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북한에 태어났어도 똑같을 거야" 언젠가 내 처가 자꾸 세상과 어긋나기만 하는 나에게 한 얘기다. 타고난 불평분자라는 말 같아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아마도 그랬을 거다. 100%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비겁한 나를 떠올려 보면 지금 북한에서도 아무 말 못하고 술만 마실 가능성이 꽤 있기 때문이다. 해서 틀림없이 있을, 그러나 술만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북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안녕하신가? 아니 4대강과 한미 FTA로 인해 부글부글하는 나만큼 자네도 평안할리 없겠지. 3대 세습이라... 누가 뭐래도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말일세. 하지만 지금 남에서 왈가왈부하는 데는 신경 쓰지 말게나. 속 마음이 어떻든 그건 다 남한의 대중을 향한 말들이니 말일세. 이제 진보가 북한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수구세력들의 공격과 대중의 혐오에 대해 예방주사를 놓는 것일테고, 제 속을 털어 놓지 못하고 입 다물겠다 선언한 사람들 역시 고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네. 그 어느 쪽도 자네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 남쪽 때문이라며, 예컨대 천안함 사태를 떠올리지 말게나. 남쪽의 형편없는 짓거리를 밤새도록 열거한다 해도 공화국 인민의 삶이 한 치도 나아지는 건 아닐테니... 공화국이 어떤 운명에 처해 있다고 자네가 생각하는지 진정으로 궁금하네.
나는 한 때 개성공단의 청와대 담당자였네. 그래서 사상 두 번째 자동차로 휴전선을 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지. 비서관이었기에 글로 남길 순 없었지만 당시에 내 느낌은 휴전선을 넘자마자 "하늘 아래 녹슬지 않은 것이 없다. 참고 또 참으려 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이었네. 거기서 움직이는 트럭은 대우 아니면 현대였고 마중 나온 낡은 벤츠를 빼곤 개성까지 네 바퀴로 굴러가는 물체를 단 하나도 보지 못했네. 아... 환경까지 고려한 삶의 질을 생각하면 자동차가 뭐 그리 대단한 지표냐고 하지 말게나. 개성의 고려 왕궁 부근을 빼곤 천지사방이 온통 벌거벗은 민둥산이니 북쪽에서 환경을 얘기하기엔 민망스럽지 않겠나. 70년대에 지어졌음직한 아파트 몇몇 집엔 땔감용으로 보이는 나무가 쌓여 있는데, 같이 간 통일부 국장은 노동당 간부 집일 거라고 하더군. 물론 틀린 얘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파트 난방을 나무로 하고 있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다시피 난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네. 특히 최근에는 인간이 협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를 곰곰이 따져 보는 중이라네. 이 쪽(행동경제학, 진화경제학)의 논리로 보면 북한은 참 괜찮은 세상일 수 있네. 핏줄(민족)을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익명성이 없는 사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고, 자기 정체성에 관한 인민들의 '렬렬한' 확신은 세상 어디에 버금가겠나. 바깥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치는 것도 역시 인간 협력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이니 북한은 인간 협력의 조건을 거의 다 갖추고 있는 셈이네. 150년 전에 다윈이 갈파했듯이 협력은 경쟁보다 나은 결과를 낳기 마련인데 왜 북의 인민들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것일까? 아.. 미국이나 그 꼭두각시인 남쪽 탓하지 말기 바라네.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그 사실 자체가 협력과 성장의 조건이기도 하니 말일세.
자네가 북의 나라면 내가 대학 시절에 자본론을 탐독했듯이 최신 경제이론도 들춰보고 있겠지. 아무리 북이라도 구글 검색을 막을 수는 없을테니 하는 말일세. 진화경제학은 그 수수께끼를 "잠김효과"(lock-in effect)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네. 협력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기술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면 결국 정체하게 된다는 건 이론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증명된 일일세. 그래서 협력하는 사회일수록 개방성과 다양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네. 북유럽이나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이 평등하면서도 높은 경제적 성과를 누리는 건 그들의 개방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네.
나한테 3대 세습은 "북한이 잠김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 드는구나", 이렇게 다가오네. 주체사상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론이 가져오는 획일적 문화, 그리고 기술마저도 "우리 것"을 찾는 건 실은 다른 세상 사람의 능력을 하찮게 여기는 폐쇄성과 오만함에 다름 아니네.
물론 그게 북한의 자구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네. 중소분쟁 속에서 김일성 주석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고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와 개방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사실을 왜 모르겠나. 김정은 '대장'이 아니고선 현상유지조차 어렵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자네같은 사람들이 인민의 마음을 얻어 치고 올라오건, 아니면 노동당과 군부가 스스로 근본적 변화를 꾀하지 않고선 공화국이 잠김의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니 말일세. 3대 세습은 군부와 당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길이니 폐쇄와 획일성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혹시 중국모델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 모델도 등소평이 화국봉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모택동 노선을 폐기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걸 자네가 모르지는 않을 걸세. 더구나 그 중국도 조만간 경제위기를 겪고 나면(사실 이때가 남북 모두의 최대 위기가 될 걸세) 일당 독재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걸세. 김'대장'이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자신의 아버지와 신의 반열에 오른 조부를 비판하리라 상상할 수 있겠나? 진정 인민의 뜻으로 떠오른 지도자라면 반드시 그리 되어야 하겠지만 냉혹한 국제질서가 더더욱 과거의 길을 고집하게 만들 것으로 보이는 걸 어쩌겠나. 중국 쪽에서 보면 전 역사를 통해 항상 목에 걸린 가시 같았던 한반도의 반쪽이 스스로 반식민지가 되겠다 하니 얼마나 기껍겠나? 공화국이 망하도록 놔두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주체적 식민지'를 힘들여 막을 이유도 없겠지.
이리 얘기하니 자네도 갑갑하겠지만 내 보기에 북한은 수많은 장점을 가진 사회네. 인민의 신뢰를 잃지 않고 있는 국가부문은 민주적 운영만 보장된다면 효율을 되찾을 것이고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사회경제 역시 훌륭한 토대가 될 수 있을 걸세.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시장경제를 무서워 할 이유는 전혀 없네. 그게 무서워서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화폐개혁'의 칼을 휘두르는 게 오히려 우스갯거리라네.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세상이 어떤 것인지 상상을 하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일걸세. 어느 세월에 그게 가능할까, 비관부터 하지 말기 바라네. 자네들이 폐허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웠듯, 또 우리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던 군부독재 타도를 이뤄냈듯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면 틀림없이 북한이 진정한 '인민 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될 걸세. 또 우리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날, 우리는 만나게 되겠지.. 막걸리를 푸지게 마시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면서...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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