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집안 정리를 했습니다. 아이가 커서 더는 소용없게 된 책이며 장난감들은 조카아이들을 위해 한 쪽에 두고, 구석구석에 감춰져 있던 물건들을 발굴해서 버릴 것과 나눌 것과 그대로 둘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한참 일을 하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며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는 것은 구호에 불과했다며 반성했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가볍게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함께 했고요.
온 식구가 방에서 뒹굴 거리면서 놀다가 우연히 <루시>란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감독 특유의 조금은 엉성한 구성이 눈에 거슬리고,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뇌의 15%밖에 이용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재밌게 봤습니다. 그 중에서도 극중에서 뇌 과학자로 연기한 모건 프리먼의 강연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뇌의 활용률에 따른 변화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그에 앞서 생물 진화의 과정 중 유전자의 전달이란 측면에서 먹이나 환경이 풍요로울 때 개체는 생식에 열중하고, 여건이 좋지 않으면 개체의 영속성(immortality)에 집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개체는 영원히 살 수 없으므로, 개체의 생명현상이 좀 더 오래 생존하는데 초점을 두게 된다는 얘기지요. 두 가지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한, 서로 다른 형태의 영원한 삶을 위한 전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좀 더 작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포 수준에서 생식은 세포의 분열을 의미하고, 생존은 현상 유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의 시기에는 분열에 열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작업을 완료한 이후에는 삶의 방식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노령화와 환경의 악화에 따라 급속하게 늘어날 것으로 생각되는 암이 걱정된다면 말이죠. 암세포의 특징인 끝없는 분열은 곧 끝없는 생식과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신체의 내적환경을 조금 궁핍한 상황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칼로리 제한의 최종 효과는 결국 스트레스 내성을 키우는 것이다. 혈당량이 떨어지고 인슐린 농도도 따라서 떨어진다. 대사 작용의 방향은 성(性)에서 신체 유지 쪽으로 바뀐다. - 중략 - 칼로리 제한으로 세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세포의 내부구조가 튼튼해졌다. 거의 모든 구조 단백질의 합성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졌다. 둘째, 종양괴사인자 TNF-α나 일산화질소 합성효소 등 염증을 촉진하는 단백질의 합성이 줄어들었다. 셋째, 산소 호흡을 담당하는 유전자의 발현이 줄어들었다. 특히 시토크롬c는 1/23밖에 되지 않았다. 이 마지막 효과는 대사율 감소와 통한다. 즉 천천히 살고 늦게 죽는 것이다." <산소>(닉 레인 지음, 양은주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
이 결과를 보면 '조금 부족한 듯 먹어라', '한 숟가락을 남겨라', '팔 푼(八分) 정도만 먹어라'는 건강에 관한 격언이 단순한 검약 차원의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적인 단식이나 간헐적 단식이 주는 긍정적 효과도 칼로리 제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음식 자체가 건강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성립하는 조건입니다.
이 외에도 말을 적게 하고, 성욕을 절제하고, 과음과 과식을 피하고 음식을 담박하게 먹고, 과도하게 화를 내거나 근심 걱정하지 말 것 등이 양생법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는 것들입니다. 실제 이를 엄격히 지키고 살면 왠지 삶이 맨송맨송해질 듯하지만, 신체와 감정에 가해지는 과부하를 덜어내는 것은 중한 병을 피하고 건강수명을 연장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사에 양껏 하기 보다는 경험의 밀도와 질을 키우고 에너지의 무질서도를 낮춰,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쪽으로의 전환이 필요하지요. 특히 우리가 중년이라고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면 이런 변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노화라는 본격적인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간이란 한 생물종에도 이와 같은 전환이 필요하단 생각을 합니다. 영화 제목과 같은 '루시'의 화석은 약 420만 년 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루시 이후로 인류는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턱 없이 짧은 시간 동안 진화와 번식을 거듭했습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약 74억 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현재 인류는 육지에 사는 모든 생물종이 사용 가능한 생물권 에너지 중 약 25~40%를 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석기 시대에 비하면 약 5만 배 정도 증가한 양이라고 하지요. 즉, 인류는 끝없이 분열하고 소비하는 생물종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인류를 암세포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그 동안 우리가 영위했던 삶의 방식이 다양한 모습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단순한 기후의 변화로 해석하는 이도 한편에 있습니다.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하거나, 테라포밍과 같은 방식으로 인류가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설사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인류의 삶의 양식이 올바르냐는 의문은 들지요. 현재 인류가 지향하는 방향을 조금 바꾼다면, 다른 생물에게 민폐를 덜 끼치면서 잘 공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부족하지만 보다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 인간 개체를 이루고 있는 생명권의 평화로운 공생 기간을 늘릴 수 있는 것처럼요.
명상지도자로 유명한 래리 로랜버그가 젊었을 때 당시 미국을 방문한 크리슈나무르티에게 혼자서 할 수 있는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명상은 배웠지만 호흡법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요청에 크리슈나무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일단 집을 정리하세요. 그리고 당신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것에 집중하세요!"
해가 바뀌면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대부분 전에 안 하던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지요. 뜻대로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더하다 보니 과부하가 걸려서 포기하거나 흐지부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새로 시작된 한 해는 더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덜어 내어, 조금 부족한 듯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넘치고 바빠서 놓쳤던, 하지만 정말 중요했던 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다면 행복과 건강은 세트로 따라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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