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경찰은 한 때 행동 지침에 따라 목줄 없이 개를 풀어놓는 시민을 체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횡단보도를 무단 횡단하거나 벨을 울리지 않고 자전거를 질주하는 등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시민을 체포하는 게 가능했다. <가난을 엄벌하다>(시사인북 펴냄)의 저자 로익 바캉은 이와 같은 형사정책이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시작한, 범죄에 대한 일련의 '톨레랑스 제로'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범죄의 정치적 활용 : 신자유주의와 한국의 군사정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정책이, 경제 부문에서 국가 역할을 줄이면서 사회복지 예산은 없애고 동시에 법원과 경찰, 감옥의 기능은 키운다는 것이 <가난을 엄벌한다>의 핵심 내용이다. 국가가 경제 부문에선 사라지고 형벌 부문에선 더 강력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3대 덕목인 자유시장, 개인의 책임과 의무, 가부장적 가치를 더 확대하고 전파하고자 했던 맨해튼연구소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고, 이를 선거에 적극 이용하여 당선된 줄리아니 시장이 1993년부터 '톨레랑스 제로' 정책으로 시정에 적극 반영하여, 신자유주의 형사 정책이 등장했다.
저자의 과감한 주장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형사정책이 고도의 기만적 정책이라는 점으로 이어진다. 사회복지와 형벌 제도의 연계를 통한 치안 정책은 점증하는 사회불안과 그로 인한 하층 계급의 불안정을 응징으로 처벌하는 정치 프로젝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개인에게 돌리는 데 성공한다. 범죄 혹은 범죄자에 대한 증오를 활용하는 것은 사회적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유권자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는 사회 불안을 범죄에 대한 증오로 해소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과거 정치적 정당성이 미약했던 권위주의 정권이 시작될 무렵에는, 언제나 범죄자들과의 전쟁이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초기에 자유당 정치깡패 소탕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전두환은 국보위에서 삼청교육대라는 기관을 세우고 상습폭력배들을 격리하여 수용했으며, 그나마 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는 아예 '범죄와의 전쟁'으로 캠페인 이름을 정하고 이를 보안사 정치 스캔들을 감추는 데 활용했다.
중산층이 호출하는 범죄와의 전쟁
우리 사회에서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모범 시민인 중산층에게 감정적으로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락하게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중산층이 안전에 대한 불안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은 자신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위험을 걱정하고 주택담보대출을 연체하여 집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며, 자신의 아이가 더 좋은 대학에 취업하지 못하여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떨어질까 끝도 없이 걱정한다. 과거 범죄와의 전쟁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면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그 전쟁을 호출하고 있다.
견주와 반려견에 대한 증오와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견주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안전에 대한 강박의 기원을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 형사 정책이 부상하고 엄벌주의가 확산되는 현상이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다. 최근 소년법 폐지 논란을 초래하며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의견이나 사형제 집행 찬성에 점점 동조하는 현상도 엄벌주의 경향에 부합한다.
우리의 불안이 한 걸음 나아가, 경찰이 목줄 없이 산책하는 견주를 재량껏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된다면 시민들은 더 안전해지는 것일까. 다시 묻자. 한국 사회는 범죄나 사고로부터 시민의 일상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사회인가? 그렇지 않다. 북한 변수를 제외하면 한국은 세계적인 안전 여행지이고, 객관적인 범죄율도 상대적으로 낮다. 우리의 불안은 범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염병처럼 우리 의식에 숨어들고 그것이 엉뚱하게 어떤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과도한 증오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치안을 통해 안정을 달성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 프렌치 불독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가 개에게 물리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면, 이제 해결해야하는 문제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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