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요즘 TV를 보면 그야말로 먹는 방송 천지라고 말할 정도로, 먹는 일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보여준다. 몸의 이치란 먹고 나면 반드시 내보내야 한다. 얼마나 잘 내보내느냐는 우리 몸의 신진대사를 측정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먹는 이야기와 달리 배설의 문제는 항상 숨기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왔다. 뒤처리 과정은 음식 조리와는 달리 음성적으로 행해졌으며, 그 결과는 우리의 생명과 생태환경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매일 일정량의 똥오줌을 배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것을 단순 폐기물로 인식하느냐, 자원으로 인식하느냐는 우리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토양학자 킹(F.H. King)이 동아시아를 여행하며 경이롭게 여긴 것이 바로 똥을 자원으로 활용하여 토양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그는 미래 인류농업의 대안을 동아시아에서 발견했다. 이 글은 과거 동아시아 조상들이 똥오줌을 어떻게 이용했는가를 살펴 그 지혜를 배워보고자 한다.1)
초기 측간 구조와 똥의 저장
똥을 이용하려면 우선 그것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위해서는 측간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측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가 측간(豕牢)에서 소변을 보다 문왕을 낳았다고 전하며, <좌전> '성공(成公) 10년'에는 진후(晉侯)가 측간에 가다가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 중국 고대 측간의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대(BC. 206~AD. 220)의 화상석과 명기(名器)에 등장하는 당시 측간을 보면 흥미롭게도 아래에 돼지우리가 결합된 모습이다. 제주도 민속마을에서 볼 수 있는 똥돼지 우리가 기원전부터 폭넓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당시 측간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측간의 기록은 어떨까? 일찍이 <삼국지> '동이전 · 읍루전(挹婁傳)'에 의하면 "사람들은 집 한가운데 측간(溷)을 두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살았다"고 하며, <수서> '백제전'에는 "사내아이를 낳아 측간에 버렸는데 오랫동안 죽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환(溷)이 돼지우리와 관련이 있는 것을 보면 고대 중국과 유사한 형태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좀 더 구체적인 물질 자료는 7세기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의 측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측간은 돼지우리와 무관한 순수한 화장실로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측간의 오수가 수로를 통해 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일본의 고대 측간은 7~8세기의 고로칸(鴻臚館), 헤이조쿄(平城京)나 아키타성(秋田城)에서 그 유구가 발견된다. 일본에서는 측간을 '물 위의 집'이란 의미로 사용하는데, 대개 측간이 물 위에 설치되거나 도랑물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그 도랑 위에 널판자를 설치하여 화장실로 사용하고, 다시 그 물을 밖으로 보내거나 저류했다가 흘려보냈다. 이처럼 일본의 측간은 오늘날 동남아시아 일부지역과 같이 물을 이용하여 대소변을 처리했다는 사실이 한국, 중국과는 다른 특징이다. 이상과 같은 측간 구조와 분뇨처리 방식을 볼 때, 측간이 있고 똥오줌을 측간에 저장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8세기 이전 동아시아에는 사람 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분약(糞藥)으로서의 똥오줌
사람 똥이 농작물의 거름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기록은 당나라 말 <사시찬요(四時纂要)>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당시에 똥오줌을 채소나 과수재배에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 후 송대(960~1368년)에 접어들면 교대작물의 재배가 확대되면서 지력의 소모가 늘어나 사람 똥이 새롭게 주목되어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중국의 당송시대는 커다란 변혁기로, 고대적 질서체계가 무너지고 경제혁명이 일어난 시기로 불린다. 강남지역이 개발되고 화북의 인구가 남쪽으로 이동하고 농업과 양잠업이 발달하면서 상업과 도시가 부흥했다. 이때 다양한 상업작물이 재배되면서 작물의 복종지수를 높인 것이 바로 비료였다. 그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사람의 똥오줌이었다.
이때부터 측간의 똥오줌을 수집하기 위해 저장 공간이 확대되고, 부숙(腐熟)한 똥오줌에 물을 타서 직접 작물에 시비하기도 하며, 퇴비에 끼얹어 거름을 부숙하는 데도 이용하는 등 다목적으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땅의 지력이 지속적으로 왕성해져 휴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생산이 증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상품, 유통경제가 발달하여 도시와 시장의 발달을 이끌었다. 민간에서는 똥거름을 '분약(糞藥)'이라고 표현하고, 이것이야말로 토양을 치료하는 명약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송대 '분약'이란 단어는 "농작물에 똥거름을 주는 것은 마치 허약한 사람에게 약을 쓰는 것과 같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체질에 따라 사용하는 약처럼 토지의 성질에 따라 똥거름을 시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약의 인식에서 거름이야말로 토지를 지속적으로 치유하여 지력을 보전하는 토대가 된다는 의식이 싹텄다.
그 결과 남방의 논농사 지역에서는 농가 근처나 논머리에 헛간(糞屋, 똥오줌 부숙 저장고)을 설치하여 비료에 대비하였다. 이 분옥의 구조를 보면, 거름기가 땅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을 낮게 설치했으며, 주로 똥오줌을 저장하거나 거름을 부숙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남송 사대부의 권농문을 보면, 농가 소득의 증진을 위해 집을 지을 때 반드시 먼저 측간을 만들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이것은 당시 똥오줌의 집적이 가정경제의 향상과 직결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송·원대의 민간에는 "땅을 많이 구입하려 애쓰는 것보다 적은 땅에 충분히 거름 주는 것이 훨씬 수입이 낫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 덕분에 송대에는 소모된 지력을 보충하여 벼농사에 이어 콩이나 보리를 윤작할 수 있었다.
아시아 각국의 똥 거래
똥오줌이 토지의 명약(名藥)으로 병든 토양을 치료하고 땅 기운을 높인다는 인식은 원대의 <왕정농서> '분양편(糞壤篇)'에도 그대로 이어져 분옥에서 부숙한 똥거름은 땅을 매우 기름지게 하여 남방의 농가에서는 똥을 이용한 토지경작법이 일반화되었다. 점차 북방의 농가에서도 이런 방식을 모방하여 10배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명청 시대에는 똥을 확보하기 위한 매매가 본격화되었다. 그야말로 똥을 황금과 같이 여기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2)
청대 중국 똥장수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은 17세기 편찬된 <굴신갱간귀성재주(掘新坑慳鬼成財主)>란 소설이다. 주인공 목태공(穆太公)이 어느 날 도시로 나갔다가 도로 곁에서 공동화장실[糞坑]을 보고, 지금까지 소중한 똥오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자극받아 마을에 측간을 지어 똥을 팔아 큰 부를 축적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문 앞의 3칸 집(屋)에 3개의 큰 구덩이를 파서 측간을 단장했다. 광고를 하려고 포스터를 사방에 붙였는데, 그 문구에 "향기 나는 새로운 측간을 만들었으니, 원근 군자들의 관심을 구한다. 본 측간에는 휴지(草紙)를 공짜로 제공한다"라고 적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사용에 소극적이었지만 점차 작은 이익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대변 후 뒤처리를 볏짚이나 기와 조각(瓦片)등을 사용했는데,3) 종이(草紙)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측간을 개소한 지 며칠 후 여성용 측간도 만들었는데, 흥미롭게도 여성의 이용률이 남성보다 더 많았다. 이렇게 수집한 똥을 개인이나 상인이 현금이나 쌀, 기름 및 나무 등으로 구입하여 주변 뽕밭, 채소밭과 논밭의 비료로 공급하였다. 당시 똥배[糞船]를 이용하여 분뇨를 구입한 사례는 명나라 말의 <심씨농서>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 똥오줌을 황금처럼 여겨 매매한 사례는 이미 남송의 도성 임안에서 똥을 처리하며 구역을 다투던 경각두(傾脚頭)에서부터 볼 수 있다.
18세기 조선의 <북학의>에서도 당시 똥오줌 수집을 잘 묘사했다. 조선의 박지원은 엄행수(嚴行首)라는 똥 장수를 등장시켜, 그가 사람 똥을 비롯한 각종 똥을 모아 서울 근교의 채소밭에 비료로 공급하여 한 해 6000전을 벌어들였다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0년대 경기도 수원에서 재에 똥오줌을 섞어 만든 똥재(糞灰)를 판매했다는 기록까지 이어진다. 그 밖에도 최근까지 영산강 하류의 가지(可之)마을은 여름철에는 영산강과 해남만을 오르내리며, 고기를 잡고 겨울철이 되면 배로 목포에서 똥을 운반했다고 한다.
근세 일본의 똥오줌과 그 시비에 대한 인식 역시 중국, 조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일본도 13세기까지만 해도 남녀노소가 거리에서 옷을 벗고 배설할 정도로 똥오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시대 말 근세초기의 대표적인 농서인 16세기 <청량기(淸良記)>에는 똥오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농민을 하농(下農)이라고 평가하고, 농민이 똥을 준비하는 것을 무사가 책략을 세우는 것과 동일하게 인식하였다는 점은 주목된다. 그 후 17세기가 되면 사람 똥을 구매하는 현상이 등장하며, 19세기에 이르면 사람의 똥오줌을 최고의 비료로 여기게 된다.
도시의 분뇨 급취는 처음에는 자유경쟁의 원칙을 따라 이루어져 고정된 권리는 아니었지만, 점차 급취권으로 발전하면서 똥오줌이 일종의 저당되고 매매되는 대상이 되었다. 집주인은 필요할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제인을 변경할 수도 있었다.
맺음말
이처럼 똥오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아시아 농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자원이었으며, 아시아인들의 소중한 지혜의 결정체로서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문명을 선도했다. 하지만 근대화과정에서 똥오줌은 야만적인 비근대성의 상징으로 변모되면서 화장실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로 인해 화장실은 단순한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공간이며, 똥오줌은 폐기물로 변해버렸다. 그 결과 농약과 화학약품이 유기비료를 대체하면서 토양과 수질은 오염되고, 인간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현대과학의 힘을 빌려 냄새를 제거하고 새로운 자원으로 재활용하게 된다면 토양과 수질 생태계의 복원뿐만 아니라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매일 배설하는 똥오줌을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하느냐는 인류 미래의 문제와 직결된다. 똥이 바로 우리 생명과 직결됨을 직시하여 똥오줌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기를 바란다.
각주
1) <동아시아 농업사상의 똥 생태학> (최덕경 지음, 세창출판사 펴냄) 참고.
2) <왕정농서(王禎農書)> '분양편(糞壤篇)' 중 '惜糞如惜金'
3) 다만 고대의 지배층은 뒤처리 용구로서 나무를 죽간처럼 깎아서 만든 주목(籌木)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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