세요^^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두발로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4강 여는 모임
-공주 금강교 앞 도착
-금강교~공산성 트레킹(약 4㎞. 2시간 30분 소요)
-점심식사 겸 뒤풀이
-국립공주박물관 관람
-부여로 이동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지오층석탑~부소산성~고란사(약 5㎞. 약 4시간 소요)
-서울로 출발
*현지 상황에 따라 일정과 코스가 축소‧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모자, 식수, 선글라스,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두발로학교'를 찾으시면 4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두발로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두발로학교를 여는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의 시대입니다. 여기저기 걷기 코스의 명소들이 생겨나고 <걷기 동호회>도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각 지자체들도 고유의 <길>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한동안 잊었던 <걷기의 가치>를 되살리고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즐거움과 건강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직립보행(直立步行) 이후 걷기를 멈춘 적은 없습니다. 최소한 집안이나 사무실에서도 걸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걷기가 새삼스럽게 각광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성경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이처럼 종교적 진리나 철학적 깨달음 같은 거창하지는 않지만, 길을 걸으면서 내면의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말했습니다. 걷기의 리듬은 사유의 리듬을 낳는다고 합니다. 경치를 구경하며 생각할 수 있고, 미지(未知)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레베카 솔닛의 저서 <걷기의 역사>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의사가 둘 있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말이다. 몸과 마음이 고장 날 때 나는 이 의사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장 경제적이고 신체에 부담이 적은 운동을 택한 것이 <걷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속도와 능률이 지배하는 세상에, 목적에 대한 부담을 덜고 걷기를 통해 느림의 미학으로서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사람마다 걷기를 통해 찾고자 하는 의미와 기쁨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 함께 찾으려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 <새로운 경관> <자연을 즐기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세 가지가 아닐까요.
<두발로학교>는 <아름다운 길 걷기> 전문학교입니다. <두발로학교>에서 세 마리 ‘토끼몰이’를 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