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200일, 300일…….
그는 자주 까마득한 굴뚝 위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극단적인 불안 등의 공포심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먹고 뱉은 과일의 씨앗이 굴뚝 위 손바닥만한 흙모둠에 뿌리를 내리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는 기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작은 생명들이 유일하게 까마득한 굴뚝 위의 친구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로소 말을 건넬 친구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작은 텃밭이 만들어지자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 날마다 혼자 운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 고공에서 혼자 제자리뛰기를 하고 있는 어떤 털복숭이 짐승 하나. 그렇게 그는 45m 고공 위에서 방울토마토와 완투통, 그리고 수박까지 기르는 원시의 어떤 인류가 되어야 했습니다.
2014년 5월 27일부터 2015년 7월 8일까지 408일! 전 세계에서 제일 오랜 고공농성 기록자라는 아픔을 가진 파인텍(전 스타케미칼) 해고자 차광호의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처음 싸움을 시작한 것은 2006년 경북 구미에 있던 한국합섬이 정리해고 후 공장을 닫자 5년에 걸쳐 문 닫힌 공장을 지키며 싸우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5년을 한뎃잠을 자며 누구도 가능치 않을 거라던 고용승계, 노동조합 승계, 단체협약 승계를 이루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3승계를 조건으로 공장을 인수한 스타케미칼이 공장가동 2년도 안돼 다시 공장 부지와 설비와 기술을 팔아먹고 위장폐업했습니다. 지친 동료들은 얼마간의 위로금을 받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자들이 다시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사막의 밤 같은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2014년 5월 27일, 갈 곳이 없어 하늘로 올랐습니다. 408일, 정말 내려 올 곳이 없어 버틴 시간이었습니다. 차광호는 2015년 7월 8일, 다시 3승계에 합의하고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한진중공업 김진숙처럼 309일을 버티면, 스타케미칼의 차광호처럼 408일을 버티면 정리해고가 철회될 수도 있다는 아픈 메시지였습니다. 한국사회 노동자들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중한 귀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다시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주기가 더 빨라졌습니다. 스타케미칼이 고용승계를 해주겠다며 충남 아산에 가건물 하나를 세내 만든 자회사 ‘파인텍’은 모양만 회사였습니다. 수용소 같은 굴욕적인 생활이었습니다. 합의서에 명시된 임금은 ‘최저임금(6030원)+1천원’, 하루 8시간 근무 외에 야근이나 잔업은 주어지지 않아 세금과 4대 보험료 등을 떼면 월 실수령액이 120여만 원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요구를 하자 이내 회사는 공장을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갈 곳이 없었습니다. 작년 겨울엔 이런 ‘헬조선’의 축인 박근혜 퇴진, 재벌총수 구속을 외치며 ‘박근혜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촌민’들로 입주해 몇 달을 노숙농성을 하며 힘써 살았습니다. 박근혜와 이재용 등을 감옥으로 보내고, 새정부도 들어섰지만 갈 곳이 없어 광화문의 텐트를 걷지 못하고 ‘마지막 광화문 촌민’들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가자!"
십년이 넘게 싸워봐도 달라지지 않는 노동자 세상. 이 헬조선 해체를 외치며 "다시 가자" 했다 했습니다. 2017년 11월 11일,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를 마친 후 다음날 새벽 3시 반. 이번에는 스타케미칼 본사가 있는 서울 목동 CBS 근처 서울에너지공사 75m 굴뚝 위였습니다. 세월에 장사가 없어 꼴랑 다섯 명만 남았습니다. 열 한 명이던 때가 그립다고 했습니다. 이번엔 홍기탁과 박준호가 올라 갔습니다. 2015년 408일만에 내려왔던 차광호가 이번에는 하루 세 끼 밥을 올려주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막내는 '옥배'와 '정기'입니다.
작년 겨울 그들과 다섯 달여 동안 광화문에서 '박근혜퇴진' 겨울 농성을 할 때였습니다. 아침에 마을천막으로 나가면 밤새 언몸을 히터 앞에 녹이러 나온 준호와 기탁이 광호, 옥배가 말없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에야 만나 어둔 조명 아래에서 신김치 한 쪼가리 두고 컵라면에 서로 말없이 숟가락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행님요!’ 한잔 술에 젖어 나보다 훨씬 견결하게 살아 온 그들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행님요’ 하며 물기 젖은 음성으로 어떤 생의 그리움에 대해 말하려 할 때마다 수천 개의 겨울강을 혼자 건너야 하는 이라도 된 듯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아득해지기도 했습니다. 단언컨대 작년 겨울 촛불광장의 한복판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헐벗은 채로 꿈꿔야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만약 ‘혁명’이 실패해 박근혜가 공권력이나 보수 집회를 동원해 반격해온다면 우린 도망칠 곳도 없이 제1번 타켓이 될 거라는 각오들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정말 온다면 남을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 그때마다 전 왠지 파인텍 친구들의 순박하고 바보스럽고 고집스런 얼굴들이 아프게 떠오르곤 했습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박근혜 헌법재판소 판결을 20여 일 남겨놓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캠핑촌 입주작가였던 최병수 형과 파인텍 친구들이 합심해 광장 한 켠에 한반도 지도 모양의 거대한 철제 조각물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곧 광장이 닫힐 지도 모르는데 왜 이제야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들이 바보스럽다기도 했습니다. 무슨 뜻인 줄 아는 이들은 모르는 채 ‘그러게 말이야’하고 맞장구치고 말았습니다. 그 철제 조각물은 박근혜 파면이 인용되지 않을 시 그들이 올라가기를 결심한 ‘망루’였습니다. 누구든 자기 방식으로 마음 속에 망루 하나씩을 떠올리던 날들이었습니다.
다행이 그 겨울을 무사히 건너 온 그들이 다시 목숨을 걸고 이 추운 겨울 75m 굴뚝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눈에 띠지도 않는 외진 곳입니다. 오늘로 408+40일. 그들이 끝나지 않는 고공농성일을 세는 셈법입니다. "잘 있다"고 합니다. 영하 5도라는데 하나도 안 춥댑니다. 걱정말라고 합니다. "금세 끝나겠능교. 잘 있을랍니데이"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하루 속히 우리 곁으로, 이 평지로 내려올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촛불항쟁을 함께 일군 그들이, 이제 그만 2200만 노동자 가족들이, 조금은 평온하고 안전한 삶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친구들과 사회 각계의 분들이 제안자가 되어 올해가 가기 전 그들의 하늘을 한번쯤은 함께 바라봐주는 날을 갖자고 합니다.
촛불항쟁의 원년인 2017년 마지막 날인 12월 30일을 그들과 함께 보내주자고 합니다. 그들이 살아 온 지난 십수년이 그랬듯 큰 뜻과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날입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평범한 이들의 꿈과 노동이 모여 촛불항쟁도 이루고, 새 정부도 세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12월 30일이면 '408+49일'이 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고통의 숫자가 희망의 숫자가 될 수 있게 우선 458명의 제안자 분들을 모십니다. 457개의 촛불의 마음을 모읍니다. 4570개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특별한 자격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발걸음 하나가 가장 커다란 선물입니다. 다만 오실 때 작은 손수건 하나씩만 꼭 챙겨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빨리 우리들 곁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손수건들을 굴뚝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안양천변 가로수들에 걸어주면 좋겠습니다.
플로리다 주의 포트 라우더데일 해변으로 가는 붐비는 버스의 맨 앞자리에 허름한 옷에다 돌부처 같이 무표정한 표정인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아까부터 그를 지켜보던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서도 한번도 내리지 않는 그에게 여자가 사연을 물어보았다. '빙고'라는 이름의 그는 4년을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석방이 결정되던 날,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만일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면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두라고 말이오. 손수건이 보이지 않는다면 난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 버리는 거요."
그의 집이 있는 마을이 다가오자 그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 갔고, 그의 사연을 알게 된 승객들은 창가에 하나 둘 붙어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앗! 저기 봐요! 저기!"
그때 승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커다란 참나무에는 온통 노란 손수건들이 뒤덮여 있었다. 나무 아래에 단 하루도 그를 잊어본 적이 없는 그의 아내가 서 있었다.
- 「노란 손수건 이야기」 중에서
어려서 괜스레 눈물짓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따뜻한 게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이 빨리 내려와 경북 어느 사투리가 억센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꿔봅니다. 너무 오래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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