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수록 궁핍해집니다. 만족감은 상품을 더 구매한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게 하는 시스템,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마케팅입니다." (우석훈)
"10년 전만 해도 대학생들은 책을 사면 '읽지 않아도 배부르다'며 뿌듯해했죠.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구찌 가방을 사면 뿌듯해합니다. 미국식 자본주의, 할리우드 영화가 퍼뜨린 우리 시대의 '행복관'입니다." (조한혜정)
숫자가 아닌, 행복한 삶을 위해 복무하는 운동, '슬로 라이프'.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3명이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느리게 사는 법'을 고민하기 위해 모였다. 남들보다 느리고 가난할지라도 '즐거운 불편'을 꿈꾸는 이들의 주된 화두는 '행복'. '다시, 행복을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번 대담은 연세대학교 조한혜정 교수(문화인류학), <88만 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쓰지 신이치 교수(국제학)가 참여한 가운데 2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서 열렸다.
▲ 22일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에서 '슬로 라이프'와 '행복'의 의미를 묻는 한·일 지식인 3인의 대담이 열렸다. (왼쪽부터) 우석훈 박사, 조한혜정 교수, 쓰지 신이치 교수. ⓒ프레시안 |
사람들의 '불행' 위에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여성환경연대의 주최로 마련된 이번 대담은 일본에서 10년째 '슬로 라이프' 운동을 이끌고 있는 쓰지 신이치 교수의 방한을 기념해 열렸다. '슬로 라이프'란 인간과 환경의 조화와 여유로운 삶을 권유하는 생활 운동으로, 쓰지 교수는 이를 실천하려는 시민단체 '나무늘보 클럽'의 대표 역시 맡고 있다. 이들은 전력 사용을 줄이는 '암페어 다운' 운동, 비인도적 동물 사육을 반대하는 '미트 프리' 운동, 원자력 에너지 사용에 반대하는 '탈 원자력 발전' 운동 등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행복의 경제학>에서 경제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뺄셈의 경제'를 제안한다. 풍요와 성장을 위한 '덧셈의 경제'가 아니라, 조금씩 덜 쓰더라도 행복하게 사는 나눔의 경제학, 이것이 그가 말하는 '행복 경제학'이다.
"경제라고 하는 것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경제는 진정한 의미의 '풍요로운 사회'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큰 힘으로 사람들에게서 행복을 빼앗거나 서로 행복을 빼앗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 <88만 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 ⓒ프레시안 |
쓰지 교수 역시 "모두가 자신의 소비에 만족한다면 이 경제 시스템은 끝나버릴 것"이라며 "사람들이 만족하는 순간 또 다른 소비를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사람들의 불행과 불만족을 토대로 작동한다"는 지적이다.
조한혜정 교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살림살이 경제'를 제시했다. "모든 행복의 척도를 숫자로 평가하는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샌산)을 넘어서자"는 것.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가 제시한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지수)'를 소개하며 "사람들이 '즐거운 불편'을 일상에서 실천할 때 쓰지 교수가 얘기한 '뺄셈의 경제학'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즐거운 불편'을 꿈꾸자"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조한혜정 교수는 '느리게 사는 삶'을 강조했다. "어렸을 때부터 입시 경쟁에 시달려온 아이들이 대학에 와서도 숨 막히는 경쟁 구도와 꽉 짜인 시간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이에 대해 쓰지 교수는 "'입시 지옥'을 벗어나자마자 '취업 지옥'의 관문을 지나야 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경쟁을 하듯 하루하루를 급박하게 살기보다는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과의 조화를 되찾고, 주변 사람들과 유대를 쌓고, 느린 시간을 살 때 비로소 행복도를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슬로 라이프의 가치가 시장 경제 체제에 빠르게 포섭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느린 삶과 나눔을 지향하는 슬로 라이프의 정신이 오히려 상품과 광고의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우석훈 박사는 "이제 어떤 아파트에 살고 어떤 상품을 구입하느냐가 마치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다"며 "점차 빨라지는 자본의 속도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이라고 덧붙였다.
"지역 사회를 대안의 공간으로"
▲ 쓰지 신이치 교수. ⓒ프레시안 |
조한혜정 교수는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는 공간이자 주체로 '지역 사회'를 강조하며 "곳곳에서 조그만 모델들이 나오고 있다. 이 작은 공동체들을 중심으로 '가볍게 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어여 한다"고 주장했다.
쓰지 교수는 일본 훗카이도의 정신 지체 장애인 시설 '베델의 집'을 소개하며 '나누는 삶'에 대해 강조했다. 베델의 집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 남보다 느리거나, 강하지 않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쓰지 교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강한 척' 해야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하는 일"이라며 "각자가 '느리고 약한 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대를 형성하자"고 덧붙였다.
"어디에서 '내려온다'는 건 힘든 일이지요. 중요한 건 이런 경제 시스템에서 조금씩 내려온다는 것이죠. 작은 공동체에서 사회, 국가 단위까지 각각의 단위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령 국가 차원에서 현 시스템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은 긴 시간이 걸릴 겁니다.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우리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것들부터 해야 합니다."
[화제의 책] 쓰지 신이치의 <행복의 경제학>
저자는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는 '성장 중독'의 경제에서 벗어나, 인간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갖춘 새로운 경제, 즉 '행복의 경제'를 만들어 갈 때라고 주장한다. 나날이 심각해지는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 실업이나 자살을 비롯한 온갖 사회 문제 속에서 경제학은 이제 경제 그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학문으로 재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쓰지 교수는 그 방법론으로 '뺄셈의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성장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덧셈의 경제'다. 학생들은 '더 빨리 더 많이' 시험 문제를 풀고, 노동자들 역시 그렇게 일하며 점점 '기계'가 되어 간다. 저자는 에콰도르에서 있었던 '뺄셈의 경제' 사례에 주목한다. 오랜 경제 위기로 에콰도르 정부는 2000년 자국의 통화인 '수크레'를 폐지하고 미국의 달러를 법정 통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고, 서민들 사이에서 통화 시스템으로 사용되던 '신트랄'이 곤궁해져 가는 서민 생활을 방어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퍼져 나갔다. 신트랄을 사용하는 한 시민은 "예전엔 생활하는 데 매주 30달러가 들었지만, 이제는 10달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30달러에서 10달러로' 생활이 바뀌는 것이 곧 '뺄셈의 경제'라고 평가한다. 사람들은 10달러의 생활이 30달러의 생활로 늘어나는 것을 흔히 '성장', 또는 '발전'이라고 여기지만,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빈곤층이었던 남미의 한 작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적게 쓰고 아끼는 삶'을 '진보'라 여겼던 것이다. 쓰지 교수는 그동안 '부'와 '행복'을 함께 묶어서 생각했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행복의 실체를 그대로 조명하자고 제안한다. 가령 부탄의 시골 마을 사람들은 가난해도 행복하고, 쿠바의 농민들은 유기 농업을 통해 200만 명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학문이 아닌, 행복을 증진시키는 학문. 이것이 그가 말하는 '행복 경제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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