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 등을 만드는 안산 반월공단 내 롯데캐논 공장. 여기에는 4개의 협력업체가 존재한다. 모두 롯데캐논과 도급계약을 맺은 업체다. 이 하청업체 중 유천산업 주식회사에 소속된 노동자 41명이 작년 12월 1일. 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원청인 롯데캐논이 자기 소속 업체와 도급계약을 체결했으나 실제 자신들의 업무는 롯데캐논 지휘명령 속에서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원청에 직접 고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이 진정서를 조사한 고용노동부 중부지방고용노동청안산지청은 지난 21일 이들의 원청인 롯데캐논에 41명을 모두 직접 고용하라고 시정지시했다. 한마디로 롯데캐논이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야기다.
더불어 노동부는 롯데캐논에 이들의 직고용 시한을 3월 30일로 못 박았다. 이때까지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노동자 1인당 1000만 원, 즉 4억1000만 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노동부에서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그만큼 롯데캐논이 노골적으로 불법파견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유천산업 소속 노동자 41명이 노동부에 낸 진정서를 보면 사내하도급업체 유천산업은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원청이 작성한 작업표준서에 따라 작업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모든 기계 설비는 원청인 롯데캐논에서 무상 제공한다. 한마디로 하청업체는 인력파견업체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다 보니 원청의 업무지시 등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원청 직원이 작업할 기종과 수량이 적힌 종이를 하청 노동자에게 전달한 뒤, 그대로 작업할 것을 지시했다. 일하다 원청 직원이 하청 직원에게 작업순서 및 수량 변경을 지시하면 이 역시 이행해야 했다.
롯데캐논은 하청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라인 근처 벽에 전광판을 설치해 놓기도 했다. 롯데캐논과 사내하청 업체들의 각 라인 반장 사진, 그리고 각 라인 목표수량과 현재 작업 수량이 실시간으로 전광판에 표시된다. 만약 목표수량에 달성하지 못하면 빨간색 불이 들어오고 목표를 달성하면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한마디로 각 라인 반장이 책임지고 그날 목표수량을 달성하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목표수량은 원청인 롯데캐논이 정했다.
집단해고 각오하고 진정서 넣으면 뭐하나
그렇게 노동부 직접고용 시정지시가 내려진 지 일주일이 지난 28일 밤, 롯데캐논 하청노동자에게 연락이 왔다. 푸념을 늘어놓았다. 롯데캐논이 직접고용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물어야 할 과태료가 고작 1인당 1000만 원이면, 직고용을 하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부에서 직고용하라고 하면, 이를 그대로 기업은 따라야 하는 게 아니냐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노동자가 현장에서 자료 조사를 하기란 매우 어렵다. 거기에 원청의 직접지시 사례를 찾는 건 더욱 어렵다. 설사 그런 증거를 모았다 해도 노동부에 진정을 넣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진정서를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된 원청에서 하청과 계약을 해지하면 노동자들은 대량해고 되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무릎 쓰고 진정을 넣는다 해도 노동부의 직고용 조사결과를 받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직고용 결과를 받아도 기업이 거부하면 직고용되기 어렵다니… 할 말이 없다."
기자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기업이 노동부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검찰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해줄 말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노동부가 이처럼 불법파견을 판단하고 시정조치를 내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증거 부족 때문이다. 원청이 직접 업무 지시 등을 했는지 여부를 따지려면 이에 대한 업무지시 증거 등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노동자가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부에 진정서를 넣으려 하면, 미리 낌새를 챈 기업은 증거를 숨기고 없애는 게 일반적이다.
그나마 이번에 진정서를 낸 노동자들은 지난 3년여 동안 불법파견 증거를 하나둘씩 모아왔던 게 유효했다.
물론, 이들처럼 오랫동안 증거를 수집해서 진정서를 낸다 해도 노동부에서 불법파견이라는 판단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간 보여준 노동부의 모습은 노동현장을 적극적으로 조사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이는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노골적이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노동부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12년 파건업체가 2087건에서 2016년 2515건으로 늘어나는 동안 파견법을 위반한 업체는 2012년에는 100곳, 2013년 92건, 2014년 41건, 2015년 41건, 2016년 151건밖에 되지 않았다.
사내하청은 원청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적은 적발 건수라 할 수 있다.
문상흠 안산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노무사는 "사내하청은 원청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이번 노동부의 조사결과는 그런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문 노무사는 "이번 건을 계기로 파견 위장도급 문제를 노동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단속하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노동부가 '불파' 판정해도 검찰이 기소 안 하면 그만
문제는 앞으로다. 원청인 롯데캐논이 노동부의 시정지시를 거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상당수 기업이 노동부의 직접고용 시정지시를 불이행한다. 직고용할 경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구멍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2017년 논란이 된 파리바게뜨의 경우, 서울지방노동청은 파리바게뜨 협력업체 소속 제빵사 5378명에 대해 파리바게뜨가 사실상 직접 지휘, 명령을 했다며, 직고용 시정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파리바게뜨는 이에 불복, 시정지시를 취소해달라며 행정소송을 낸 바 있다.
결국, 파리바게뜨는 행정소송이 법원에 의해 각하된 이후, 한국노총-민주노총과의 협의 끝에 제빵사를 자회사로 고용하는 것으로 최종합의했다.
그나마 파리바게뜨는 옥신각신 끝에 합의안에 도출했으나, 다른 업체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대표적인 기업이 아사히글라스다. 2015년 5월 아사히글라스는 사내하청업체 GTS에서 일하는 노동자 138명이 노조를 결성하자 GTS와의 도급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자연히 여기 소속 노동자 전원은 해고됐다.
노동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곧바로 아사히글라스와 GTS를 불법파견 혐의로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 하지만 노동부의 조사결과는 2017년 8월에야 나왔다. 고발한 지 2년 만에 나온 결과였다. 박근혜 정부에서 고발한 사건이 문재인 정부에서 결과가 나온 셈이다. 그래서일까. 고용노동부 구미지청은 아사히글라스를 하청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사용자로 판단하고 직접고용 시정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아사히글라스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노동부는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는 아사히글라스를 불법파견에 따른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검찰의 의견은 달랐다. 2017년 12월 22일, 관련 사건을 두고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가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렇게 될 경우, 노동자들이 그간 쌓은 공든 탑은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노동자는 아직 겨울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금태섭 의원실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검찰은 2012~2016년간 총 1045건의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 입건 사건 중 259건을 '혐의없음 등'으로 불기소했다. 입건된 사건의 4분의 1을 무혐의 처리한 셈이다.
더구나 총 1045건 중 1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구속 수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중 60%인 629건만 기소했다. 또한 기소된 629건 중 13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벌금 처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파견법을 보면 불법파견을 했을 경우, 파견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고, 사용사업주에게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은 현재 무용지물인 셈이다. 노동부에서 불법파견 관련 시정지시를 받아도 기업이 버티는 이유다.
이는 롯데캐논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들이 고용노동부의 불법파견 시정지시를 받았지만 앞으로도 갈 길이 먼 이유기도 하다. 그나마 롯데캐논 하청 노동자들은 그동안 증거라도 수집했기에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지도 못한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은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다.
춘래춘불사춘(春來春不似春). 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노동자의 삶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건 기자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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