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반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4일, 이명박 대통령의 부재 중에도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로마법의 법언을 남기고 사퇴를 강행했다.
김 총장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해 A4 3장 분량으로 된 사퇴의 변을 낭독하고 사의를 밝혔다.
이에 대해 김황식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현지에 직접 나가 있는 상황에서 사표를 제출하는 것은 공직자로서 도리에 어긋난다"며 유감을 표명하고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수리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해주길 바란다"고 이 대통령 귀국 전까지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사태의 핵심은 '약속의 파기'다"
김 총장은 지난 주 열린 UN 세계검찰총장회의를 언급하면서 "나라를 대표해서 국제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에서 당시로서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서도 "(지난 28일) 법사위 수정 의결이 있었을 때 이미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사태는 대통령령이냐 법무부령이냐의 문제라기보다, 사태의 핵심은 '합의의 파기'에 있다"면서 "약속은 지켜져야 하고 일단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그대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장관들과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 중요 국가기관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최고 국가기관 내에서 한 합의, 그리고 문서에 서명까지 해서 국민에게 공개한 약속마저 안 지켜진다면 우리나라에서 과연 어떠한 합의와 약속이 지켜질 수 있겠냐?"면서 "대학에서 법을 배운 이후 검사 생활 30년 동안 변함없이 간직한 '법언'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반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정 집단을 지칭하지 않았지만 " 합의가 파기되면, 이를 어긴 쪽에 책임이 있지만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면서 "그렇다면 검찰총장인 저라도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지난 수사권 합의는 검찰이 큰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이 진정 사법경찰의 수사권을 원한다면, 먼저 자치 경찰, 주민경찰로 돌아가 시민의 통제를 받고, 사법경찰을 행정경찰에서 분리시켜 국민들에 대한 보호장치를 먼저 만든 후에야 논의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고 마지막까지 경찰을 견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 의결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크게 양보한 합의마저 파기된 현실이 원망스럽겠지만, 겸허한 자세로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사태의 확산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국회의 의결은 존중되어야 한다"며 향후 검찰의 조직적 행보를 만류하면서 "퇴임 전 검찰총장의 마지막 권한행사로 여러분들의 사직서와 사퇴의사를 모두 반려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세계검찰총장회의에 직접 오셔서 축하해 주셨고, 나라와 검찰을 생각해 주시고 검찰총장의 위상을 세워 주시려는 말씀까지 해 주셨다"면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특히 중대 국사를 위해 해외출장 중인 상태에서 부득이 이런 발표를 하게 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청와대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 총장은 "그러나 더 이상 때를 놓칠 수는 없었다"면서 "퇴임식은 동계올림픽 평창유치가 확정되는 기쁜 소식이 온 뒤에 잡아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명박과 김준규의 '팍타 순트 세르반다'
이날 김 총장은 청와대에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려 했고 또 "국회의 의결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다른 검찰 간부들의 사표를 모두 반려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 "경찰은 아직 자격이 없다"는 강경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김 총장이 이날 강조한 "Pacta Sunt Servanda"라는 발언은 공교롭게도 지난 2008년 8월 한국법률가 대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한 법언이기도 했다.
이날 김 총장의 발표를 앞두고 검찰 안팎에선 "이미 실기했다. 지금 총장이 사퇴하는 것은 부담만 가중될 뿐이다"는 주장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총장이 사태를 정리해야 한다"는 논리가 맞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총장은 자진 사퇴를 강행한 것. 이날 김 총장이 사퇴 의사를 표명한 대신 다른 간부들의 사표를 반려한 것은 조직을 추스르기 위한 현실적 판단이라는 해석이 뒤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행보는 철저히 검찰 내부 논리일 뿐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검찰총장-민정수석-법무장관 조합 어떻게 될까?
어쨌든 김 총장이 임기를 한 달 여 앞두고 사퇴를 함에 따라 이 대통령 임기 말 사정기관 인사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차기 검찰총장의 후임은 이 대통령 임기 만료를 넘어서는 2013년 8월까지다.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을 발탁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지만, 역풍이 거셀 수 도 있다.
현재 검찰 주변에선 연수원 13기인 차동민 서울고검장과 한상대 서울중앙지검장, 박용석 대검 차장 및 14기 노환균 대구고검장 등이 차기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애초 경북 상주 출신으로 대구 대건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노환균 고검장이 '따놓은 차기'로 지목받았지만 한명숙 전 총리 뇌물사건,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그랜저 검사 사건으로 인해 야권과 시민사회의 맹폭을 받은 이후 몸을 낮추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까닭에 차동민 고검장과 한상대 지검장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차기는 한상대 지검장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차동민 고검장은 경기 평택 출신으로 제물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한 이후 대검찰청 차장을 거쳐 올해 2월 서울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상대 지검장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서울고검장으로 있다가 올해 2월 이례적으로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됐다. 경북 군위 출신인 박용석 차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대검 중수부장, 부산지검장, 법무연수원장 등을 거쳐 올해 2월 대검 차장에 올랐다.
수도권 2명 대 TK 2명의 경쟁인 셈이다. 검찰총장 내정은 청와대 민정수석, 법무장관 인사와도 연동된다. 경북 출신인 권재진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을 옮길 경우, 수도권 출신이 검찰총장이 되고, TK 출신 중 한 명이 민정수석으로 임명될 수 있다는 '밑그림'도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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