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53강은 2018년 3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3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태인IC-태인면(태인향교/태인동헌/피향정)-칠보면(무성서원/태산선비문화사료관/정순왕후태생유지비/김명관고택)-정읍시(충렬사/정읍향교/송우암수명유허비)-점심식사 겸 뒤풀이-고부면(동학혁명모의탑/사발통문작성지/군자정/고부향교/고부관아터/고부읍성)-덕천면(황토현전적지/동학농민혁명기념관)-영원면(전봉준고택/말목장터/만석보유지)-태인IC-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3강 답사지인 <정읍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정읍은 동남쪽으로 상두산, 국사봉, 흑방산, 고당산, 칠보산, 내장산, 입암산, 방장산 등 노령의 비교적 높은 산줄기가 솟아 있고, 연이어 낮은 구릉지가 펼쳐져 있으며 산지와 구릉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평야지대로 일찍부터 경지로 개간되어 관개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동진평야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묵방산에서 발원한 동진강이 상두산에서 발원한 용호천과 내장산에서 발원한 정읍천을 신태인에서 합류한 뒤, 김제와 부안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해로 유입되고, 고부천은 고창에서 발원해 정읍의 서쪽 경계를 이루면서 북쪽으로 흘러 서해로 흘러듭니다.
정읍은 전북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호남의 서해안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동쪽은 임실과 완주, 서쪽은 부안과 고창, 남쪽은 순창과 장성, 북쪽은 김제와 접하고 있습니다.
정읍 지역의 산성으로는 삼한시대에 쌓았다고 전해지는 초산성(楚山城), 백제 온조왕 때 쌓았다는 고부면의 두승산성, 덕천면의 우덕리산성, 입암면의 입암산성, 영원면의 은선리토성, 옹동면의 산성토성, 태인면의 백산성(栢山城), 칠보면의 무성리산성, 산외면의 평사리산성 등이 있으며, 성지(城址)로는 고부면의 고부구읍성, 영원면의 금사동토성 등이 있습니다.
정읍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으로 대시산군(태인현), 정촌현(정읍현), 고사부리군(고부군)이 있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경덕왕 16) 대시산군을 태산군으로 개명하고 정읍, 빈성, 야서 등 3개의 현을 영현으로 거느렸습니다. 특히 백제시대에는 5방성(五方城)의 하나인 중방(中方) 고사성(古沙城)이 있었던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여러 곳에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고려시대 고부군은 936년(태조 19) 영주(瀛州)라고 칭하고 관찰사가 파견되었으며 951년(광종 2)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했다가, 1019년(현종 10) 고부군으로 복구되었는데 속군인 대산군을 비롯해 보안(保安), 부령(扶寧), 정읍, 인의(仁義), 상질(尙質), 고창 등 6개의 속현을 거느렸습니다.
정읍현은 고려 초기에는 고부군의 속현이었으며 뒤에 감무를 두었고 1235년(고종 22) 몽고군의 3차 침입 때 전라도 지방까지 내려와 온갖 약탈을 자행하자, 부령별초(扶寧別抄)였던 전공렬(全公烈) 등이 의병을 모집해 맞서 싸웠습니다.
조선시대는 1421년(세종 3) 태인현감이었던 안기(安起)가 태인향교를 신축하였고 정읍은 1589년(선조 22) 현이 되었는데 초대 현감으로 이순신이 파견되었으며 정유재란 때 유춘필, 이허량, 유경인, 유희진 등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하기도 하였습니다.
1689(숙종 15)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유배지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았으며 1728년(영조 4) 태인현감 박필현이 이인좌와 공모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습니다.
1894년(고종 31) 고부군수 조병갑의 압정으로 발생한 고부 농민봉기는 전봉준과 손화중을 중심으로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든 동학혁명으로 확산되었으나 일본군의 간섭으로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함으로써 실패로 끝났습니다.
고부, 태인, 정읍에 읍치구역
정읍에는 고부, 태인, 정읍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고사부리성(고부성)은 고부 면소재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황산(城隍山) 정상부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으로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통일신라 때 개축하였고, 고려시대를 거쳐 1765년(영조 41) 읍치(邑治)가 이전되기까지 읍성(邑城)으로 활용되었던 성곽입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 석성이었으나 조선후기에 토성으로 개축되었으며 둘레는 1,050m이며 발굴조사 결과 문지 3개소, 집수정, 조선시대 건물지 12개소가 확인되었고, 백제시대 ‘상부상항(上部上巷)’의 인각와(印刻瓦), 기마병의 선각와편(線刻瓦片), 통일신라시대의 ‘본피관(本彼官)’ 명문와(銘文瓦) 등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습니다.
고부관아터는 1765년(영조 41) 성황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편입될 때까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고부관아는 일제 강점기에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아건물은 전부 철거되었고 운동장 한쪽에 초석, 기단석 등 석조물이 남아 있습니다.
고부향교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원래 향교는 읍성의 서쪽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597년(선조 3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가까이에 마구(馬廐)와 옥(獄)이 있어서 향교의 주맥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이후 고을의 기운이 쇠퇴하여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인동헌은 1816년(순조 16)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헌 가운데 원형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 중 하나입니다. 청령헌(淸寧軒)이라는 현판에는 ‘갑진맹추상한(甲辰孟秋上澣) 손병호 인(孫秉浩 印)’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데 갑진(甲辰)은 1844년(헌종 10)입니다.
태인객사 자리에 태인초등학교가 세워지는 바람에 동헌이 학교의 경내에 들어가게 되어 한때 교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1975년 헐리게 될 처지였지만 지역민의 건의로 철거의 위기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태인향교는 1421년(세종 3) 현감 안기(安起)가 건립하였고 향교의 정문인 외삼문 대신에 왕비나 영상이 출생한 고을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만물을 생동케 한다(孔子之道 萬物化生)”에서 이름을 따온 만화루(萬化樓)를 세웠는데, 태인은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탄생지입니다.
정읍향교는 1398년(태조 7) 귀미동에 있었던 활터 자리에 창건하였으나 1638년(인조 16) 유황, 남구익, 손후유 등 유림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북쪽에 명륜당을, 남쪽에 양사재(養士齋)와 홍전문(紅箭門)과 교직사(校直舍)를 두었습니다.
정읍의 서원들
정읍의 서원은 무성서원(武城書院), 남고서원(南皐書院), 도계서원(道溪書院), 고암서원(考巖書院), 용계서원(龍溪書院), 동죽서원(東竹書院) 등이 남아 있습니다.
무성서원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중종 때 태인현감이었던 신잠(申潛)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1696년(숙종 22) 사액되면서 무성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최치원이 886년(신라 정강왕 1) 태산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치적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여 월연대(月延臺)에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후 고려 말에 파손되었다가 1483년(성종 14) 유림들의 발의로 월연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그곳에는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창설한 향학당(鄕學堂)이 있었다고 합니다.
1544년(중종 39) 태인현감이던 영천 신잠(靈川 申潛)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1549년(명종 4) 강원도 간성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1696년(숙종 22)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아 이 두 사당을 병합하여 무성서원이라 했으며, 배향된 분은 최치원,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입니다.
남고서원은 1577년(선조 10)에 창건하여 일재 이항(一齋 李恒)과 그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건제 김천일(建齊 金千鎰)을 배향하였습니다. 효종 때부터 사액하여 주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85년(숙종 11)에야 남고서원이라 사액되었습니다.
1871년(고종 8) 철폐되어 단(壇)을 만들어 제사 지내다가 1908년 유림들의 발의로 강수재(講修齋)를 세우고 1927년에 서원을 중건하여 김점, 김복억, 김승적, 소산복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도계서원은 1673년(헌종 14)에 김창집, 민진원의 주창으로 창건한 서원으로 이희맹, 김재민, 최안, 김지수, 김제안, 김흔을 배향해 오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후 1913년에 유허비를 세우고 1962년 중건하여 김섬, 김습을 추가하여 총 8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고암서원은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정읍에서 수명(受命)한 후 그 무고함이 밝혀져 나주 유생 나세기 등 팔백 여명의 상소로 1695년(숙종 21) 창건하였고 그해 9월에 고암이라 사액하였으며 1785년(정조 9) 민치겸 등 유림들의 상소로 우암의 수제자인 권상하를 배향하여 지금은 두 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송우암 수명유허비(受命遺墟碑)는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같은 해 5월 28일 다시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에서 사약을 받고 다음날 아침 진시(辰時)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83세였습니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무고함이 밝혀져 1731년(영조 7)에 이곳에 수명유허비가 세워졌습니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 1701년(숙종 27) 향현사(鄕賢祠)로 창건되어 관곡 최서림(崔瑞琳)을 향사하였다가 1750년(영조 26) 그의 문인인 김정호, 은정화를 함께 모셨으며 1757년 한백유, 김습, 유종흥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최서림은 김집의 문인으로 166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94년 공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진 교육에 힘쓴 선비이며, 용계서원에 향사되어 있는 인물들은 거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동죽서원(東竹書院)은 1516년(중종 11) 함경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였을 때 조광조(趙光祖)의 천거로 덕촌 최희정(崔希汀)이 출전하여 여진족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는데 그 공로를 인정하여 중종은 지금 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동죽산 입구를 그에게 하사하였습니다.
1844년(헌종 10) 최희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함과 동시에 동죽서원으로 개칭하고 조광조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피향정·군자정·송정·읍원정...
정읍의 누정은 피향정(披香亭), 군자정(君子亭), 송정(松亭), 읍원정((揖遠亭)이 남아 있습니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고도 하는데 886년(신라 정강왕 1)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재임 중에 풍월을 읊고 소요하던 연못가에 세워진 정자로 알려져 왔으나 누정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습니다. 정자의 상하에 연못이 있었다는데 상연지는 원래부터 있었으며 하연지는 1740년(영조20) 현감 오언부가 새로 판 것이라 합니다.
군자정은 사면이 연꽃으로 둘러있어 달리 연정(蓮亭)이라고 하며 고부지방 선비들이 음풍영월하던 곳으로 1673년 군수 이후선이 연못을 고치고, 정자를 보수하였으며 1764년(영조 40) 군수 이세형이 중건하였으나, 퇴폐하여 1900년에 조규희 군수가 연못을 수축하고 군내 19명의 인사로부터 몇 천량의 기부금을 받아 중건하였습니다.
송정은 광해군 때 폐모사건(廢母事件)에 항소한 세속 7광(七狂) 10현(十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에 모여 자적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으로 이들 후손들은 영당을 세우고 7광도와 10현도를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7광은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이며 10현은 칠광 중에서 김대립, 김응빈이 빠지고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의 다섯이 더해집니다.
읍원정은 1855년(철종 6) 태인현감 이승경이 선비들에게 문학을 권장하기 위해 유림 49인과 함께 시사(詩社)를 만들며 세운 건물로, 시사에 가입한 이들은 수시로 이곳에 모여 음풍농월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920년경 태인관아가 헐릴 때 나온 재목으로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유서깊은 마을과 고택, 근대한옥
상학마을은 아름다운 산세를 지닌 두승산(斗升山)의 동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로, 입구에 수령 300~400년 정도로 보이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고 마을 중앙에는 500년쯤 된 귀목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마을의 돌담은 두승산 자락에 대지를 조성하면서 나온 크고 작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일부 마을 안길에서는 새마을운동 이전의 모습도 볼 수 있고 또한 돌담 형식으로 높게 쌓은 헛간채 벽 등은 옛 가옥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전통경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명관고택은 뒤로는 창하산(蒼霞山)이 앞으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전에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바깥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하게 조화를 이룬 사랑채가 보이고 사랑채의 안대문을 들어서면 집의 구조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며, 좌우전면의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한 특이한 평면의 안채가 있습니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작은 사당이 있고 서남쪽에는 안 사랑채가 있는데, 입향조인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그 자신과 목수들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 하며 이 집의 주위에는 여덟 채의 호지(護持)의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두 채만 남아 있습니다.
관청리 근대한옥은 원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있던 ‘보천교(普天敎)’의 건물이었던 것을 보천교 몰락 후 고부지방 대지주인 조상원이 1938년경 매입하여 1940년에 현재 위치에 이건한 건물로, 당시 신흥종교였던 보천교 건물이라는 점과 1940년대 근대한옥으로서의 여러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 유적지들
정읍은 동학농민전쟁의 발상지로 그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만석보(萬石洑)는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온 조병갑이 보(洑)의 수축을 빙자하여 가렴주구를 자행하고 농민을 착취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유발시킨 원인을 제공한 유명한 보로, 정읍천과 태인천을 건너는 다리 아래쪽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말목장터는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때 배들평[梨坪] 농민들이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에 전봉준 등 수천 명이 합세한 곳입니다. 농민들이 이곳 말목장터에 모였을 때 전봉준이 감나무 아래에 서서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을 설명하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합니다.
황토현(黃土峴)은 황토로 덮인 작은 언덕으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관군을 물리친 혁명군의 전승지이며 옛날 태인에서 고부로 연결되는 국도인 태고선(泰古線) 도로에 있어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전봉준의 지휘 하에 동학혁명군은 고부 백산에 집결해 있다가 1894년(고종 31) 5월 11일(음 4월 7일) 새벽에 인근 고을의 농민군과 함께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전주 감영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이로부터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 각 현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었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였습니다.
전봉준 고택지는 1894년(고종 31) 갑오동학혁명 당시 전봉준이 살았던 흙담 4칸의 오두막집으로 원래는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으로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초가삼간이었으나 근래에 서쪽으로 한 칸을 붙여지었습니다.
전봉준의 <공초록(供招錄)>에는 이곳에 와서 수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촌로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웃 마을 양교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하며, 갑오년(1894)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동학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의 집을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이때 전봉준의 집도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그 동안에 이론이 있었으나 1974년에 보수를 하면서 해체작업을 하는 중에 밝혀진 상량문에 무인(戊寅) 2월 26일, 즉 1878년(고종 15) 세운 것으로 되었으니 어쩌면 전부 타지는 않고 남아있는 폐옥을 보수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은 동학농민혁명의 초기단계에서 당사자들이 남긴 유일한 자료입니다. 1894년 1월의 고부봉기 이전인 1893년 11월 전봉준, 최경선, 송대화 등 20명 참가자들의 한자 및 한글 이름이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을 중심으로 둘러가며 서명되어 있고, 고부성의 격파와 조병갑의 처단, 군기창과 화약고의 점령,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의 격징, 전주영 함락과 경사에의 직행할 것을 결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효유문(興宣大院君 曉諭文)>은 동학농민혁명 가담자들에게 해산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준비할 때인 1894년 8~9월 사이에 전국 각 지역에 보낸 문서인데, 실제로는 전봉준과 김개남 등 농민군과 유생들에게 봉기하여 일본을 몰아내자고 밀지를 내린 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농민군들이 해산할 것을 권하는 효유문을 내렸던 것입니다.
동학혁명의 삼걸(三傑)
갑오동학혁명의 삼걸(三傑)은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 손화중(孫華仲)입니다.
전봉준은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고창에서 출생하여 전주, 태인, 고부 등지로 옮겨 살았는데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 조병갑의 거듭되는 악행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습니다.
뒤이어 동학교도와 농민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봉기하여 금구, 부안을 점령,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 고창, 무장 등에 이어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 강화에 힘쓰고 도정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봉기 하였습니다.
전봉준은 남도접주로 12만의 병력을 지휘하며, 북도접주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의 농민전쟁을 시작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크게 패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습니다.
이후 전봉준은 순창에 피신하여 동지 손화중,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慶善) 등과 다시 거사할 것을 모의하던 중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 당했습니다.
김개남은 본관은 도강(道康)으로 태인에서 출생하였고 갑오동학혁명 3걸 중 강경파 인물로 알려졌는데 1890년경 동학에 입도, 1891년 접주가 되어 제2세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1892년 탐관오리의 제거와 교주신원을 위한 시위운동을 폈을 때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1894년 전봉준이 선봉에 서서 고부민란을 일으키자,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을 일으켜 4월에는 백산에 동학운동본부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총관령 직을 맡았으며, 전주화약(全州和約) 후 남원에 계속 주둔하면서 전라좌도를 관할, 폐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894년 12월 17일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에서 참수 당하였습니다.
손화중은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1881년(고종 18)에 동학에 입도,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다가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고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 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북 보은 장내리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나주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을 지도하였으나 제2차 동학혁명운동에서 전봉준의 공격 실패로 그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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