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정말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청와대 김희정 대변인, KT전무가 된 김은혜 전 대변인에게 감사하고 싶다.
▲ 지난 10월 국무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연합뉴스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론 커크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지난 3일 오전(이하 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컬럼비어 시에서 한미FTA 재협상 타결을 선언한 이후 "양측 대표단은 이번 회의 결과를 자국 정부에 보고하고 최종 확인을 거쳐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본부장은 '내용이 뭐냐'는 질문에 "(공식) 발표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만 말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런 양자 협상은 각국 언어로 된 합의문을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전에도 그랬다.
하지만 미국은 김 본부장이 하늘에 떠 있던 그날 오후 1시 경 엠바고(보도유예)를 걸고 '정부 고위당국자' 명의로 상세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엠바고 시한은 오후 7시(한국 시각 4일 오전 9시)였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기념비적인 거래(landmark deal)'이라는 성명을 그 때 발표했다.
4일 오후 한국에 도착한 김 본부장은 기자들이 "미국에서 다 발표가 났다"고 구체적 내용을 물어봐도 "그런 일이 있었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일 정식발표가 있을 테니 나중에 평가해달라"고 눈가리고 아웅을 그치지 않았다.
김 본부장은 5일 오전 재협상 결과를 발표하면서 "서로 날짜를 맞춰 상세히 발표하자고 합의하고 헤어졌는데 (미국 측의) 일방적 발표라는 것은 비행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잘 몰랐다"고 해명했다.
이어 김 본부장은 "나는 (미국의 일방 발표를) 굳이 이해를 한다면 이해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며 "저쪽에서 굉장히 아주 불가피한 사정으로 미안하게 됐다는 답변이 있었다" 말했다. '대인배 인증'인 셈이다.
청와대에서도 영어는 중요하다
'대인배'는 김종훈 본부장만이 아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다음 날인 지난 달 24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전화 통화가 있었다.
핵항모 조지워싱턴호의 서해상 한미연합훈련 참여나 "중국이 북한에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 등 양 정상 통화 내용도 미국이 먼저 발표했다.
백악관발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야 청와대의 브리핑이 진행됐고 기자들의 항의에 김희정 대변인은 "미국 쪽에서 발표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고 답했다. 미국의 외교관례를 깨도 통 크게 '양해'한다든 점에서 청와대 역시 통상교섭본부 만큼 '대인배'다. 이렇게 대인배들이 많으니 이명박 정부 임기 동안 눈 좀 똑바로 뜨고 살고 싶으면 영어공부에 정진할 일이다.
그렇다고 미국식 영어에만 전력을 다할 일은 아니다. 영국식 영어도 중요하다. 2010년 1월 청와대는 이명박 대통령이 영국 BBC 방송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연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는 발언을 삭제한 채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BBC방송 제대로 안봤으면 큰일날 뻔 했었다.
김은혜 전 대변인의 이같은 행동에 대해 이동관 당시 홍보수석은 "(이 대통령 발언이)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조금 '마사지'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었다.
'Beef'라는 단어를 유의해야 할 이유
그리고 당분간 특히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영어단어가 있다. 바로 'Beef(쇠고기)'다.
청와대 홍상표 홍보수석은 "한미FTA재협상에서 쇠고기의 'ㅅ'자도 안 나왔다"며 쇠고기 방어를 이번 재협상의 최고 성과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미국 ABC 방송은 "우리는 한국이 모든 (월령의) 쇠고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국 쪽과 계속 논의하겠다"는 미 관리의 말을 보도했고 미국 통상전문지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도 "미국산 쇠고기가 월령에 상관없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도록 수주, 수일 안에 논의를 이어가기로 합의했다"는 미 무역대표부 관계자의 말을 보도했다.
쇠고기의 ㅅ자는 안 나왔는지 몰라도 Beef의 B자는 나온 것 같으니 말이다.
(어이없어 실소만 나오는 일들을 진지하게 받아쳐야 할 때 우리는 홍길동이 됩니다. 웃긴 걸 웃기다 말하지 못하고 '개념 없음'에 '즐'이라고 외치지 못하는 시대, '프덕프덕'은 <프레시안> 기자들이 쓰는 '풍자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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