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진보정치의 대부' 권영길, 그가 울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진보정치의 대부' 권영길, 그가 울었다

[인터뷰] "진보통합 실패하면 10선 의원인들 무슨 소용인가"

70년 삶을 살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것이다. 가슴 아픈 순간도, 말 못하게 기쁜 날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목소리가 떨렸다. "삼선교 쪽방의 국민승리 21 시절부터, 2004년 총선승리의 영광, 분당의 상처까지 모든 고난과 영광의 세월동안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은 권영길의 영혼이었다"는 대목에서 그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의 끈을 놓친 듯 보였다. 민주노동당을 상징하는 주황색 넥타이도 덩달아 미세하게 흔들렸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모두가 불가능하다 했던 민주노동당을 만들어 냈던 진보정치의 상징, 그러나 2007년 세 번째 대선 출마 이후 민주노동당은 갈라졌다. 진보정치 역사의 분기점마다 그가 있었다. 그런 권영길 의원이 22일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국회의원 배지만이 아니라 어떤 당직도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했다.

"통합 진보정당 건설이 실패한다면 10선인들 무슨 소용이냐"

"백의종군하며 오직 통합의 길에 몸을 던지겠다"고 밝혔다. "통합진보정당 건설이 실패한다면 국회의원 3선이 아니라 10선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냐"고 되물었다. 그의 불출마 선언은 '진보정당의 3선 정치인'의 무게감보다 진보정당의 통합이 더 중요하다는 역설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진보정당의 통합이 위기에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단지 내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수없이 많을 통합의 고비마다 매듭을 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진보정치의 '어른'이라는 책임감만은 아닌 듯 보였다. "분당된 이후 매 순간이 고문 당하는 것 같았다"는 말이 그의 고민의 시작점을 보여줬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분당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당내 정파관계의 중재자였던 저 권영길은 2007년 대선 경선에 나서면서 중재자의 역할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당내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그것이 분당으로 이르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받으셨던 모든 분들, 특히나 진보신당 당원 동지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과거의 과오는 모두 저 권영길에게 묻어 주십시오. 갈등과 반목, 고통의 시간을 넘기 어렵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돌파해나가야 합니다."

다시 '중재자'가 되어 잘못 끼운 단추를 제 손으로 바로 잡겠다는 결심이었다. 민주노동당을 향해서도 "진보진영의 맏형으로 패권주의 폐해를 막기 위한 방안을 선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당의 원인이 당직과 공직의 독점에서 시작됐음을 반성해야 한다"며 "협상이 아닌 감동과 신뢰가 필요한 순간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면서 그는 "진심은 통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26일 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진보신당 당원들의 마음에 권영길의 진심이 울림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과거의 상처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권영길 의원을 그의 총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 직후 만났다.

▲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연합뉴스

"민노당 초대 당대표로 분당 이후 매일 고문 당하는 기분이었다"

프레시안 : 불출마 선언의 배경이 무엇인가.

권영길 :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통합진보정당 건설이다. 국민들에게,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당원들에게 하나로 뭉치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심을 버리고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각에서는 진보통합의 길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해 배지가 탐나서 그러는 것 아니냐고 본다. 그래서 내려놓으려는 것이다. 26일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통과되고 나면 실제 통합 작업이 전개될 것이다. 그 과정 또한 만만치가 않다. 단계 단계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제가 나서 꼬인 매듭을 풀어보고 싶다.

프레시안 : 그 고민은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가.

권영길 : 분당 이후부터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대회를 할 때마다 비어있는 절반이 보였다. 1997년 대선이 끝나고 2000년 창당까지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내고 수많은 곳을 함께 뛰어 다녔던, 그 얼굴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새 진보정당 건설 움직임은 올해 초에 시작됐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뛰어든 것은 2009년 가을부터였다. 분당된 이후 노동현장에 (진보정치인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갈갈이 찢어졌다. 조합원들의 기대가 사라졌다. 권영길만이 현장 노동자와 함께 손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진보정당을 통합시키라는 명령이었다.

현장이 통합되면 정치 통합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 그래도 신자유주의 때문에 고통 받는 노동자들에게, 진보정당이 오히려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으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민노당의 초대 대표로 어떻게 그 상황을 견딜 수 있었겠나.

프레시안 : 진보정당 통합도 중요하지만 진보정치에서 지역구 3선 의원이 나오는 것 역시 상당한 의미를 지닌 일이다.

권영길 : 진보통합이 이뤄지고 야권연대를 선도한다면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 내년 총선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창원에서 진보정치인의 당선을 위해 남은 시간 동안 더 열심히 창원에서 뛰려고 한다. 내년 5월까지 지금까지보다 몇 배 더 창원에 머물겠다.

창원 시민들께 며칠 내로 자세한 말씀을 직접 드리려고 한다. 두 번이나 저 권영길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셨다. 그 창원 시민을 내가 어떻게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 있을까. 국회의원으로 있든지, 직을 내려놓든지 창원 시민들은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권영길과 새 후보가 반드시 멋진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창당 전까지 눈물, 기쁨 함께 나누던 이들에게 내 마음 통할 것"

프레시안 : 지금 진보정당 통합 과정이 그만큼 위기라고 보는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권영길 : 진보신당이 26일 통과되지 않으면 무산된다. 그냥 무산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양측의 대립각이 날카롭게 세워진다. 상상만으로도 끔직한 상황으로 가는 것이다. 그때 내가 국회의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럼 권영길의 불출마 선언이 영향력을 미칠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장담은 못 하지만, 나의 진심이 알려진다면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면 작용하리라 본다. 2000년 창당 전까지 눈물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이 진보신당에도 있다. 당을 만들겠다고 눈 덮인 산을 넘고 찬바람 부는 눈밭을 헤매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그들과 마음이 통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 향후 건설될 통합 진보정당에서 공직과 당직을 안 맡겠다고 밝혔는데 통합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권영길 : 수식어가 아니다. 민주노총과 민노당은 내 삶의 전부였다. 분당된 시기는 내게 그 어떤 것보다 더 아픈 가혹한 고문이었다. 그런 내가 분당이 되고 갈라져 있는데 어떻게 출마를 하겠나. 진정으로 진보정당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죄를 짓는 것이다.

통합을 위해 모든 일을 할 것이다. 가장 급한 것은 26일까지 진보신당 당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겠다. 의원직까지 내려놓은 마당에 못 갈 곳이 어디 있으며, 못 만날 사람이 누가 있겠나. 설득하고 또 설득하겠다.

프레시안 : 만일 진보신당 26일 당대회에서 합의안이 부결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되나?

권영길 : 지금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다. 26일이 깨지면 다시 주워 담을 그릇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 후까지도 고민하고 있겠지만 나는 생각 안 한다. 물론 (진보신당이 부결시킨다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참여당 문제, 살얼음판 건너기 전에 튀어나와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최근 이정희 대표의 행보를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조승수 대표를 비판하는 공개 편지를 보냈고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발언도 했다.

권영길 : 당내 논란도 있었고 이 대표가 해명도 했기 때문에 지금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조 대표에게 보낸 서한은 실제로 많은 풍파를 일으켰지만 그에 대해 이 대표가 심정을 토로하는 글도 썼다. 지금 다시 거론하는 것이 26일 당대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프레시안 : 국민참여당 문제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참여당이 새 진보정당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권영길 : 정당은 집권을 위한 정치적 조직체인 동시에 이념과 사상의 결집체다. 진보정당 10년의 역사는 일하는 사람의 희망을 만들어온 길이었으며 동시에 진보정당의 독자적 생존력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길이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진보진영 사람들이 물리적 탄압을 받았지만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치 철학의 대립, 정책 대결이 이뤄졌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더 많은 운동가들이 구속됐다. 17대 국회에서도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비정규직법이 통과될 때 민노당 의원들이 통곡했다. 몸부림을 쳤다. 그것은 참여정부와의 정책 대립의 결과였다. 그런 것들이 정리되고 청산되어야 한다. 청산되어야 할 사안들이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진보통합의 핵심적 요소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다. 그 통합이 지금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이것을 먼저 건너야 한다. 아직 건너지도 않았다. 두 당도 금방 가라앉을 지경이다. 이 살얼음판을 건너고 나서 얘기해야 한다. 그 전에는 튀어나와서는 안 될 사안이다.

"당대회에서 쏟은 눈물…누구와 '불출마' 상의했다면 불가능했을 것"

프레시안 : 지난 19일 정책당대회에서 당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하던데 어떤 마음이었나?

권영길 : 당원들과 함께 당가를 부르는 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창당되면 민노당 당가는 없지 않나. 새 정당의 창당이 기쁘기도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수많은 날들과 수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 나왔다.

▲ 19일 민노당 당대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권영길 의원. ⓒ진보정치(정택용)
프레시안 : 이런 결심을 이정희 대표나 강기갑 의원과 상의하거나 논의했나?

권영길 : 상의할 성격이 아니다. 상의하는 순간 이뤄지기가 힘들다. 특히 진보정당에서 3선 의원은 누구나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거기다 창원은 10년 동안 진보정치를 일궈낸 곳이다. 흔히들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창원은 민노당 텃밭이라고 한다. 그 속에서 3선 의원의 위치는 큰 의미가 있다. 상의 했으면 (발표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정희 대표에게는 어제 기자회견 하겠다고 전달했고 그 내용은 오늘 아침에 만나서 얘기했다. 나도, 이정희 대표도 가슴이 많이 아팠다.

프레시안 : 이 대표가 무슨 말을 하던가?

권영길 : 뭐라 얘기할 수 있겠나. 마지막에 눈물을 많이 흘리고 충혈된 눈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가슴이 아팠다.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 나도 당 대표를 지냈지만, 이런 상황에서 민노당 대표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진보통합을 위해 이런 결정을 했지만 이 자체가 대표에게는 또 하나의 짐 아닌가 생각이 되어 가슴이 아팠다.

프레시안 : 만일 당에서 권 의원의 결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권영길 : 며칠간 논란이 분분할 것이다. 진통을 겪어야 하고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넘어야할 고개다.

"계속 외톨이였어야 했는데 2007 대선 출마…내가 풀어야한다"

프레시안 : 분당할 때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오늘 간담회에서 사과한다고 밝혔는데 어떤 마음인가.

권영길 : 창당 과정에서부터 대표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권영길은 정파적 대립을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당 대표는 그래야 했다.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기여는 그동안 속칭 '운동판'의 NL과 PD의 대립을 합쳐 놓은 것이었다. 창당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아마 분당이 되지 않았다면 민노당이라는 용광로에서 그 둘의 화학적 결합이 되었을 것이다. 화학적 결합을 위해 권영길은 외톨이가 되어야 했고 실제 외톨이였다.

그런데 2007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내 마음이 어떻든 아무도 나를 중재자로 안 보게 됐다. 중재자가 사라졌다. 그러면서 직접 충돌이 일어났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에게 섭섭한 감정을 가진 사람도 있을 테고 본의 아니게 가슴이 쓰라린 사람도 있을 테지만, 결국 내가 풀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진보신당이 '도로 민노당'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도 그때 기억이 크다. "이후 당내 민주주의 확립 과정이 '자리 문제'로 비화되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권영길 : 수임기구에서 구체적인 여러 사항들이 논의될 것이다. 제일 어려운 문제다. 당직 뿐 아니라 총선 후보도 조정해야 한다. 진보신당의 우려 가운데 하나는 다시 패권주의가 발로되지 않을까 아닌가. 숫자로 모든 것을 밀어붙여서 문제가 됐던 것인데, 지금도 숫자는 민노당이 더 많지 않나. 그런 문제가 다시 노정될 때 민노당 대표 시절에 중재자 위치에 섰던 것처럼 설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가면서 보여질 것이라고 본다. 양쪽에서 다 나의 진심을 받아들여 준다면 가운데 서 보겠다.


"민주노총 건설, 총파업, 민노당 창당으로 내 꿈은 이뤘다"

프레시안 : 오늘 발표 대로라면 내년 5월 이후에는 현실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된다. 15년 넘게 진보정치에 몸을 담는 동안 가장 좋았던 때와 아쉬웠던 때가 있다면?

권영길 : 가장 기뻤던 때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창당 때였다. 가장 마음 아팠을 때는 물론 분당될 때였고.

사실 나는 민노당 창당을 이끌어내면서 내 삶의 부분은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창당을 준비할 때 아무도 안 된다고 했다. 1992년 김대중 후보의 대선 패배 이후 민주진영이 완전히 좌절했다. 주저앉았다. 그때 몇몇이 새롭게 정당을 만들면서 나보고도 함께 하자고 했다. 그 정당이 '꼬마 민주당'이다.

나는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고 거절했다.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루고 노동자가 중심이 된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내 염원이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더러 '권 위원장, 그럼 이 당에 들어와서 힘을 키워서 진보정당으로 가라'고 하더라. 그때도 거절했다.

1997년 국민승리 21로 대선이 끝난 뒤에도 그랬다. 국민승리 21은 신간회 이후 진보정치세력이 모두 결집된 최초의 조직이었다. 선대본부도 정말 북적거렸다. 그런데 대선 끝나니 다음날 폐허가 되더라. 그리고 며칠 후에 봇짐을 싸고 이사간 곳이 성북동 골방이었다. 어느 교회 부속 건물이었는데 가져간 의자와 책상도 다 놓을 곳이 없었다. 그때 딱 18명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이사를 가면서 내가 그 18명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마오쩌둥의 대장정과 같은 것이라고, 지금 우리는 비록 다 흩어졌지만 희망을 가지자고. 권영길이 대선에 나온 것이 솔직히 대통령 되겠다고 나온 것 아니지 않냐고, 그 바탕으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것 아니었냐. 참담한 결과라고 다 흩어지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18명이 2년을 뛰었다. 다들 안 된다고 했다. 불가능하다고 했다. 심지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이름을 얘기하면 누구나 다 알만한 사람들이 그때 그랬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그것도 한국 최초로 한 달에 1만 원씩 내겠다는 당원이 8000명이 모였다. 사람들이 다 놀랬다. 기쁨을 넘어 그때, 내 삶의 역할을 다 했다 싶었다. 그 다음에 기뻤던 순간은 2004년 총선 승리였다.

기쁨이나 슬픔을 넘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노총 위원장 때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2월까지 계속된 총파업. 내 꿈이 민주노총을 만들고 우리 나라 최초의 명실상부한 정치적 총파업을 한 번 일궈내는 것이었다. 파업 자체보다 정치 파업이 갖는 의미가 있고 그것을 이뤄내면 그 이후 우리 사회적 환경의 바탕이 달라질 것으로 봤다. 실제로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총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또 가슴 아프다. 진보정당을 꼭 통합해야 되겠다는 마음은 사실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민주노총이 주저앉는 것은 우리 진보정치의 비극이고 또 한국의 비극이다. 그 비극을 없애기 위해 새 진보정당이 건설되고 그 힘으로 민주노총에 힘을 불어넣어 줘야한다.

새 진보정당이 원내교섭 단체가 되어야 한다. 정말 노동자에게 실제로 해줄 수 있다. 민주노총이 얘기하는 노조법 개정, 비정규직 문제, 최저임금 현실화 등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안 된다'는 데만 몸을 던졌는데 이제는 '이거 좀 하자'고 할 수 있다.

이런 얘길 하면 '그러면서 왜 불출마 선언하냐'고 하겠지만, 통합 진보정당이 되면 원내교섭 단체는 확신한다. 심상정, 노회찬, 이정희 등 수도권에서 최소 5명은 된다. 호남에서도 최소 2명, 창원도 다른 사람이 될 것이고, 비례도 있으니 20명은 반드시 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는 통합이다.

프레시안 : 긴 시간 얘기 감사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