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국방부를 제치고 직접 TV 카메라 앞에 서서 "내가 명령을 내렸다"고 말할 때 만하더라도 정국 전환의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쏟아졌다.
이 대통령은 그 여세를 몰아 23일 저녁에는 청와대 인근 삼청동 안가로 안상수 대표와 김무성 원내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를 불러 "잘못했습니다"라는 사과 발언을 이끌어내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가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오산인 듯 싶다.
▲ 지난 21일 청해부대의 작전 성공 사실을 직접 알리는 이명박 대통령ⓒ청와대 |
삼호주얼리호 구출 작전도 그렇다. UDT 장병과 석해균 선장에 대한 찬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군 당국이 공용 장비와 개인화기 제원, 최영함과 주얼리호 간 무선 채널, 무선 교신 내용, 분단위의 작전 상보 등을 시시콜콜하게 쏟아내자 오히려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작년 훈련 기간에 찍은 사진을 작전 성공한 후 촬영한 단체사진이라고 배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는 어이없는 일도 일어났다.
이래놓고 보도통제 협조요청을 어긴 언론사들에 대해선 '출입등록취소'라는 전무후무한 초강력 제재를 내렸다. 김관진 국방장관 명의로 38개 정부기관에 '해당 언론사들을 제재해달라'는 공문이 전달된데 대해선 "지금 국방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계엄령 정국이냐"는 반발까지 뒤따랐다.
이런 판국에 "청해부대와 삼호주얼리호의 무선 교신 과정에서 영어 대화 가운데 한국어를 암호처럼 섞어 쓴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는 '용비어천가'식 발언까지 나왔다. 연평도 피격 당시 '확전자제' 발언의 진위공방이 이어질 때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대통령이 구체적 작전에 대해서 지시하지 않는다"고 수차례 강조했었다.
"우리는 장관이 네 명이다"는 소리 나오는 농림부
인재로 밝혀진 구제역 파동을 둘러싼 풍경은 더 점입가경이다. 이 대통령의 격려 방문 이후 강원도 횡성의 방어막이 뚫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자.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데 장관들만 앞세우는 것을 넘어 "대통령은 원래 백신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부처에서 반대해서 이렇게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잘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 덕이고 잘못된 것은 남 탓인 셈이다. 노무현 정부와 김대중 정부 탓 이야기가 안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인가?
이런 판국에 농림부 주변에선 "장관이 네 명이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공식적인 장관 직함을 갖고 있는 유정복 장관이 있고, 농업 관련 이력이 전혀 없는 장관 대신 자기가 장관인 줄 아는 1차관과 2차관이 있고, 마지막으로 청와대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전 농림부 장관인 정운천 한나라당 최고위원도 장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하고만 풀린 안가 만찬 회동
게다가 막걸리잔이 돌았다는 안가 회동 이후 당청 관계는 오히려 더 꼬이는 분위기다. 안상수 대표와 김무성 원내대표와 관계는 정리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정치권의 반감은 거세다.
민주당 박지원 원대대표한테 "잘못하고 담임 선생님에게 용서를 비는 초등학생이냐"는 비아냥이 나왔을 뿐 아니라 한나라당 내에서도 다시 자괴감이 넘치고 있다. 겨우 정상화시켜놓는가 했던 당청관계가 도로 원위치가 됐다는 말이다.
권영세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요즘 우리당 하는 일 보면 앞으로 당청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려고 이러는지…"라고 한탄했다.
정동기 전 감사원장 후보자 사퇴 요구 이후 청와대에선 "대통령이 딱 한 사람에게만 화가 났다"며 안상수 대표를 겨냥하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안가 만찬 회동에 대해선 "대통령이 딱 한 사람하고만 풀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개헌', 누구의 블랙홀일까?
"개헌은 하는 게 맞다. 그것도 권력구조 개편 위주의 원포인트가 아니라 포괄적 개헌이 맞다. 하지만 나는 앞장서지 않는다"는 이 대통령의 알쏭달쏭한 발언이 촉발시킨 개헌문제도 산으로 가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막걸리 만찬 회동을 다녀 온 안상수 대표가 25일로 예정돼 있던 한나라당의 개헌 의총을 설 이후로 연기시킨 이후 일부 언론을 통해 이 대통령의 발언이 공개됐다. 이에 "개헌 이야기는 없었다"던 김무성 원내대표는 "어떤 X가 흘렸냐"고 육두문자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그 발언이 공개된 이후 한나라당 개헌파들의 움직임에 힘이 붙은 것을 감안하면 이 역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의심을 사기 충분하다.
하지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도 딱 여기까지다. 친박계 뿐 아니라 홍준표 최고위원("분당 할 각오되면 개헌 추진하라")이나 나경원 최고위원("과연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느냐는 부분에서 지극히 회의적이다")까지 쌍지팡이를 짚고 나설 기세다. 국회 재적의원 2/3 이상 찬성, 국민투표 통과라는 개헌까지 가는 험난한 관문을 통과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포인트 개헌'을 꺼냈을 때 여론은 '개헌 자체는 찬성-노무현 정부 내 개헌은 반대'로 정리됐었다. 당시 청와대 한 인사는 "모든 현안이 대통령 지지율 쪽으로 수렴되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좋은 이야기를 꺼내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아서 동력이 안 붙는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를까?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지금 여론은 개헌이 좋다 싫다를 떠나, 이명박 대통령이 하는 개헌은 싫다는 거 아니냐"고 잘라 말했다. 이 인사는 "개헌이 블랙홀이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청와대도 모를 리 없다. 그러니까 '하고는 싶은데 앞장서진 않겠다'고 변죽만 울리는 것인데 리더십 상실이 가속화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기다 과학비즈니스벨트, 영남권 신공항 등을 놓고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지역 언론들은 날선 언어로 경쟁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전국이 갈가리 찢기는 모습이다. 이 대통령의 집권 4년차 첫달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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