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미국인 입양부모의 품에서 비명을 지르며 우는 아기를, 서울에서 로스엔젤레스로 가는 10시간 동안 안고 업고 토닥인, 마음 따뜻한 스튜어디스 두 분의 아름다운 선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잠든 아이를 업고 있는 머릿결 고운 승무원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르게 짠한 마음과 함께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구토증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을 관상하고 즐거워하는 대신, 악취 나는 쓰레기더미를 치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울컥하는 심정 같은 것이었다.
▲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았던 한 스튜어디스가 입양아를 업고 있는 사진. ⓒ뉴시스 |
사실, 6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실천되어 온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은 어떻게 보면 쓰레기더미 위에서 피어난 인간애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직후에 한국에 와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가 서울의 아침거리의 청소수레에 실려 죽어나가는 아동들을 목격하고 이를 미국 사회에 전한 선교보고활동이 미국과 한국에서의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가 끝나고 60년 세월에 가까운 오늘 우리가 아직도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꽃에 대한 찬탄과 감상에 젖어 있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사회일 것이다. 비록 쓰레기 때문에 꽃이 아름답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다. 항공사 승무원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는 우리가 아직도 우리 땅에 태어나는 아동에 대한 성숙한 시민사회로서 마땅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어두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수년 전 베트남은 자국 아동의 미국 입양을 중단했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그랬고 아프리카의 소국 라이베리아도 그랬다. 동구의 가난한 나라 루마니아는 유럽의회의 거친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국 아동의 해외입양을 금지했다. 브라질에서는 아동을 입양하는 외국인, 그러니까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브라질에 입국해서 브라질 법정에 출석해서 아동입양을 승인받아야 출국이 가능하다. 중국의 경우에도 아동을 입양하고자 하면 입양부모가 중국에 가서 입양아동을 데리고 가야 한다.
이번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도하의 유수한 일간지를 장식한 한 항공사 승무원의 선행에 관련된 경우, 미국인 입양 부모가 한국에 와서 아이를 직접 데리고 가는 경우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아동을 그 나라까지 데려다 주는 나라이다. 입양산업에서는 이를 통상 에스코트라고 하는데, 좀 심한 말로 아동을 택배로 배달해주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양기관들이 아동에스코트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항공권을 제공하고 아동을 입양국가의 공항으로 데려가게 하는 것이다. 입양기관의 에스코트 봉사자 모집에 관한 안내를 보면 이는 대단한 휴머니즘에 해당하는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이는 입양부모 그러니까 수요자의 최대편익을 보장하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구매자의 불편을 감소시켜야 더 많은 물건을 팔 수 있는 원리가 거기에도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해외입양이든 국내입양이든, 이것이 지나치게 미화되는 일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입양은 친생가족과 아동의 결별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친생모는 일생 동안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으로 시달리며, 입양 아동은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일생의 과업에 노출된다. 성숙한 시민 사회라면 이런 결별을 감소시키는 일, 그래서 사회적 슬픔과 불안정성을 최소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입양은 최소화를 추구할 때만 선한 가치이며, 결코 최대화를 도모할 일은 아닌 것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자국내 친생가족의 결별로 인해 이루어지는 입양은 통계학적으로 거의 0에 접근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1년에 자국 내 친생가족의 결별로 인해 입양되는 아동이, 마약 중독이나 중범죄에 연루된 부모의 아동인데 그 숫자는 15 명이 안 되며, 네델란드도, 덴마크도 스웨덴도 비슷한 상황이다. 거기에 반해 우리나라는 개인 간의 합의에 의해 민법상으로 이루어지는 입양이 2008년의 경우 년 간 3000여 명이 넘고, 입양기관을 통해서 국내외로 입양된 아동이 2300명을 상회한다. 우리가 G20의 의장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서 산술적으로는 500~1000배, 인구 대비로 따지면 50~100배에 가까운 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인 셈이다.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닌 일이 50~100배 이루어지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친생가족이 함께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 이 땅에 태어나는 아동이 국내로든 국외로든 입양되는 일을 통해서 그 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일을 어떻게 하면 줄여 나갈 있는 지를 고민하는 것이 성숙하고 책임 있는 시민사회의 구성원 자격을 얻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내외 입양아동의 90%가 미혼모의 자녀인 것을 고려할 때, 미혼모와 그 자녀 역시 하나의 단위가족인 것을 인정하고, 사회경제적 곤경에 내몰려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향한 사회적 편견의 감소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꽃의 아름다움에 취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꽃이 핀 자리가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라면 누군가 나서서 그 쓰레기 더미를 치워야 할 것이다. 입양을 산업화해서 그 산업의 유지와 확대와 성장을 도모하는 기관 종사자들과 입양 아동 숫자의 최대화를 통해서 아동양육에 대한 정부차원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정책입안자들의 대오각성이 필요하고, 자신이 미혼모에게서 태어나는 줄 모르고 이 땅으로 도착하는 아동에 대해서 편견을 퍼붓는 우리의 잔인과 야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돌이켜 이 땅에 태어나는 아동을 출생신분과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따뜻하게 맞이하는 환대의 공동체를 일구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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